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을 위한 책과 어른들을 위한 책의 차이는 무엇일까? 꿈과 희망이 가득한 문장은 어린이를 위한 것이고 현실의 차가움을 그대로 담아낸 문장은 어른을 위한 것일까? 아이들은 따뜻한 세상의 빛만 보면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어른은 그 아이가 자라났을 때 그런 세상만 보여줄 자신이 되어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차가운 세상을 먼저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아프고 힘든 세상이라도 아이가 따뜻한 힘을 불어넣어 준다면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책. 아이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나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책은 어떨까? <늑대의 눈>을 읽고 난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아이들이 읽기에는 무거운 주제이며 깔끔한 문체는 어른인 나를 빠져들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책이 마지막을 향해가면서 무거운 주제를 해결할 무지개가 떠오르고 간결한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가슴과 머리 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이것이 작가의 힘이란 걸까?
푸른 늑대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푸른 늑대는 동물원에서 혼자 산다. 아내 늑대가 죽은 후로 내내 혼자였던 푸른 늑대의 철창 밖으로 한 소년이 매일 찾아온다. 푸른 늑대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동물원 우리 안을 가로지르고, 또 가로지르고 음식을 거부하며 걷고 또 걷고 그저 죽기를 희망하고 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꿈의 북부를 뛰어다니던 그곳만을 응시할 뿐이다.
푸른 늑대에게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을 하루도 그만두지 않는 소년은 성가시기만 하다. 그 성가심에 푸른 늑대는 당당하게 맞서 싸우기로 한다. 나도 너를 뚫어지게 봐주마! 하고. 하지만 소년의 눈은 두개인 반면 늑대의 눈은 하나여서 푸른 늑대는 번갈아가며 쳐다보느라 눈이 힘들다. 그런 늑대의 힘듬을 안 것일까? 소년은 한쪽 눈을 감고 늑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자 늑대의 눈에는 알래스카 꿈의 북부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늑대가 사람에게 얼마나 적개심을 가졌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늑대가 눈이 먼 이유는 무엇인지 소년은 하나하나 알아간다. 한쪽 눈을 감고서.
소년의 이름은 아프리카. 누구나 소년의 이름을 들으면 소년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소년의 진짜 이름은 아프리카. 늑대는 소년의 한쪽 눈으로 노란 아프리카를 보게 된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왜 떠나보내야 했는지, 소년의 직업이 왜 많아져야 했는지, 푸른 아프리카와 회색 아프리카에서 소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며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아프리카와 푸른 늑대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푸른 늑대와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니 둘의 눈을 통해 바라보며 사람이어서 미안했다. 푸른 늑대에게서 그가 뛰어다닐 자유를 뺏어서 미안했고 아프리카에게는 그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상상도 못할 나무들을 베어내게 해서 미안했다. 인간만이 자신의 사욕을 위해다른 동물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만이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무력을 쓴다. 그런데 참 다행인 건 사람이 그 잘못을 빌고, 사람만이 자신들이 한 잘못을 되풀이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화해를 할 수 있는 두 손과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푸른 늑대와 아프리카가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서로가 두 눈을 뜰 수 있도록 창살을 없애고 마음이 장벽을 없애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