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름 ㅣ 랜덤소설선 13
박범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들면 가본 적도 없는 바이칼 호수가 나에게 빠져들라고 유혹했다. 자살, 죽음에 반항하는 것? 그럴 수 없었다. 아득한 투명함 속에 난 꿈에서 몇 번이고 떨면서 혼절했다. 가본 적이 없는 그곳, 바이칼 호수. 그곳의 깊이는 1천6백여 미터. 수심 2백 미터의 물만이 새로이 바뀐다고 한다. 1천6백여 미터 호수 밑바닥의 물은 이미 수천 년전에 흘러든 거라고 한다. 그 밑바닥에는 낡은 자전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한 남자와 한 남자가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 사실은 그 이야기만으로 단정짓기에는 너무 부족한 삶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불멸의 나라에는.
<사람의 몸 어딘가에는 그 모든 기억을 저장해 놓는 거대한 호수 같은 장소가 있어서, 그 바닥에는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수한 과거가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뜬 아침, 아주 먼 옛날 잊어버렸던 기억이 그 호수의 바닥에서 불현듯 둥실 떠오르는 때가 있다.> -파일럿 피쉬 中, 오사키 요시오
바이칼 호수, 오사키 요시오란 작가는 바이칼 호수를 두고 인간에게도 그런 호수가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읽고서 인간의 주름살이 그런 호수가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인간의 주름살을 시간의 흐름에 관한 흔적으로 정의한다면 주름살에는 시간이 담겨있다. 그 주름살 밑바닥에는 불멸의 시간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아기였을 때부터 우리는 주름살이 있었으니. 태어날 때 부터 인간에게는 불멸의 시간이 담겨있다고 한다면 대체 그 시간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법? 태어났으니 죽음에 대항하는 법?
<주름>을 읽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생生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도, 어떻게 죽어야 겠다는 생각도 나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나는 김진영과 천예린을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도, 애처롭게 쓰다듬다가도 그들을 죽이지 못해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날 보고 어쩌란 말인가?
투명함이 깊어 무섭기까지한 바이칼 호수 앞에 서면 사람들은 죽음을 느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에 내게는 무섭다. 인간의 존재와 존재의 이유 그리고 의미에 대해 투명하리만치 보여주는 이 책 앞에서 나는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쓴다. 이마에 식은땀이 나고 가슴은 불편함을 기침으로 토로한다.
삶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바람이 나를 휘감아 어딘가로 떠나게 만든다고 그 바람을 조심하라고 말하며 이모는 바람따라 인도로 떠나고 말았다. 인도에서 이모는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왜 바람은 이모를 가만히 두지 못했을까? 인도에서 살고 싶다던 이모는 인도를 등지며 돌아오던 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가슴의 바람을 잠재우지 못해 가슴을 움켜쥐면서. 그 바람이 자신을 평생 유랑자로 만들어주길 바라면서도 무서웠다며 이모는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결혼을 했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 한밤중에 깨어나면 그 바람이 불어온다고 한다. 잠을 자지 못하는 바람이.
이모 말대로 살아가는 동안 내 존재를 뒤흔들 바람이 한 번쯤은 꼭 분다는 말에 나에게도 그런 바람이 부는 걸까라고 상상해 본다. 책의 주인공 김진영처럼 그런 바람이 나이 50이 넘어서 불면 어쩌나, 혹은 천예린처럼 살아가는 전부가 바람이면 어쩌나 라는 생각에 난 두려워진다. 분명 작가는 내게 강해지라고, 스스로를 찾아내기 위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흐르듯 죽지 않기 위해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데 나는 그 바람을 자꾸만 손으로 막는다. 손으로 막는 바람이 얼마나 막아지겠는가.
바람을 등지면 될 것을 등지지도 못하면서 고스란히 바람을 맞는다. 나는 흔들리고 싶어한다. 내 몸 속에 새겨질 시간의 주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싶어진다. 그래, 나는 삶 속에서 살고 싶다. 물 흐르듯이 아니라 물의 근원을 찾아 걷고 또 걸으며. 살고 싶다.
내게 이 책을 준 이는 나를 걱정했다. 선물하면서도 걱정했을 그녀. 그녀가 없었다면 책을 읽는동안 나는 너무 외로워 바이칼 호수로, 북극해로 가는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으리라. 그녀가 책을 읽는동안 내게는 손난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