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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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디지로그'라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것은 작가도 책의 내용도 아니었다. 단순히 제목때문이었다. 이어령선생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내가 이어령님이 대단한 필력가이시라는 것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작가를 보지않고 내용을 보지않고 제목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디지로그' 라는 제목이 정겨웠다. 디지로그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한 신조어이다. 자세히 말하면 디지털의 기술과 아날로그의 감성을 합한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가 아날로그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자판보다는 글씨가 더 쓰기 편하고 디지털기기에 대해서는 한발 앞서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아 매번 뒤늦게 물건을 구입하고는 하였다. 디지털이 내게 가지는 의미는 차가움이었고 아날로그가 내게 가지는 의미는 뜨거움이었다. 그랬기에 차가움보다는 뜨거움을 지향하는 인간으로 남고자하여 일부러 아날로그에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디지털의 매력을 애써 외면하면서. 차가움은 차가웠기 때문에 뜨거움을 원했으며 뜨거움은 뜨거웠기 때문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고 싶어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둘중 어느 하나를 고르면 하나를 포기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내게 이책의 제목은 함께 할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메일보다는 편지가 따뜻하기는 하지만 번거로움에 자주 쓰지 못해 실용성이 없었던 편지에  이제는 메일로 편선지를 고르고 손글씨로 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예가 너무 세대에 뒤떨어졌다 해도 이해해주세요-저는 요즘에야 메일을 보낸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키워드를 '디지로그'로 보고있다. 이것만으로 매력적인 일이지만 더욱 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일은 과거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가 이어지는 이야기만큼 매력적인게 어디있겠는가.

 

 작가는 이 책에서 상당부분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머루주는 담가주었으되 그 머루주를 얼마나 숙성시켜 맛있게 먹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섣부르게 먹을 것인가 향과 맛을 다 음미할수 있을 만큼 상상력을 발휘할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작가를 원망했었다. 작가만 알고있는 듯한 그 말투에 나는 머리속으로 작가가 던진 실마리하나에 상상력과 내 얕은 지식과 경험을 떠올려야했다. 작가는 내게 능동적인 수신자가 되길 바란것이다.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오로지 독자의 몫인것이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데로 받아들여라. 작가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입장에서 내게 한국적인 방법으로 책을 보기를 요구한다. 한국인은 상대방의 얼굴이나 행동 말투에서 그말을 한 사람의 의도를 짐작하고 받아들인다. 외국사람들처럼 티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장점은 상대방에게 섬세하리만치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작가의 말투와 보이지 않는 감정을 보고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알았으니 나는 작가에게 투정할 수 없다. 나는 작가가 뛰어준 디지로그라는 배를 나만의 방식으로 치장해야한다. 그 치장이 내 짧은 견해로 틀린거라 하더라도 전혀 겁먹을 필요가없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이 책의 후편인 전략을 내 배의 인테리어 담당으로 보내주기 했기 때문에. 이 책은 '선언'이다. 배가 출항의 포를 올렸으니 내가 탄 배는 이미 출발했다. 뛰어내리면 망망대해니 나는 그 시간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럼 디지로그의 배를 천천히 편한 마음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배의 겉은 견고하며 정교하다.이것이 디지털의 기술이다. 디지로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디지털의 기술과 아날로그의 감성의 결합이다. 우리나라가 디지털 강국이라는 표현은 이제 너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테니 그면에서는 더 설명할 말이 필요없다.(배의 정교함과 견고함을 더 말할 필요가 없게죠?) 우리는 디지털강국으로 안주해야하는가...? 작가는 우리에게 디지털 강국을 뛰어넘어 디지로그의 강국이 되라고한다. 디지로그는 차가움과 따스함의 공존이다. 디지털강국이라는 이름으로 차갑지만 튼튼한 갑옷을 만들었다면 옷을 입을 주인을 구해야한다. 그 주인을 어떻게 고를것인가? 차가운 머리를 가진 사람이 전장에서 승리할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병사들을 함께 데려가지는 못한다. 병사들을 이끌 사람은 따스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어야한다. 그 주인이 아날로그인 것이다. 차가움과 뜨거움은 어느한쪽 발을 담그고 있으면 힘들기 마련이다. 둘을 합한다면 그 따스함속에는 언제든 몸을 담그고 있어도 빼고 싶지않을 것이다. 디지털의 기술과 아날로그의 감성의 융합은 우리에게 기분좋은 온도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배의 외관을 다 살펴보았다면 그속의 아날로그로 내려가 보자.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뒤떨어졌다고 무시했다. 과거를 토대로 서지 못함은 사상누각이 될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밝혀줄 단하나의 열쇠라면 그 탑은 입김하나에도 무너질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을 위해 지은 집에서 살아야 편안하다. 한국적인 아날로그는 무엇인가. 작가는 한국적인 아날로그를 한국인의 식습관과 연결시키고 있다. 상상이 가는가? 우리가 매일 매일 먹는 식습관이 디지로그로 가는 열쇠였던 것이다. 한국인은 무엇이든 잘 먹는다. 나이도 먹고 욕도 먹고 챔피언까지도 먹는다. 먹는것은 무엇인가? 남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먹는게 남는것이란 속담을 작가가 말했을때 '옳커니!'하고 무릎을 쳤을만큼 이말은 굉장하다. 여태까지 우리가 먹은게 얼마인가. 그 모든게 다 사라지는게 아니라 남아있는 것이다. 먹는게 남은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어금니로 꼭꼭 씹어먹어 우리 속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먹는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생존을 위한 삶보다는 한단계 높은 단계를 지향하며 살겠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거기에 작가는 한소리한다. '당신들은 먹는것을 너무 우습게봐.' 우리는 먹기 위해산다.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랑을 먹기 위해 칭찬을 먹기 위해 행복을 먹기위해 말이다. 그런데 먹는게 뭐 그리 대수냐니!! 우리는 식구로 출발해 어디서든 식구로 살아가는데 말이다. 집식구 학급식구 회사에서 한식구 월드컵때는 전국민이 붉은악마라며 한식구라고 부르짖는것이 한국이다. 이런데  먹는것 만큼 중요한게 어딨겠는가.

한국이 먹는것만 잘한다고 디지로그의 강대국이 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로그인 이배는 나무로만 이루어진 것이아니다. 수천가지가 수만가지가 모이고 모여 배를 만든것이다. 모아놓았다고 다가 아닐것이다. 모아놓더라도 섞어놓더라도 그것은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만의 자리에서 제 기능을 다해야 배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한국인의 비빔밥정신은 놀랄만큼 디지로그의 길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러 재료가 섞였 새로운 맛을 내지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면 속에든 모든 것들의 맛이 난다. 이것이 한국의 경쟁력이다. 합하여 새로운 맛을 내지만 그 속 맛또한 변하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아날로그가 디지털 속에 들어간다하더라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사라질거라고 겁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속에 들어가 새로운 맛을 창조하고 있지만 또한 우리에게 아련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고있기도 하다.

 

 작가는 한국을 사랑한다. 한국인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한국을 좋게 좋게 보는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한국을 청룡열차라고 부르며 한국의 불안정성을 인정한다. 그 불안정때문에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만 작가는 그 불안정성까지 품어주려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그것에 안주하지는말라. 우리는 청룡열차가 아슬 아슬 하더라도 타는 것처럼 그 청룡열차는 반드시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청룡열차에서 떨어지는 끔찍한 사고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 청룡열차 타기를 포기한다면 한국인이아닌것이다. 한국인은 그 사고를 낸 청룡열차의 문제점을 찾아내 고치고 앞으로의 예방을 한후에 다시 청룡열차를 타는 용기를 가진 민족인것이다. 첩첩산중에서 먹을게 없어 고민하는게 아니라 그곳에서 나물을 뜯어 그것을 먹는 민족이 한국인이다.

 

 아직 나의 디지로그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전략이 나오기 전에 나는 디지로그의 배를 보다 아름답게 하지만 조화롭게 꾸밀것이며 전략이 나왔을때 과감히 맞지 않는 그림이 있다면 전략인테리어와 함께 그 그림을 다시 그려넣을 것이다. 디지로그의 항해는 나를 믿어준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여행이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

그러므로 이 책은 와성된 것이 아니다.

읽는 사람의 상상력 속에서 조금씩 발효되어 가는 머루주이다.

*

젓가락이 상호의존성과 관계를 중시하는 배려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포크와 나이프는 개체의 분리를 기본으로 하는 독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한국인이야말로 디지털의 공허한 가상현실을 갈비처럼 뜯어먹을 수 있는 어금니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이버스페이스의 디지털 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 파워가 희망의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

쌀밥은 여든여덟 번 손이 가야하다는 농업시대의 전설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도 밥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산업과 정보시대의 두 기술을 한데 모은 자동 전기밥솥으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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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 잃어버린 나를 만나는 이야기
쉬타오 지음, 장연 옮김 / 고려원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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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할머니께 천사가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천사가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어디에 천사가 있냐고 하늘을 가리키며 내가 물어보자 할머니는 손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에 있지하며 나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는 할머니의 말씀에 에이~~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막내이모의 어린 아들이 "내게 천사가 있는거야 누나"라고 물을때 하늘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할머님께서 하신것처럼 나도 그 아이의 가슴을 가리키며 천사가 있다고 한다. 힘껏 껴안아주면서.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그 아이도 에이~~하면서 입을 삐죽 내민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더욱 꼭 안아주었다.

 

 어린시절 할머니가 내게 천사는 내 속에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려했다. 알았더라면 더욱 사랑하며 살았을텐데...나를, 가족을, 친구를, 주위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며 껴안으려 했을텐데 말이다.

 

 이 책은 내게 천사가 내안에 있다는 할머님의 손끝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이 발음해버려 식상한 표현이 되는 단어가 여러개가 있다. 가령 사랑이라든지 희망이라든지 이 책의 제목처럼 천사라든지. 너무 많이 발음하여 낡아버린 단어같지만 그 단어들이 가진 속뜻은 식상해지지 않는다. '천사'라는 제목을 처음 보고 피식 웃음이 난건 그 때문이었다. 책의 겉커버가 있을경우 그 커버를 벗기고 읽는게 나의 버릇이라 커버를 벗기자 드러나는 노란 책하나! 그 위에 새겨진 '천사'라는 제목의 느낌은 전과 다르다. 하얀표지의 제목과 노란표지의 제목은 내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 천사..천사.. 중얼거리는 횟수만큼 천사는 내가 천사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떨리게 다가왔다. 저 파란 하늘에 달려있는 하얀 구름뒤에 숨어 나를 볼것같은 천사를 떠올리던 그때로 돌아가본다.

 

 노란색 표지를 숨긴 책은 앉은 자리에서 한시간만에 다 읽어내려갔다. 낮에 읽은 이 책때문에 하루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차분해지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고. 쉬이 읽히는 책은 어려운 책에 비해 선물 같지만 이런 책들은 숙제를 하나씩 지어준다. 꽤 무거운 숙제를. 무게가 가볍다고 넘기는 책장이 가볍다고 우스이 보면 안된다. 책을 덮는 마지막장의 무게에 책이 내주는 숙제의 무게가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책은 공평하다. 읽을때 어려운 책들은 읽고나서는 오히려 가벼운 상쾌함을 전해주지만 읽는 내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은 쉬운 책들은 덮기가 두려울만큼 숙제를 떠넘긴다. 이 책 또한 내게 숙제를 내주었다.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라서 남의 것을 보고 한다거나 정답을 찾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전적으로 내 숙제인것이다. 내가 어떻게 숙제를 하냐에 따라 답이 내려지다. 어려운 숙제라고 하기 싫어 책을 읽은 것을 물릴수는 없는일. 그리고 대학 졸업후로는 숙제가 없기에 이런 숙제는 예전을 추억하며 기꺼이 해보려고 한다.

 

 천사가 내게 준 숙제는 내 마음속에 있는 8가지 씨앗에 싹을 틔어 잘 가꾸라는 것이다. 싹을 틔어 가꿔 자라게 하는 것인만큼 그 씨앗의 정보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게 필요하다.

 

 이 책의 천사이야기는 천상의 천사이야기와 토니가 지어낸 '천사이야기' 두개이다. 영원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천사는 인간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다. 토니는 그 천사를 만나(처음에는 천사인줄 모른다) 천사가 인간에게 주려는 선물을 '천사이야기'라는 글에 담아 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사가 인간에게 주려고 했던 '마음의 힘'을 알린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면 마음은 그만큼 힘이 세다는 것인데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힘이 강한지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내 마음은 나약하다고 스스로 깍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내 마음의 가치는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고 평가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가치가 되는건 아니므로 내 가치는 내 스스로 정해야한다. 내 마음의 힘을 믿어야 내 가치를 믿게되는 것이다. 할수 없다고, 어렵다고, 두렵다고, 안될게 뻔하다고 포기해버리면 마음은 작아져서 점점더 마음 속 깊이 들어가버리게 된다. 한번 더 생각하고 한번 더 용기를 내고 한번 더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책은 말하고 있다.

이런 글이 적힌 것을 보면 처음 드는 생각이 말은 쉽지라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쓰기 쉽다고 하기 쉽다고 이런 글을 써낸 것은 아니다.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한번 해보라고 용기를 주기위해 이 천사를 보내준 것이다. 어려운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테니 한번만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다.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를 떠맡아 고심끝에 문제를 풀 방법을 찾았을 테고 그것을 혼자만 알고 있지 않고 나눔에 나선것이라고 봐야한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밭에는 천사가 말하는 8가지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몇개의 씨앗을 발견한 사람도 있을테고 한두개만 발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발견을 하지 못한 케이스에 가깝다. 그러니 지금부터 물을 잘 줘서 싹이 나오는 것을 보고 씨앗의 위치를 찾아야한다. 간혹 늦게 싹을 틔우는 녀석이 있을테니 조급하게 마음 먹을 필요는 없다. 느긋하게 내 마음을 믿고 손을 뻗어 시작하는 것이다. 물을 뿌릴 호스를 찾기 전에 마음의 밭을 고르게 갈아야겠다. 내 마음을 보듬으며 나를 보듬다 보면 남을 위한 사랑까지도 배울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좋은 봄날 천사를 만나 씨앗을 달라고 내가 말하자 천사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천사는 내가 태어날 때 부터 씨앗을 선물로 준 것이다. 주신 선물을 너무 늦게 발견해서 죄송하다고 하자 천사는 또한번 빙긋이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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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가는 옛 길 한빛문고 17
이순원 지음, 한수임 그림 / 다림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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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가는 옛길>은 수호라는 주인공의 초등학교 은사였던 '이관모'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으면서 그 선생님으로 받은 상처와 서글픔 그리고 분노를 추억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모 관모가?'하는 말을 내뱉는다. 순간 나는 주인공의 됨됨이에 편견을 키우기 시작했다. 은사님에게 관모라는 이름을 부르다니 말이다. 우스개소리로 이름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고인이 되어버린 분께 '관모'라고 부르다니 이게 무슨 말투란 말인가. 그러나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아아..관모라고 부른게 어디냐라는 생각이 든다. 나였으면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을거라고. "죽었다구? 그래."라고 전화를 끊었을거라고. 그리고 그 시절의 분노가 치밀어올라 은사의 생각은 바로 머리를 털어버려 얼른 사라지게 했을거라고. 그러나 수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관모를 떠올리며 그와의 일을 용서하려한다.

 

수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경주. 초등학교 시절 지물포와 포목점을 하는 부모를 둔 그 마을 가장 잘 사는 사람의 둘째부인의 아들 경주(그의 동생은 석주)였다. 그 아스라한 어린시절 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이관모라는 선생님께 온갖 이쁨을 받았던 아이가 경주와 석주형제가 한쪽에 서있다면 그에 비해 수호는 점심 대신 장작개비 하나를 가져가 점심값으로 내고는 옥수수죽을 먹는 그렇지만 당차고 글짓기를 잘하는 동생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그의 동생은 은호) 집이 가난해서 가난한데도 글짓기도 잘하고 똑똑해서 관모선생님의 미움을 독차지하게 되는 수호와 은호형제가 다른 한편에 서있다.

 

 하루종일 배가 고픈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부자인 아이가 부럽다는 마음보다는 대다수가 가난하니 가난이 불편이지 창피한게 아니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아빠는 어린시절 호박만 너무 먹어서 어른이 되면서 호박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먹지 못한다고 한다. 할머니의 손이 떠올라서 나날이 말라가는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라서 아빠를 포함한 7남매에게 호박을 먹이고 그것조차 먹지 못한 할머니의 말라가던 팔다리가 떠올라 아빠는 아직도 호박을 먹지 못하신다. 아직도 술의 힘을 빌어 말해야하만 하는 그 아픈 그시절을 아빠는 가슴에 품고 사신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누구나 가난했기에 기죽지 않고 살수있었다며 아빠가 학교다닐때 달리기는 일등이었다고 크게 웃으며 이야기하시는 아빠의 얼굴은 아름답게 빛나신다.

 

 그런 시절에 학교를 다니던 수호는 시골의 한학년에 한학급 뿐인 학교에 동생 은호와 다닌다. 남들보다 더 큰 장작개비를 들고 학교를 가서 행복하게 웃을수 있는 아이였다. 그런 그가 아픔으로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되는건 이관모라는 선생님이 전학와서 동생 은호의 4학년 담임이 된 후이다. 은호는 수호를 닮아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다. 그 가난한 시절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던가. 그런 존재인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사람으로 변할때의 기분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수 있겠는가. 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첫번째 질문은 '이반에 가장 잘 사는 집은 누구인가?'였다. 그 반의 가장 잘 사는 아이는 석주였다. 그때부터 관모는 밝게 웃으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은호의 얼굴에 어둠을 드리우게 하고 석주만을 편애한다. 수호의 사정은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한결 다행이었지만 글쓰기를 잘하는 수호의 글씨기반 선생님이 관모가 되면서 수호의 재능도 어둠으로 가려지게 된다. 누가봐도 관모의 행동은 잣대에 너무나 크게 어긋난 거였지만 돈 앞에는 작은 외침은 사그라들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차가운 진실을 관모를 통해 어린 나이에 배워나간다.

 

 원래는 어른을 위한 책이었다는 이 책을 작가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각색을 했다고한다.

어른의 눈에 맞게 나왔다면 묘사가 더욱 생생할 거란 아쉬움은 남지만 책을 보며 느낀 아픔과 분노는 같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눈물을 쏟게 하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혀야했던 부분은 관모가 수호와 은호형제를 세워두고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한 사건이었다. 장작을 가져오는 은호만 청소를 시킨다며 은호가 장작을 가져가지 않아 우기는 은호에게 교문앞에서 자신이 가져온 장작을 주며 가져가라고 하자 형의 마음을 알게 된 은호는 그것을 반으로 갈라 같이 가져가자고 한다. 반으로 자른다하더라도 다른 아이들이 가져온것 보다 큰 장작을 두 형제는 나눠갖는다. 그 모습을 본 석주가 관모에게 일러 점심배급을 하지도 않는 관모가 나와 두형제를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아이들로 만들로 버린다. 그리고 서로의 뺨을 때리는 처벌을 한다. 수호가 주먹만 쥐고 있자 날아드는 관모의 손. 관모가 무서워 손을 드는 은호의 작은 손. 손을 펴지 않기 위해 주먹을 더욱 꽉 쥐는 수호의 손. 그렇게 주먹을 쥐며 수호는 생각한다. 내가 만약 어른이 된다면 그리고 선생님이 된다면 저런 선생님만은 되지 말자고. 마음이 아리고 아리면서 수호의 꽉 쥔 주먹만이 생각난다.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건가. 그 아이는 처음으로 그날 아버지를 원망한다. 가난한것을 원망한다. 한귀를 닫고 세상을 살아가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눈물을 삼키며 분노를 남긴다.  책에서 수호의 부모님의 역할은 상당히 작다. 수호가 아버지를 원망할때 나는 그가 무언가를 해주길 바랬다. 가서 관모의 멱살이라도 잡아주길를 바랬다. 그러나 그 후의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또한번 내 얕은 생각을 후회한다. 이제 옥수수죽을 먹이지 말고 하루에 한번씩 덜어놓아 모으는 쌀을 애들에게 먹이자고 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참아야한다고 그 쌀 지금 먹으면 수호 은호 중학교 못 보낸다고. 그러니 참아야한다고. 수호도 나도 그런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된다. 아버지는 역시 큰 산이었던 것이다.

 

 관모의 폭압은 그 후로도 계속되지만 그런대로 꿋꿋이 견디어내는 수호와 은호이다. 그런 그들이 자라 관모의 부음을 들었을때 어찌 선뜻 가겠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수호는 간다.

대관령을 넘으며 그는 관모에게 간다. 그를 용서하러. 그 시절을 보듬으러. 하지만 나는 쉬이 관모를 용서할 수가 없다. 가난이란 이유로 약자였던 시절. 그것을 어린 그들에게 애써 알려준 그가 나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수호 그는 정말 용서한걸까.

용서로 인해 찾아드는 마음의 평온함은 알고 있지만...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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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중독 - 조직의 도전 정신을 없애는 리더의
로저 마틴 지음, 정철민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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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표지가 강렬하다. 표지의 강렬함때문에 읽기 전부터 가슴이 뛰었던 책이다.하지만 가슴이 뛰는 반면 나와는(회사생활을 해보지 않았으므로) 상관없는 이야기의 책이라는 생각에 겁이 나기도 했다. 책표지를 열고 들어가면 '책임감 바이러스 테스트'를 하는 설문지가 나온다. 나는 책임감 회피형으로 책임회피 상태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것으로 나왔다. 음...책임감 회피형의 설문지는 내가 택한 것이고 진다은 위험성이 있다는 것으로 나왔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아 내가 책임감회피가 어느정도는 있는듯하다. 딱딱한 책이라 겁을 먹고 책장을 열었는데 간단한 진단지가 있어 책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져갔다. 그렇게 기대감반 두려움반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첫번째 목차를 읽어내려갈 때만해도 이 책을 쉬이 읽어낼수 있을줄 알았다. 하지만 책의 두번째 목차를 읽을때는 이미 내게는 한계가 왔다. 대학 졸업후에 오랜만에 만나는 전공서적을 읽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렇기에 두목차만 읽고 책을 덮어둔 후에 2주나 지난뒤에서야 오늘 두목차를 다 읽어내려 책을 마쳤다.  책이 어렵다거나 내용이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다거나 한것은 아니었다. 다만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이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어서 책을 손에 잡기가 어려웠던 것이다.기대가 컸던 만큼 내게는 벅차고 힘이 들었던 책이다. 기업생활에서 팀원간의 문제가 있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여기에 나오는 사례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덮었던 이 책을 출판사에서 보낸 메일에 뜨끔하여 다시 책을 피게 되었다. 분명 내가 읽고 싶다고 이벤트에 응모를 해놓고서는 나와는 다른 이야기라는 이유로 책을 손에서 놓아버리다니 이거야말로 책임감회피의 전형이 아니고 무엇인가...?!('21세기북스'출판사께 죄송한 사과를 먼저 올립니다. 다음에는 꼭 일찍 읽고 쓸께요)  

 

 <책임감 중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있다. 어느 상황에 책임감 바이러스(과잉/회피)가 생기느냐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로 나눌수 있다. 책임감 바이러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를 쉽게 적용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내가 그동안 상상했던 리더와 이책에서 말하는 올바른 리더와는 큰 괴리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쉽게 보는 멋진 리더라함은 혼자서 알아서 척척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책은 그런 영웅적인 리더가 회사와 팀원을 망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대부분 나에게 리더가 팀원과 협력하는 모습보다는 거의 혼자서 책임을 맡아 일을 해나가고 극적으로 그 일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현실인 것 처럼 멋지게 보여주고 있으니 내가 이렇게 영웅적 리더를 훌륭한 리더로 보는게 이상할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영웅적 리더가 팀원과 회사를 망치는 이야기를 해보자.

 

*책임감 바이러스란 무엇인가?

 책임감 바이러스는 크게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책임감 과잉과 책임감 회피이다. 책임감과잉은 리더가 보이는 것이며 책임감 회피는 그 팀원이 구성원이 보인다. 책임감에는 법칙이 적용된다.

 

-책임감 보존법칙:

#제 1법칙-일한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책임의 균형 작용

        -즉 어느 한쪽이 책임을 많이 짊어지면 다른 상대방은 책임을 적게 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책임감 과잉이나 회피 바이러스에 빠지게 된다.

#제 2법칙-일정한 시간 동안 한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책임의 균형 작용

        -즉 우리가 책임 과잉이나 책임 회피 상태에서 쉽게 벗어나지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책임감 과잉: 리더는 회사에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었을때 그 문제의  성공을 위해 팀원을 믿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혼자서 책임을 떠맡으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구성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열심히 그 일을 위해 싸워나간다. (책임감 보존 1법칙) 하지만 혼자서 모든 책임을 떠맡고 일을 해내기란 리더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고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리더는 이때에도 자신만이 너무 많은 책임을 맡아다고 생각하며 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보다는 그들을 불신하고 결국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으로 일이 실패해도 무엇인 잘못인줄 깨닫지 못한다. 즉 끝에서 책임감 회피를 들어내게된다.(책임감보존 2법칙) 

-책임감 회피: 책임감 보존 1법칙에 따라 리더가 책임을 모두 맡게되면 책임의 양이 현전히 줄어들므로 리더를 제외한 팀 구성원은 책임감 회피상태에 빠지게 된다. 리더가 모든 책임을 맡아주었다고 팀 구성원들이 리더를 좋게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리더가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리더에게 일을 맡아서 하자는 의견을 내놓지는 않고 일이 실패할경우 모든 책임을 리더에게 돌린다.

 

이렇게 책임감 바이러스는 리더와 팀원을 망치고 나아가 함께 침몰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버린다. 리더와 팀구성원이 이런 현상을 띠는 가장 큰 이유는 지배가치때문이다. 사람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하는 과정을 멈추고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이때 리더는 싸우는 편에 서고 팀구성원은 도망가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즉 지배가치를 이겨낼 수 있다면 책임감 바이러스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책에서 알려주는 해결 방법을 말해보자.

 

*네가지 해결도구

-의사결정 프로세스: 이것은 팀 내에서 리더와 팀원들의 효과적인 협력을 위해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서로에게 숨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필 수있도록 그리고 그것을 적의없이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인 것이다. 서로가 의견을 내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내는 과정은 책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프레임 실험: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지배 가치를 지키기 위한 프레임을 만들면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해가므로 잘못된 프레임을 형성할 위험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프레임 실험'을 통해 자기 폐쇄적인 프레임을 바꾸고, 새로운 프레임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의 전환'의 힘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책임 사다리: 책임 사다리는 책임을 개인의 능력에 맞게 분해해주는 해결책이다. 능력에 맞춰 책임을 나누는 것이 각 개인의 의사결정 능력을 최대한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에 맞추다보면 자신감이 생기고 부담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책임 사다리를 책에서는 크게 6단계로 적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새로운 리더십과 팔로우십: 기존의 리더십과 팔로어십에 대한 생각을 바꿈으로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기존의 리더십의 가장 큰 문제점이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는것이었다면 새로운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건 대화를 통해 능력에 맞게 책임을 나누는 일이다. 팔로우십의 경우에도 과거에는 리더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모습을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혹은 팀에게 이로운 방법으로 책임을 나누려고 노력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요구하고 있다.

 

책은 문제점과 해결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말하고 있다. 해결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칭찬해줄 만하다고 본다. 회사의 리더나 어떠한 팀의 리더라면 나아가 팀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문제해결에 어려워한다면 책임감중독이라는 문제를 의심해봐야할듯하다. 진단이 내려진다면 해결방법이 상세히 나와있으니 실천해봄으로써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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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눈 - 3단계 문지아이들 11
다니엘 페낙 지음, 최윤정 옮김, 자크 페랑데즈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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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위한 책과 어른들을 위한 책의 차이는 무엇일까? 꿈과 희망이 가득한 문장은 어린이를 위한 것이고 현실의 차가움을 그대로 담아낸 문장은 어른을 위한 것일까? 아이들은 따뜻한 세상의 빛만 보면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어른은 그 아이가 자라났을 때 그런 세상만 보여줄 자신이 되어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차가운 세상을 먼저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아프고 힘든 세상이라도 아이가 따뜻한 힘을 불어넣어 준다면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책. 아이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나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책은 어떨까? <늑대의 눈>을 읽고 난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아이들이 읽기에는 무거운 주제이며 깔끔한 문체는 어른인 나를 빠져들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책이 마지막을 향해가면서 무거운 주제를 해결할 무지개가 떠오르고 간결한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가슴과 머리 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이것이 작가의 힘이란 걸까?


푸른 늑대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푸른 늑대는 동물원에서 혼자 산다. 아내 늑대가 죽은 후로 내내 혼자였던 푸른 늑대의 철창 밖으로 한 소년이 매일 찾아온다. 푸른 늑대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동물원 우리 안을 가로지르고, 또 가로지르고 음식을 거부하며 걷고 또 걷고 그저 죽기를 희망하고 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꿈의 북부를 뛰어다니던 그곳만을 응시할 뿐이다.

 

 푸른 늑대에게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을 하루도 그만두지 않는 소년은 성가시기만 하다. 그 성가심에 푸른 늑대는 당당하게 맞서 싸우기로 한다. 나도 너를 뚫어지게 봐주마! 하고. 하지만 소년의 눈은 두개인 반면 늑대의 눈은 하나여서 푸른 늑대는 번갈아가며 쳐다보느라 눈이 힘들다. 그런 늑대의 힘듬을 안 것일까? 소년은 한쪽 눈을 감고 늑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자 늑대의 눈에는 알래스카 꿈의 북부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늑대가 사람에게 얼마나 적개심을 가졌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늑대가 눈이 먼 이유는 무엇인지 소년은 하나하나 알아간다. 한쪽 눈을 감고서.

 

 소년의 이름은 아프리카. 누구나 소년의 이름을 들으면 소년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소년의 진짜 이름은 아프리카. 늑대는 소년의 한쪽 눈으로 노란 아프리카를 보게 된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왜 떠나보내야 했는지, 소년의 직업이 왜 많아져야 했는지, 푸른 아프리카와 회색 아프리카에서 소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며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아프리카와 푸른 늑대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푸른 늑대와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니 둘의 눈을 통해 바라보며 사람이어서 미안했다. 푸른 늑대에게서 그가 뛰어다닐 자유를 뺏어서 미안했고 아프리카에게는 그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상상도 못할 나무들을 베어내게 해서 미안했다. 인간만이 자신의 사욕을 위해다른 동물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만이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무력을 쓴다. 그런데 참 다행인 건 사람이 그 잘못을 빌고, 사람만이 자신들이 한 잘못을 되풀이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화해를 할 수 있는 두 손과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푸른 늑대와 아프리카가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서로가 두 눈을 뜰 수 있도록 창살을 없애고 마음이 장벽을 없애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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