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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향하여
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 해냄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를 위한 책이야 -
라며, 친구가 건네 준 책 제목은 <결혼을 향하여> 였다. 왜 안 웃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친구는 입술을 삐죽이며 웃게 해줄려고 샀단다. 이 책이 그렇게 웃긴거야? 라고 물어보자, 눈치 없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며 제목말야, 제목! 한다. 아,,,제목을 보고 웃어야 하는 거군. 스물일곱은 이런 제목의 책도 농담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른한 오후, 친구에게 받은 책을 펼쳐든 밤은 가을 초입이라기에는 너무 쓸쓸하고 추운 공기를 전해주었다.
가을밤, 책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글자를 따라가면서도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처럼 글자와 여백도 구분하지 못할만큼 헤매인다. 결국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이 책 무슨 내용이야? 나도 모르는데, 제목만 보고 산 거야.(정녕, 웃음을 주기 위해 산거란 말이냐!!!) 친구의 어이없는 문자에 커피 한 잔 타들고 와서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밤이다. 읽을 책과 커피 한 잔, 기분 좋은 풀벌레 소리들이 들리는 가을밤 그것만으로도.
책의 중반 정도가 넘어서면서 책이 무엇을 말하는 지 알고는 입을 가린다. 아, 책은 제목 그대로 였구나라고. 그 다음부터는 이전의 안절부절하고 불편한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저자의 아름다운 문체와 아리송한 문장들 그 속에 담겨진 깊은 마음을 하나씩 읽어가며 나는 행복해지려 하기도 하고 슬퍼지려 하기도 한다. 마치 딸의 결혼식을 앞 둔 어미처럼.
장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그가 책을 이끌어가는 듯도 하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잘 들을 수 있는 장님 초바나코스. 이 책은 마치 초바나코스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들어서 내게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다. 책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말, 행동을 따라가다보면 초바나코스는 하나의 결혼식을 내게 알려주려 그 길고도 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려 했음을 알게 된다. 그 결혼식은 분명 그럴만했다고 그에게 말한다, 고맙다고.
'너는 내 운명'이란 전도연 주연의 영화, 가족의 달 MBC 특집 다큐 '너는 내 운명' 두 개의 영상이 책을 읽는 동안 스쳐 지나 간다. 사랑은, 그리고 가족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고는 그리 깊은 슬픔을 견뎌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결혼식의 신랑 신부는 니농과 지노. 뜻하지 않게 에이즈에 걸린 니농에게 사랑을 보여주려 하는 지노. 이 책의 빛남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던 것이다. 책은 니농과 지노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각각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니농의 아빠와 엄마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부모가 견뎌내야 할 아픔을 잘 보여주었으며, 지노의 아버지를 통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일반인의 두려움 그리고 포용력을 보여주었으며, 니농을 통해서 에이즈 환자가 겪었을 아픔과 천대를 가슴 아리게 알려 준다. 책은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보고 겪은 일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흔들린다.
친구가 장난처럼 건낸 책에서 얼마나 많은 반짝임을 만났는가. 가을날, 아름답도록 슬픈 책은 독약이 될 수도 있지만 아름답도록 슬프면서 희망을 보여 준 책은 마음의 보약이 된다.
==========나를 울린, 마음을 흔든 구절들============
<나와 니농은 미친 척 하면서, 속마음은 감춘 채 서로에게 마음을 쓰면서 살아야겠죠. 권투하는 제 친구 마테오는 날 보고 미쳤다고 해요. 마테오는 나에게 그러죠. 너는 인마, 네 인생을 포기 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말해 주었죠. 내가 포기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포기한 거다.> -p.216, 지노
우리가 그들을 포기한 거다. 그랬다. 사회적 편견으로 똘똘 뭉쳐서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삶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으며 그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으며 그녀에게 죽지 않을거면 꽁꽁 숨어 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왜, 우리는 그들에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가.
< 사랑이라는 것도 있다. 너의 경우 사랑은 텅스텐만큼이나 무겁구나. 너는 이 프랑스 여자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한다. 그러면 선별하거라. 너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 여자는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죽어가고 있다. 여자는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둘러라. 너는 자식은 갖지 못한다. 그런 몹쓸 병을 다음 세대에 유산을 남길 위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금속은 모두 지하에서, 수은이 유황과 짝을 지으면서 생긴 것이라 믿었다. 지노, 너도 짝을 짓거라. 그 여자와 결혼하거라. 너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지 바이러스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고철은 쓰레기가 아니다. 지노야, 그 여자와 결혼하거라.> -p.130. 지노의 아버지
그녀를 죽이려 했다, 자신의 자랑스런 아들이 그녀로 인해 삶을 버리려 했기에. 하지만 그녀를 만난 후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포기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그는 인정하고 만다. 사랑이기에, 그녀는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 습관을 잃고 말았어요.
하늘을 나는 습관?
아니오, 벼랑 위에서 사는 습관.
바다가 굉장히 조용해요.
그 습관을 되찾을 수 있을 거요. > -p.193, 제나가 버스에서 만난 이와의 대화.
이들의 대화에서 나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가 떠오른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무섭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벼랑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떠밀었다............................................. 그리고 그들은 날았다>
우리는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만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절망에 처해보지도 않았으면서도 겁내고 두려움에 시간을 허비한다. 벼랑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 볼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몇 번은 벼랑에 서야 함에도 무서워서 벼랑이 줄 선물을 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