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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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깍짹깍, 시계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 들고 잠은 이미 저 멀리 떠나버리고 머리 속에는 몇 가지 영상들이 차가운 공포를 자아낸다. 밤이면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내게 <ZOO> 는 읽지는 말았어야 하는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공포 문학이겠니라는 겁없는 생각은 하룻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워야 하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10가지의 이야기, 그 속에 담긴 9개의 공포는 내게는 낯선 그러나 분명 내 온 몸을 휘감을 낯설음이었다.

 

 

 #어둠, 완전한 어둠이 아닐 때 공포는 배가 된다.

 정작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는 사람이라는 할머니의 말씀. 책 속의 공포는 대부분 사람이 자아내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람밖에 믿을 게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기도 하고, 사람이 가장 무서운 세상이라는 말 사이에서 얼마나 더 방황해야 하는 것일까? 스멀스멀한 공포라는 광고문구의 영화를 보면서도 이 정도의 스멀거림은 느끼지 못했다.

 

 오츠이치가 내게 선사 해 준 공포는 까만 어둠이 아니다. 투명한 어둠, 그 어둠을 응시하면 무언가가 보일 듯한, 그러나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저편이 자아내는 공포는 생각보다 혹독하다.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가 만들어 낸 투명한 어둠은 분명 무섭고 두려운데도 아름답다. 그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으면 전혀 다른 나와 그러나 나를 닮은 나와 인사를 하게 될 것 같은 매혹적인 아찔함. 사람의 마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 저자가 전해주는 공포는 더욱 섬뜩해진다. 그가 나인 것 같아, 나도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아서.

 

 

 

#색다른 공포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책 속에는 10가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양지 陽地의 시 詩>를 제외한다면 9개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팔에는 소름이 마음 을 얼어붙게 할 것 같은 공포로 몰아넣는다. 9 가지의 공포가 선사하는 섬뜩함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보다 놀라운 건 각각의 공포가 모두 다른 공포라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인걸까? 이 작가 얼마나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어둠의 밑바닥을 여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어쩌면 저자에게는 공포의 이야기 소재가 열리는 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

 

 9 개의 공포의 집으로 초대된 분들은 아마 그 공간의 아름다움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공포는 숨이 막히게 한다. 영화 <장화와 홍련>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공포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처럼 책 속의 공포를 읽을 때마다 그 아름다움과 투명한 어둠 속에서 나는 파도에 떠다니는 해초라도 된 듯했다. 그렇게 떠다니다 보면 주인공들과 공감을 할 수 있다.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 이 사람 이래서 이런 행동을 했구나 라고 공감하면서 공포는 색다름으로 전해진다. 지금껏 공포물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는데 이 책의 공포는 그렇지 않다. 책 속의 주인공이 내가 될 것 같기도 하여 더욱 그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영화를 기대해볼까?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이란 영화를 본 후 원작을 찾아 보게 되었는데 그건 예상외로 단편이어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책이 떠올랐다. 영화의 소재로 삼는다면 참 좋은 소재들로는 딱이라는 생각과 함께 영화로 나온다면 눈을 가리고서라도 꼭 보리라 다짐해 본다.

 

여름 밤 더위를 날려버릴 책을 하나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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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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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닌 삶의 무게가 유독 무겁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무엇을 해도 가슴은 채워지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 소리만 귓가를 채우고 나는 더욱 심연으로 가라앉고 마는 시절, 나를 위로한 건 행복한 사람들의 위로가 아닌 나처럼 힘든 혹은 나보다 더 큰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고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던 것일까? 나처럼 가슴에 찬 바람이 부는 이가 더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던 것일까? 

 

 책 속의 주인공 다다와 교텐을 통해 내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메워진다. 살아감에 있어 따뜻한 위로는 매번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혹은 사람에게서 받는 것 같다. 아니, 예상치 못한 위로이기에 위로 받는 것이다. 나를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처를 내보일 수 없는 까닭은 왜일까? 너무 가까우면 상처에 바람을 불어 줄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동안 왜 이렇게 많은 질문이 나를 채워 나가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질문과 알고자 하는, 얻고자 하는 답은 무엇일까?

 

 #살다가 후회되는 일은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건가요?

 1)대답- 예.

 2)부연 대답- 살아가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살아있다면 기회는 남은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당신이 누군가에게 줄 수는 있어요. 받지 못한 것을, 받고 싶었던 것을 줄 수는 있어요. 그걸 기억해야 해요.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도망치면 안 되요. 살다보면 기회는 있는 거니까, 그 기회를 꼭 잡아요.

3)덧 붙이기

-심부름집을 운영하는 다다와 옆에서 껄렁(?)대는 교텐은 초등학생 유라에게 기회는 꼭 온다고, 그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그들이 전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 있다. 가슴에 상처를 간직한 교텐과 다다,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는 것이다. 다시 행복해질 기회가! 그러니 열심히 살아 있어야 한다, 기회는 있으니까!

 

# 상처 받았고, 상처 주었다 해도 전과 똑같이 살 수 있는 건가요?

1)대답- 아니오.

2)부연 대답- 상처가 생기고 흔적이 남았다면 분명 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는 없어요. 다시 전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은 가끔 우리의 무릎을 꺽어놓기도 하고 우리의 숨통을 조이기도 해요. 하지만 다들 알고 있어요. 흔적은 남겠지만 분명 회복할 수는 있다고. 다시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순 없어도 회복할 수는 있다고. 내 안의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 흔적이 너무 생생하다고 겁먹지는 말아요. 천천히 상처를 문질러 주면 분명 그 부분에도 온기가 돌아요. 당신의 상처도 당신이라는 것을, 함께 이겨내고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요.

3)덧 붙이기

-교텐의 새끼 손가락에는 큰 상처가 있다. 유독 그 손가락에만 핏기가 돌지 않고 뻣뻣한 느낌이 드는 건 예전에 손가락이 절단 되어서 봉합을 했기 때문. 붙어있지만 전과는 다른 손가락. 그 손가락을 통해 알게 된다.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남지만 회복할 수는 있다고. 사람 마음 역시 마찬가지, 흔적은 남고 전과는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회복할 수는 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상처를 받은 쪽도, 상처를 준 쪽도 마음의 상처를 혹은 몸의 상처를 입는다. 일방향인 상처는 없다는 것, 누구나 자신의 상처에 바람을 불어 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을 기억한다면 누구나 누군가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왜 이 책이 나오키상 수상작인가요?

 

  너무나 익숙한 일본식 소설, 왜 나오키상을 수상한걸까?

 

  짤막한 사건들로 인해 마음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과 주인공들. 사람과의 관계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이어서 심부름 의뢰를 받은 다다는 그 심부름을 통해 의로인의 마음을 의도하지 않게(?) 치료하게 되고 다다 역시 치료를 받게 된다. 다다의 치료는 교텐의 역할이 훨씬 더 크긴 하지만.

 

 교텐과 다다는 각각의 상처를 간직한 채 고등학교 졸업 후 30 대가 되어 다시 만난 사이다. 아무 곳에도 갈 곳 없는 교텐은 다다네 심부름집에 얹혀살고 엉뚱함과 기발함 혹은 독특함으로 사건을 일으키거나 해결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하면서 다다의 심기를 건드린다. 다다 역시 교텐에게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둘 사이를 보고 있으면 찬 바람이 쌩~하고 불 것 같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찬 바람이 부는 건 두 사람에게 감춰진 상처를 들춰내는 작업임을 알게 되었다. 곪을대로 곪은 상처임에도 들춰보지 않아 얼어버린 상처에 바람을 쐬여주는 교텐과 다다, 그들의 마음에 간직한 상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울 만큼 천천히 치료되어 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는 동안 왜 나오키상을 받았는지 생각했다. 특별함이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는 내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따뜻해진 마음을 보게 된다. 아, 이런 따뜻함이 이 책을 나오키상을 타게 한 걸까? 고독과 고립, 그 속에서 그래도 희망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 되어 있는 것이라고 믿게 해주는 것. 역시 소설은 희망을 들려주는 것. 그것에 충실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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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기 1 - 부여왕 대소를 제거하라
김상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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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에 저자는 자신의 소설이 대중을 위한 것임을 이야기 한다. 독자에게 "재미" 를 주고 싶었다는 저자는 <정약용 살인사건> 을 재미있게 읽어 준 독자를 위해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 소설적 재미이자 소설적 진실을 찾고 싶었다는 저자는 이 책을 위해 1년 동안 고구려사 연구에만 몰두했다는 말이 책을 읽기도 전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저자가 그린 세상 속으로 편히 들어가 있으면 되겠구나라는 마음으로 고구려로 여행을 떠난다.

 

 

#결말을 다 아는 이야기 왜 읽냐구? 당연히 재미와 진실 혹은 허구의 위대함

 역사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내게 친구가 말한다. 끝이 난 역사책을 읽어서 무엇 하냐고. 그 질문에 무엇이라 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웃음으로 얼버무렸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질문이 되살아 난다. 사람인 이상 왕도 죽고, 하나의 나라 역시 건국이 있으면 멸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쫓는 내 눈길이 바쁘고 마음에 안달이 난다. 역사에 남을 만한 이름, 사건의 비중을 짐작 해 본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한 줄이라도 글로 남을 수 있다면 그 인물의 삶과 사건들은 분명 그 시대를 뒤 흔들어 놓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 큰 사건이고 큰 인물이면 역사에 까지 이름이 남겨졌겠는가. 그 흥미로운 진실에 약간의 허구를 덧댄다면 책을 읽는 사람 누구도 그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 사실.

 

 고구려는 멸망하고 왕은 죽는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며 시간은 흘러가는 걸까? 인기리에 방영 된 주몽 이후의 고구려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광개토 대왕, 장수왕 이전의 고구려는 주목 받지 못하는 것일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명고에 얽힌 슬픈 사연은 정말 이었을까? 무휼은 정말 호동왕자를 싫어했던 것일까? 숱한 질문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서서히 풀려간다. 시작된 부분에서 풀리기도 하고 끝 부분에서 풀리기도 한다. 시작과 끝 동시에서 풀리는 실타래를 따라 내 몸은 줄을 타고 흔들린다. 아, 이 긴장감과 아찔함. 이 것이 작가가 말한 읽는 재미인가!



#대무신왕의 이야기 속에서 빛나는 호동왕자!

 이 책의 제목은 <대무신왕기>이다. 대무왕은 고구려 3대 왕 무휼의 왕명이다. 왕명에서 풍겨지듯 대단한 무사 혹은 무신(武神) 이라고 남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아니 이름을 넘어서던 왕이었다.

 

<"아마 먼 훗날, 후세 사람들은 지금 대왕을 '무왕(武王)'이라고 부를겁니다."

"'무(武')' 한 글자로는 부족하지요. '대무왕 ' 이나 '무신왕'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

 

 무휼, 그는 우리에게 대무신왕으로 불리운다. 십대의 나이로 대소의 머리를 자르고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는 왕 무휼. 그러나 그는 행복했을까? 싸움을 위해, 전쟁을 할 때 피가 끓어오르는 왕이었으나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막강하게 만들고 싶었던 무휼, 그는 왜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것일까? 책을 통해 알게 된 무휼을 보며 입이 벌어지려 한다. 그의 패기와 열정 그리고 카리스마는 한 나라의 왕임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생소하고 그의 아들은 호동왕자가 내게는 더 친근하다. 내 느낌상 그런 것일까? 이 책 역시 무휼보다는 호동왕자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무휼의 생애를 조명하기 보다는 호동의 생애를 조명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무휼을 말하려면 호동을 말해야 하고 호동을 말하려면 무휼을 말해야 했기에 둘의 이야기가 함께 어색함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부터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이가 무휼이라면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이가 호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호동은 왕이 되지 못한 것일까? 그의 죽음에, 자명고에 담긴 이야기에 가슴이 찌릿해지는 건 작가가 너무나 생생하게 만든 캐릭터이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동안 모험을 좋아하는 무휼로 인해, 장난기 많은 하지만 생각이 깊은 호동으로 인해 몇 번이나 가슴이 철렁했다. 무휼과 호동 그들의 이야기에 달콤 쌉싸름한 역사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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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2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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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에 올라가면 음악을 음악실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년에 학급이 2학급 뿐인 학교인데도 건물은 생각보다 컸던 중학교는 음악실 역시 우리 교실보다 조금 더 컸던 기억이 난다. 음악실에 앉아 열린 창문 밖을 보면 바다가 내려다 보였는데 (우리 중학교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끝없이 푸르른 바다, 한없이 푸른 하늘 그리고 더위를 식혀주는 산들바람으로 인해 음악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오분 일찍 가서 창가에 자리를 맡기도 했었다.

 

 매번 수업 시간마다 클래식을 틀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던 선생님으로 인해 클래식이란 음악 장르를 알게 되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귀에 잘 들리는 클래식도 있었고, 하품을 위한 클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클래식도 있었으며 마음으로 파고드는 클래식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클래식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음악시간 뿐이었고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관심도 함께 마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음악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클래식을 듣고 무조건 제목을 외워 시험을 보게 하는 방식말고 작곡가나 곡의 탄생 배경등을 이야기 해주었더라면 클래식을 사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바다처럼, 하늘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자연스러운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어른이 다 되어서 클래식을 들어보려 해도 섣불리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 나를 위해 이름만은 수 없이 들어본 금난새라는 대단한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한 손에는 책과 다른 한 손에는 클래식 음악CD를 가지고서.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는 후기낭만주의에서 20세기에 걸친 중요한 작곡가 열네 명을 소개해주고 있다. 책을 들추다 CD를 먼저 발견하여 책을 읽기도 전에 들어보고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한 번 들어봤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이는 말일까? 그저 편안하고 때로는 웅장함으로만 들리던 음악은 곡을 쓴 작곡가의 삶과 곡 설명을 들은 후에는 전혀 다르게 다가와서 마음으로 들어온다.

 

 CD에는 복구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와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프로코피에프의 곡만 실려있다. (총 12곡이 실려있다) 내게는 독특하면서도 몰아치는 듯한 (프로코피에프, 교향곡 제1번 <고전> D장조 1장) 프로코피에프의 곡보다는 아름다운 소리와 섬세한 듯한 느낌을 주는(페르귄트 모음곡, 제1모음곡 아침의 기분) 그리그의 음악에 더 빠져드는 듯하다. 책 뒤에는 CD에 담긴 노래들의 간략한 설명까지 덧 붙여 주시는 섬세함을 보여준 저자로 인해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저자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음악가 두 사람을 묶어서 이야기 한다. 음악가의 일대기를 이렇게 전해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보고 정리했을지를 생각하니 저자의 노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은 늘이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 짧은 글 속에 알차게 집어 넣기는 더 힘들 것이다. 저자는 음악가의 태생과 성장 배경 그리고 음악을 향한 열정적인 삶 그리고 죽음까지 우리에게 전해주려 한다.

 

 내게는 시벨리우스와 그리그,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핀란드에서 태어난 시벨리우스는 조국을 사랑한 음악가였다. 핀란드의 민속적 소재를 음악과 접목 시켜 민족정신을 높인 작곡가로 칭송 받는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조국, 조국을 닮은 음악을 쓰기위해 노력한 시벨리우스. 그런 그가 대학에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 하지 못한 시벨리우스는 음악 공부를 병행하고 페루치오 부조니를 만나 음악을 향한 마음에 날개를 달게 된다. 그가 법학을 그대로 전공했다면 우리는 위대한 음악가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꿈을 향한 노력은 나이에 상관없이, 현실에 상관없이 계속 되어야 하는 것, 그걸 해낸 그가 자랑스럽다.  바르토크의 병마와의 싸움은 뒤늦은 성공을 더욱 안탑깝게 만든다. 맑고 강렬한 눈을 가졌다는 바르토크, 그의 음악을 들어보고 싶어진다.

 

 음악가의 일대기를 알고, 음악에 담긴 생각과 열정을 알고 클래식을 듣는다면 클래식은 한 걸음 더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야구를 즐기는데 있어 야구의 규칙을 알아야 하듯 클래식도 '약간의 준비'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약간의 준비만 한다면 우리는 그 준비가 민망 해질만큼 큰 감동을 얻게 될 지도 모른다. 클래식으로 향하는 문에 손을 대야 할 때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에 휴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혹은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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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그네스 선생님 푸른동산 6
커크패트릭 힐 지음,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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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프레드예요. 원래는 프레드리카 랍니다. 제가 사는 곳은 알래스카 랍니다. 맞아요. 하하, 한국은 여름이라고 하던데 조금은 저를 부러워 하시겠는 걸요. 하지만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세요. 알라스카의 여름은 일거리로 넘쳐나거든요. 겨울에 먹을 식량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어린이들도 자신의 몫은 톡톡히 한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내 마음을 글로 적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기쁨을 아그네스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답니다. 이제 여러분께 아그네스 선생님과 우리의 행복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그건 아주 소중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다보면 편지 속에서 풀들이 자라나고 꽃들이 피어날 것만 같아 두근거려요. (제가 너무 상상력을 지나치게 높였나요? 상상하고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저인지라 가끔은 엉뚱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많답니다.)

 

 알래스카에 있는 우리 학교 학생은 다 합해도 11명이랍니다. 고학년에 오빠들 세 명과 언니 한 명 저학년에는 두 명 중간학년에는 저를 포함하여 5명이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교실에서 선생님 한 분과 수업을 해요. 하긴 수업을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요. 아그네스 선생님이 계시기 전에 참 많은 선생님이 바뀌셨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작은 마을과 (조금 작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 좋은데 말이죠.) 우리가 점심 때마다 싸오는 생선을 견디지 못하셨어요. 우리는 선생님을 좋아했지만 몸에서 생선 냄새가 나면 선생님이 떠나실까 안절부절 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우리는 생선을 자주 (아주 자주) 먹고 손질하고 살아가니까요. 집에 일할 식구가 적기에 우리는 모두 일을 해야 한답니다. 생선 손질도 그 중 하나구요. 생선 냄새와 눈 앞에는 온통 눈과 얼음 뿐인 이 곳을 견디지 못하고 또 한 분의 선생님이 떠났습니다. 선생님을 태운 비행기가 남긴 바람에 우리들의 한숨이 담겨 있었답니다.

 

 한국에는 새옹지마란 말이 있다고 하지요? 슬픈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다는 뜻, 맞나요? 아그네스 선생님께 여쭈어 봐야 하는데 지금 연필을 놓기는 너무 아쉬워서요. 전의 선생님이 떠나고 새로 오신 선생님이 아그네스 선생님이셨어요. 신기하게 바지를 입고 계셨답니다. (우리 동네 여자들은 모두 긴 치마를 입는답니다) 아그네스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키는 알파벳 철자와 같은 영국에서 오셨어요.

 

 선생님은 교실 뒷편에 아주 아주 큰 세계지도를 붙이셔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거나 알려주셨고 책상을 둥글게 해서 앉으라고 한 뒤에 수업을 아주 재밌게 하셨답니다. 가장 놀란 일은 우리가 구호품으로 받은 너덜너덜한 교과서를 모아서 창고에 두신 후에 예쁜 색연필과 예쁜 연필 그리고 더 예쁜 학용품들을 주셨어요. 그건 새거였죠. 우리가 처음 써보는 새 것인 학용품이었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그린 그림을 교실에 붙이기도 하고 글씨 연습을 위해 알파벳을 공책에 붙여 주시기도 하셨어요. (쓰기를 잘하는 버사는 필기체로 된 알파벳 띠를 받았지요. 조금은 부러웠답니다) 우리가 글씨 연습을 할 때면 선생님은 책을 읽어주셨어요. 처음 읽어주신 책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건 <로빈 후드> 였는데 선생님은 등장인물이 바뀔 때마다 목소리를 다르게 해주셔서 꼭 만화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아그네스 선생님은 그 전 선생님들과는 달랐어요. 생선을 싫어하셨지만 비염이 있으셔서 우리 몸에서 혹은 도시락에서 나는 생선냄새를 맡지 못하셨고, ( 저는 조금 의심이 되기도 해요. 우리를 위해서 참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요.) 청각장애인인 우리 언니에게도 공부를 가르쳐 주셨어요. (언니가 수화를 배우는 덕에 우리들,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간단한 수화를 할 수 있답니다.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가장 달랐던 점은 우리에게 꿈을 갖게 해주셨어요. 우리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그네스 선생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수 많은 일들을 이야기 해주셨고 우리에게 있는 재능을 찾아서 더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전 글을 쓰고 싶어요. 글을 써서 아그네스 선생님처럼 용기와 꿈을 저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거든요.

 

 꿈결같은, 행복한, 따뜻한 이란 단어를 시간 앞에 집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도 아그네스 선생님이셨어요.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우리 마을은 점점 더 활기차 졌답니다. 이건 사람과 사람이 이뤄내는 기적 같았어요. 그 기적을 아그네스 선생님이 마을에 선물로 주셨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점점 더 아파와요. 아그네스 선생님은 1년만 이  곳에 계시기로 하셨거든요. 우리는 아그네스 선생님이 더 계셨주면 하고 바랐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그네스 선생님이 고향을 그리워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고향은 그런 곳이잖아요. 가고 싶은, 보고 싶은. 그래서 우리는 잡을 수가 없었답니다. 너무 소중하고 너무 존경하는 아그네스 선생님을요.

 

 여름 야영지에서 돌아오면 아그네스 선생님은 계시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9월말이 되어서 야영지에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학교에 불이 켜져 있었어요. 새로운 선생님이 오신 걸까요? 하지만 저 그림자는 너무 익숙한 걸요. 아그네스 선생님일까요? 저는 너무 두근거려 확인 하지 못하고 왔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았거든요.내일은 일찍 학교에 가야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찍 자야겠죠? 편지는 여기서 마칠게요. 아, 한 가지 같은 소원을 빌어주실래요? 그 선생님이 아그네스 선생님이 맞기를! 이란 소원을요. 그럼 모두 좋은 꿈을 꾸세요.

 

                                                 알래스카에서 프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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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는 이래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동화를 읽을 때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보면 역시 따뜻함이 우선인걸까? 황량한 알래스카에서 꿈과 용기를 심어주신 아그네스 선생님을 보며 눈물이 날 것 같은 따뜻한 감정이 가슴으로 차 오른다. 그냥 살고, 그냥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아이들의 삶을 변화 시켜 준 건 관심과 사랑. 돈이 들지도 않는 일. 그러나 더 힘든 일. 그 일을 하는 어른이 되고 싶어진다.

 

 행복한 알래스카의 소식을 라디오로 들은 기분이 드는 책. 프레드의 목소리는 어떨까? 쫑알쫑알, 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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