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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굿바이
이시다 이라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일 혹은 내일 모레면 내 품에 안길 책이었다. 그럼에도 서점 속 그 무수히 많은 책들에서 이 책을 꺼내든 것은 책 속 표지에 빨려들 것 같아서, 이시다 이라의 끌림을 거부할 수 없어서 였다. 내게 안길 책이니 하나만 읽어야지란 생각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약간은 불편한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 남았으니 그동안 요 책 맛만 보고 다른 책 사냥을 해야지 했다.
책을 읽으며 난 서점에 있지 않았다. 잔잔한 멜로디와 함께 나는 청아한 바람이 불어오며 약간은 로맨틱해 보이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달콤하면서도 진한 커피맛이 감도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어느 이름 모를, 그곳에 가면 사랑을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노천 카페에 앉아 있는 나를 봤다.
나는 여지껏 살면서 책만큼 훌륭한 마법사를 본 적이 없다. 책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기도 했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사랑을 하고 싶게끔 만들기도 했으며 사랑을 추억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마법사가 어딨겠는가. 한 권의 책 속에 한 가지 이야기만으로도 마법에 빠지는데 책 속에 열 가지 이야기가 있다면 어떠한 마법이 펼쳐질지 상상이 가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시다 이라, 사랑의 마법사이며 전령사이다. 어찌 사랑하지 않고 베길 수 있겠는가. 이시다 이라가 전하는 사랑의 마법약은 10개의 별사탕. 서점에서 한 개의 별사탕을 맛본 후에난 참을 수 없었다. 별사탕을 먹어 본 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 하나만으로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는 없다. 나 역시 책 장은 넘어가고 알록달록 다른 색깔의 다른 맛의 그리고 다른 마법의 별사탕을 입에 넣고 깨물어서가 아니라 살살 녹이기기 시작한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달콤하게 마법이 지속되길 기대하며.
이시다 이라의 <1파운드의 슬픔>이 30대의 사랑을 그린 것이라면 <슬로 굿바이>는 20대의 풋풋한 사랑을 그렸다. 20대의 사랑이 이리도 귀여웠구나, 이리도 간절하고 이리도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구나란 생각을 해 본다. 내 20대의 사랑은 어땠을까? 10개의 사랑은 나의 사랑만이 아니라 나의 이별을 추억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역시 20대나 30대나 소중하고 간절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없어지리라 여겼던 설렘, 애달픔은 그 보다 더 깊어졌고 세련된 사랑을 할 것 같았지만 전보다 더 서툴렀다.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사랑, 사랑만큼 아무리 발음해도 낡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단어가 또 있을까? 10개의 사랑이야기를 들으면 질릴 수도 있겠다고 싶은데도 이리도 가슴은 설레이고 달콤하며 이시다 이라의 바람대로 나는 살짝 취기가 돌기까지 한다. 마치 사랑에 취해버린 소녀처럼. 마치 사랑을 처음하는 것처럼 사랑이 하고 싶어지려 한다.
이 책에 담긴 사랑이야기가 모두 달콤하리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사랑의 씁쓸함을 잊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책에는 씁쓸함은 감돌지 않는다. 씁쓸함보다는 쟈스민 차를 먹고 난 뒤에 꽃맛이 남아있다고 할까? 사랑이 주는 여운, 그것이 씁쓸함이 아니라 향긋함이 될 수도 있음을 책을 통해 깨닫는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그 전의 사랑과 제대로 이별해야 함을.
그런 적이 있었다.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이별을 하며 감정을 무디게 하기 위해 울지 않았던 적도 있고 사랑하지 말아야지라고 주문을 외우며 사람을 사귄 적도 있었다.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고 다음 사랑을 힘들게 하고 나를 힘들게 했다. 책은 그런 나를 떠올리게 했다. 책 속 한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이별여행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이별 여행을 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웃으며 보내줄 수 없을 것 같다, 눈물로 보내주기는 싫기에.) 내 마음 속 그 사람에게, 소중한 사랑에게 인사를 건내야 할 때가 왔음을 알려 주었다. 슬로 굿바이, 지난 사랑에 조금 늦게 인사를 하는 나지만 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이 나면서도 두근 거리는 행복하면서도 설레이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다 덮고 기다리는 친구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내 손에는 친구에게 선물할 <슬로 굿바이> 가 들려있다. '친구야, 행복한 사랑을 하렴. 하늘에 녹아드는 구름처럼 달콤하고 귀여운 사랑을 하렴.' 내 메시지에 사랑 중인 친구는 함박 웃음과 함께 조금은 쑥쓰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밥을 사줬다. 고마워!
이 가을, 우리 모두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강력추천 해 보는 책! 사랑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