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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ㅣ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의 일 이었다.
여중생의 무릎 위를 웃돌만큼 눈이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아침 수업을 받기 위해 집 현관 앞에 서서 내리는 눈을 보다 겁을 먹고 서있는 내게 아빠가 삽을 들고 손짓하신다. 학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면 안 된다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 참 힘들어라고 속으로 중얼 거리며 삽을 들고 앞장서는 아빠를 따라 학교로 향한다. (그것도 방학 보충수업인데!!!!) 사방이 눈이라는 말은 이런 때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아빠와 걷는 길은 어느 새 꿈길처럼 몽환적으로 변했다.
아빠가 삽으로 파 놓은 길에 남은 아빠의 발자국만을 밟으며 가는 길, 그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맞추면서 조금 더 깊어지게 했다. 아빠가 건네 준 소중한 선물, 발자국을 보며 눈물이 왈칵 나려고 했던 것은 왜일까? 왜 발자국에서 아빠의 마음이 느껴지는 걸까? 차가운 눈이 따뜻하게라도 느껴질 것 같아 발자국에 발을 대기 전에 손을 대보다 아빠에게 혼나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발자국을 밟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구나 라고 웃으며 학교에 간 그 날 아침 (물론, 학교는 휴강이었다;;;;;) 학교에서 있다가 홀로 집에 다시 돌아가는 길에 내 발자국이 조금 더 깊어진 것을 확인했다. 누군가가 밟고 갔구나, 아, 아빠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 그 사람도 가슴이 따뜻해졌을까?
마음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는 길은 행복하다.
시에 적힌 시인의 마음 발자국을 밟고 걸으며 난 행복했다. 아, 행복이란 말 이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읽은 시인의 시집은 이 시집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였다. 두 시집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시에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 말이 내 겨울의 추억과 겹쳐진다. 시인이 남겨 준 마음 발자국에 내 마음을 대보며 한참을 앉아있다 다시 일어나서 걸었다, 뒤에 따라올 사람을 위해 나도 마음을 내려놓으며.
길이 아니었던 곳에 길을 만들어 준 시인, 차가운 길에 따뜻함을 놓고 간 시인, 그 발자국에는 그리움, 기다림, 바다, 어머니, 애환 그리고 내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담겨 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시인이 발자국을 만든 건 부디 독자가 잘 걸어주기를, 자신의 시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말길, 마음에 따뜻함이 감돌기를 바랐다는 것. 그 마음이 따뜻해서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아 쉼 호흡을 해 본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뻘> 의 전문
<말랑말랑한 힘> 에서는 말랑이는 시들이 많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대쪽 같은 딱딱함이 아니라 말랑한 힘이 아닐까? 세상에는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들이 더 많고, 그들은 가슴으로 우는 일이 많아 몸이 수분에 젖어 말랑말랑 하지 않을까? 말랑이는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진다. 소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기쁨 혹은 위로 어쩌면 아픔을 잘 받아들이는 가슴이 되고 싶어진다.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전문
이번 시집 역시 짧은 시들이 많다. 바다 쪽으로 한뼘 더 나아가 짧은 시를 적고 싶었다던 시인의 소원을 바다가 들어 준 탓일까? 이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이다. 섬이 되고 싶어졌다. 울타리가 가장 낮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내 어머니는 되었지만 나는 힘들지도 모를 섬을 꿈꿔 본다.
여자 몸 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사십이 다 되어 홀로 돌아와
살아온 길 잠시 벗어 보네
낯선 고향에서 쉬이 잠 오지 않네
-<귀향> 부분
강화도에서 보낸 초반에 적은 것일까? 낯선 고향이라지만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귀향>으로 적고 있다. 그가 강화도를 마음의 고향으로 받아들인 것이겠지. 강화도에 가서 시인은 시를 적을 수 있고 마음을 위로 받았다고 했다. 강화도, 그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서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옥탑방> 부분
24평 벼랑의 집에서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이 구절이 눈을 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사회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시집을 아직 만나지 못한 지라 그 시집과의 만남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말랑말랑한 세상,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현실을 말해야 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겠지. 시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주는 건 아닌지.
땅 아래서
딱딱한 것을 깨오고
뜨거운 것을 깨와
도시는 살아간다
딱딱한 것들을 부수고
더운 곳에 물을 대며
살아가던 농촌에도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선다
뭐 좀 말랑말랑한 게 없을까
-<감촉여행> 부분
뭐 좀 말랑말랑한 게 없을까란 시인의 말에 전 당신 시가 말랑말랑해요! 라고 시를 읽다 말고 외칠 뻔했다. 시로 인해 삶이, 세상이 조금 더 말랑말랑 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 역시 강화도로 가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