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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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이 감옥도 아닌데 사람의 마음에 수인囚人이 갇혀 있다. 이 시간 낮선 장소에서 내 마음 속 수인이 태어난 곳  변두리 피시방에 와서 상실의 시대를 이야기 하는 건 어쩐지 쓴 웃음이 난다. 그럼에도 혼자 모텔방으로 들어가지 못함은 아직은 이르기 때문이다. 잠들기 이르고, 생각을 하기에도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은 와타나베가 그토록 견디기 힘들어했던 4월이 두 번 되풀이 되는 것처럼 잔인하다.
 

 사람은 그런 것일까? 마음 속에 수인 한 명쯤은 두고 살아야 하는 슬픈 존재인걸까? 잊을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하려 해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얼굴을 가진 수인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와타나베의 나오코처럼, 나오코의 가즈키처럼 또 누구의 누구처럼...그런 수인을 품고 사는 우리기에 우리는 이토록 외롭고 흔들거리는 몸을 고독 속에 내 던져야 하는 것일까? 법정 스님말대로 하려고 애를 쓴 적이 있었다. 고독하되 고립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 고립,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그러나 나오코가 그러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그 일이 힘들어 지려 하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상실의 시대를 스무 살에 읽었다. 그 시절 내게 이 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달콤한 비스킷도, 씁쓸한 비스킷도 아니었다. 그저 7년이 지난 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다시 읽은 책에 지나지 않을만큼의 감흥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 책이 7년이 지난 후 온갖 맛의 비스킷이 담긴 통이 된다. 비스킷 하나마다 씁쓸한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책. 수분기 넘치는 바람과 비올 듯 흐린 하늘이 동반 되어야 할 것 같은 책은 읽는 동안 행복하지 않다. 그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펐고 우울했으며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이 여행 가방에 넣은 것은 왜일까? 문장마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듯한 느낌은 실은 내가 이 책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놓고 싶지 않은 책, 그러나 반복해서 읽을수록 희망보다는 허무를 더 줄 것 같은, 그럼에도 봄철의 곰만큼 좋아질 것 같은 책이다.

 

 와타나베의 말처럼 사람은 가슴에 수인을 가두어 둔다고 해도 살아가야 한다. 잔인하리만치 사실적인 그 말. 살아가야 한다. 죽은 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애달픈 존재인지 모르지만 그가 죽었다 해도 난 그와 같은 나이, 혹은 그가 죽었을 때의 나의 나이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성장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할만큼 발악을 하면서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  그 사실이 싫어서 늘 같은 덫에 사로잡히고 주저앉았다.

 

 내 마음 속에 수인으로 자리잡은 누군가를 가두면서 난 여덟 살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을려고 했다. 마치  그 수인을 죽을만큼 사랑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그 수인이 내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성장해야 한다. 그를 두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해도 살아있는 인간은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남들이 다 내게 말했을 때는 한 귀로 흘리던 그 진리가 책을 통해 뼈에 새겨질 것 같다. 마치 수인을 가둔 마음의 창살에 새겨질 듯하다.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선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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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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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이 있다. 분명 재밌게 읽었고 가슴을 울렸던 책임에도 누군가가 이 책에 대해 묻는다면 재밌다라는 말과 함께 '읽어봐' 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책이 있다. 괜찮은 책이라는 지인의 말에 이모집으로 가서 가져온 책은 정말 괜찮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괜찮다라는 말이 술술 나왔고 괜찮다라는 말 대신에 다른 말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입 안을 맴도는 언어는 나오지 못하고 '읽어 봐.' 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이 내게는 그러하다. 말을 하면 그 반짝이는 빛이 사라질 것 같아, 말로는 그 빛을 표현할 수 없기에 읽어보라는 말만 하게 되는 책이다.
 

 그런 시절이 있다. 가난이란 단어를 글보다 몸으로 먼저 느꼈던 시절, 신기한 것은 그 시절이 전혀 춥거나 굶주림 혹은 차가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은 그런 마술을 부린다. 배고픔도, 슬픔도, 아픔도 다 잊고 그 시절 걱정 없이 '꺄르르르' 웃던 느낌만 간직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 혹은 음식을 그리워 하는 이유는 그 시절이 주던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풍요 때문이었다. 먹고 살 일이 걱정임에도 우리는 어린이라는 의무와 권리를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 그것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웃음과 따뜻함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책의 저자 현기영 선생님처럼.

 

<나의 유년과 소년이 투영된 자연 속의 사물들, 나는 거기에서 잊혀진 나의 어린 자아를 되찾아보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기억은 잊혀진 나를 되찾는 과정이다. 겨우 27살임에도 앞으로 살아갈 일이 구만리라고 해도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한 숨 쉬게 된다. 어린이였던 내가 그리워서, 땅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소매에 코가 뭍어 반들거리고, 일 나간 엄마와 아빠가 올 때까지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로 누렁이와 놀던 그 시간이 보고파서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살아 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데 필요한 시간은 얼만큼 일까? 아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그 시간은 보통의 시간과 다르다. 어린시절의 추억과 기억은 분명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내가 늙어 저자와 같은 나이가 된다하더라도 그 기억은 선명할 것이기에. 그건 마치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을 다 합친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만큼의 무게가 있는 시간이기에.

 

<몸 가벼운만큼이나 마음또한 가벼워 울다가도 금방 웃을 줄 아는 것이 아이들이니, 어떠한 슬픔에도 기쁨의 양지를 향하여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수록 나는 내 어린시절이 보고파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소설임에도 읽다보면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다분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산문 혹은 수필 (산문과 수필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로 생각 될만큼 글들이 4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종이 속에 펼쳐져 있다. 신기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이야기가 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중학교 이후부터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책의 1/3도 되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이라고 불리는 시간 분명 그 시간은 우리의 삶을 껑충 자라게 해주었다.

 

<겨울철 그 고장에 관광 갔던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더 어렸을때는 떨어진 그 통꽃에 입을 대고 꽃물을 빨며 즐거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어린이 였을 때 살았던 곳은 제주도 였고, 제주도에서 광복전후, '4·3사건’,  ‘6·25’ 등을 겪게 된다. 시대적 배경만을 듣는다면 그 시절 누가 어린이가 웃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린이는 웃는다. 배고파서 울다가도, 친구를 호열자로 잃고서 울다가도, 친척 잃은 아픔에 울다가도, 나무에 떨어져 다쳐 울다가도 어린이는 웃는다. 어린이 만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건망증' 이다. 어린이는 잘 자라야 하기에 슬픔도, 아픔도 잘 잊어버린다. 얼마나 큰 힘인가! 그 시절을 빛나게 하는 모든 것은 아마 '슬픔 잊는 건망증'에서 나온 것 아닐까? 

 

<아이는 무조건 자라나야 한다. 무조건 자라나야 하는 것이 아이의 의무이므로, 아이는 결코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다.>

 

 어린이는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뛴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 과거에 발목 잡히는 것은 어른이다. 왜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 보고 발목을 잡히는 걸까? 그건 내 소중한 사람들, 어린시절의 고향 그리고 자연을 잊지 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일까? 아버지의 죽음으로 저자는 어린시절을 돌아본다. 그건 귀향을 준비하는 것, 아버지의 죽음으로 저자 역시 언젠가 자신이 죽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자신을 태어나게 해주고 자신을 키워 낸 자연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건 귀향으로의 과정이다. 아름답고 미소가 지어지는 결국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만이 나를 키운 것은 아니다. 내 동무들도 내 성장을 도왔고 동무들과 함께 뛰놀던 대지 또한 내 성장의 요람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속물이면서 동시에 아이들 무리 속의 일부였고 대자연 속의 한 분자였다.

 

"아이고, 요 고운 것! 요것이 어디서 솟아나싱고?"

 

외할머니는 내가 하는 어린 짓이 귀여우면 이렇게 탄성을 지르곤 했는데, 얼핏 들으면 그 말은, 내가 어머니의 배를 빌리지 않고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만 해도 우리 고장에서는 어린 것이 귀엽다고 흔히 그러한 표현을 썼다. 어째서

'생겨났다' '태어났다'라는 말 대신에 '솟아났다'라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성혈의 고.양.부 세 선조가 땅에서 솟아난 것과 연관해서 그런 말을 쓰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나의 외가가 바로 제주 양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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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마음 - 아름다움에 대한 스물여섯 편의 에세이
이남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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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중 가장 두근거리는 요일은? 금요일 밤이다. 금요일에 심장은 유독 평소보다 더 두근거리며 손놀림 발놀림 마저 싱그러운 생기가 돈다. 주 5일제의 시작으로 금요일 밤부터의 휴일은 시작되므로 휴일이 많이 남은 금요일 밤이 사랑스러워 심장이 설레인다. 그 설레임은 천천히 둔해지더니 토요일은 그럭저럭이고 일요일은 그럭저럭에도 미치지 못하게 느긋함을 넘어 심장은 나른해지려 한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일요일 오후에 약속 잡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은 쉬고 싶기 때문이다. 약속이 있다고 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일요일 오후는 나를 위해 여유롭게 보내고 싶어진다. 그러기에 심장도 천천히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일요일 오후 (그러나 아쉬운 건 일요일 저녁은 빨리 흘러 간다는 것이다.) 의 여유로움에는 바람 한 줌, 흙 한 줌 그리고 차분한 공기 한 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월요병이라는 말이 돌만큼 지긋지긋한 말이 어색하지 않은 월요일,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나온 것은 일요일의 여유가 그리운 탓일 것이다. 어쩌면 알차게 여유를 즐겨야지란 마음 자체가 잘못된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누워만 있는 것이 여유가 아닌데, 멍하니 생각 없이 있는 것이 여유가 아닌데 언제부터인지 일요일에는 그저 멍하니 생각 없이 있는 나를 자주 보게 된다. (밤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것은 일요일 밤에게 내가 주는 덤이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라는 생각은 왜 아침에 들지 않고 밤에 드는 걸까? 일요일, 제대로 여유를 즐기며 마음 한 켠을 채워 넣을 수는 없는 걸까? 내 친구가 나와 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면 난 이 책을 선물할 것이다.

 

 <일요일의 마음>은 이남호 교수의 에세이다. 이남호 교수가 마음 속에 담아둔 아름다움에 대한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로 엮여져 있다. 발표된 글도 있고 발표되지 않은 글도 있다. 흥미를 끄는 글도 있으며 아직은 벅찬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가을 바람이 맴도는 풍경과 참 잘 어울리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이구나. 풍경 하나, 좋아하는 음악 하나, 좋아하는 화가, 시, 책, 산, 이 모두가 저자에게는 마음의 평안을 혹은 마음의 잔잔한 호수가 되어 준다.

 

 아름다운 책 표지와 함께 속지까지 마음을 따라 흘러가는 구름들이 새겨져 있다. 마치 저자의 글이 내 마음의 하늘에 구름처럼 천천히 그러나 포근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책의 첫 이야기에 관심 가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이야기 그리고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어 반가움이 들어 천천히 읽자는 마음과는 달리 책을 하루만에 다 읽어 버렸다. 저자는 내게 천천히 읽기를, 돌아오는 일요일마다 하나씩 읽기를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나처럼 참을성 없는 독자라니 미안함 마저 앞서는 건 저자의 생각이 담긴 글에 오랜만에 마음을 내려둘 수 있어서이다.

 

 빨리 빨리 흘러가는 세상, 자연마저 빠르게 변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사람은 더 빨리를 외치고 있다.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과 사람들,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는 것들. 되새김질 하며 생각하고, 깊이 있는 생각은 꿈도 못 꾼다는 말을 하는 요즘.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일 없이 컴퓨터 앞에 몇 시간은 앉아 있을 수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혹은 자연 그리고 주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한 시간도 하기 힘들다고 투덜거림을. 나중에 보면 된다고, 나중에 하면 된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기다려 주는 것은 많지 않다.

 

 일요이의 마음, 그 여유로움, 주변을 돌아보고 나의 내면을 만나보고, 고요 속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보려 함은 어떨까? 노력하려 하지 말고 이 책을 편안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꽉 막힌 방보다는 책을 들고 나가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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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향하여
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 해냄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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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책이야 -
라며, 친구가 건네 준 책 제목은 <결혼을 향하여> 였다. 왜 안 웃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친구는 입술을 삐죽이며 웃게 해줄려고 샀단다. 이 책이 그렇게 웃긴거야? 라고 물어보자, 눈치 없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며 제목말야, 제목! 한다. 아,,,제목을 보고 웃어야 하는 거군. 스물일곱은 이런 제목의 책도 농담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른한 오후, 친구에게 받은 책을 펼쳐든 밤은 가을 초입이라기에는 너무 쓸쓸하고 추운 공기를 전해주었다.

 

 가을밤, 책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글자를 따라가면서도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처럼 글자와 여백도 구분하지 못할만큼 헤매인다. 결국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이 책 무슨 내용이야? 나도 모르는데, 제목만 보고 산 거야.(정녕, 웃음을 주기 위해 산거란 말이냐!!!) 친구의 어이없는 문자에 커피 한 잔 타들고 와서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밤이다. 읽을 책과 커피 한 잔, 기분 좋은 풀벌레 소리들이 들리는 가을밤 그것만으로도.

 

 책의 중반 정도가 넘어서면서 책이 무엇을 말하는 지 알고는 입을 가린다. 아, 책은 제목 그대로 였구나라고. 그 다음부터는 이전의 안절부절하고 불편한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저자의 아름다운 문체와 아리송한 문장들 그 속에 담겨진 깊은 마음을 하나씩 읽어가며 나는 행복해지려 하기도 하고 슬퍼지려 하기도 한다. 마치 딸의 결혼식을 앞 둔 어미처럼.

 

 장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그가 책을 이끌어가는 듯도 하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잘 들을 수 있는 장님 초바나코스. 이 책은 마치 초바나코스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들어서 내게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다. 책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말, 행동을 따라가다보면 초바나코스는 하나의 결혼식을 내게 알려주려 그 길고도 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려 했음을 알게 된다. 그 결혼식은 분명 그럴만했다고 그에게 말한다, 고맙다고.

 

 '너는 내 운명'이란 전도연 주연의 영화, 가족의 달 MBC 특집 다큐 '너는 내 운명' 두 개의 영상이 책을 읽는 동안 스쳐 지나 간다. 사랑은, 그리고 가족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고는 그리 깊은 슬픔을 견뎌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결혼식의 신랑 신부는 니농과 지노. 뜻하지 않게 에이즈에 걸린 니농에게 사랑을 보여주려 하는 지노. 이 책의 빛남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던 것이다. 책은 니농과 지노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각각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니농의 아빠와 엄마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부모가 견뎌내야 할 아픔을 잘 보여주었으며, 지노의 아버지를 통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일반인의 두려움 그리고 포용력을 보여주었으며, 니농을 통해서 에이즈 환자가 겪었을 아픔과 천대를 가슴 아리게 알려 준다. 책은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보고 겪은 일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흔들린다.

 

 친구가 장난처럼 건낸 책에서 얼마나 많은 반짝임을 만났는가. 가을날, 아름답도록 슬픈 책은 독약이 될 수도 있지만 아름답도록 슬프면서 희망을 보여 준 책은 마음의 보약이 된다.

 

==========나를 울린, 마음을 흔든 구절들============

 

 <나와 니농은 미친 척 하면서, 속마음은 감춘 채 서로에게 마음을 쓰면서 살아야겠죠. 권투하는 제 친구 마테오는 날 보고 미쳤다고 해요. 마테오는 나에게 그러죠. 너는 인마, 네 인생을 포기 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말해 주었죠. 내가 포기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포기한 거다.> -p.216, 지노

 

 우리가 그들을 포기한 거다. 그랬다. 사회적 편견으로 똘똘 뭉쳐서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삶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으며 그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으며 그녀에게 죽지 않을거면 꽁꽁 숨어 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왜, 우리는 그들에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가.

 

< 사랑이라는 것도 있다. 너의 경우 사랑은 텅스텐만큼이나 무겁구나. 너는 이 프랑스 여자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한다. 그러면 선별하거라. 너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 여자는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죽어가고 있다. 여자는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둘러라. 너는 자식은 갖지 못한다. 그런 몹쓸 병을 다음 세대에 유산을 남길 위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금속은 모두 지하에서, 수은이 유황과 짝을 지으면서 생긴 것이라 믿었다. 지노, 너도 짝을 짓거라. 그 여자와 결혼하거라. 너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지 바이러스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고철은 쓰레기가 아니다. 지노야, 그 여자와 결혼하거라.> -p.130. 지노의 아버지

 

 그녀를 죽이려 했다, 자신의 자랑스런 아들이 그녀로 인해 삶을 버리려 했기에. 하지만 그녀를 만난 후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포기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그는 인정하고 만다. 사랑이기에, 그녀는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 습관을 잃고 말았어요.

  하늘을 나는 습관?

  아니오, 벼랑 위에서 사는 습관.

  바다가 굉장히 조용해요.

  그 습관을 되찾을 수 있을 거요. > -p.193, 제나가 버스에서 만난 이와의 대화.









 

 이들의 대화에서 나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가 떠오른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무섭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벼랑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떠밀었다............................................. 그리고 그들은 날았다>

 

 우리는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만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절망에 처해보지도 않았으면서도 겁내고 두려움에 시간을 허비한다. 벼랑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 볼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몇 번은 벼랑에 서야 함에도 무서워서 벼랑이 줄 선물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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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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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친구를 동경한 적이 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사람들의 말이 내게는 무색할만큼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 들고 구석진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왜 그녀를 동경했을까? 내게 그 시절 그녀는 온전한 내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내게 관대했고, 내 동경의 대상이라고 말해도 될만큼 깊은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 후로 긴 시간이 흐른 후, 이 책을 만났을 때 반사적으로 그녀가 떠올랐다. 전보다 깊은 눈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그녀가 보고 싶어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녀와 꽤 긴 통화를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를 깍아내리지 않을 사람 한명만 가지게 된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온전한 내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이가 더해 갈수록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삶을 살아가며 위대한 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깍아내리지 않을 사람을 분명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개츠비처럼. 내게는 멀고 먼 단어, 위대한. 개츠비에게는 그 말을 목에 걸어주고 싶어졌다. 여기 당신을 욕하지 않는, 기억하는 사람 하나 더요! 라고 외치면서.

 

 전쟁 직후의 참담함 그리고 허상, 물질적 풍요, 거품, 아메리칸 드림, 이런 단어들을 책을 읽는 동안 한 번도 생각치 않았다. 해설을 보고서야 이 작품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해설을 보고 난 후 내 생각은 이러했다, 작품 속의 그러한 중대한 의미를 모른다 한들 좋지 아니한가! 배경을 모른다 해도 책 속 내용을 통해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말에 동의 했으므로. 누군가가 나를 보고 당신은 개츠비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해도 지금은 개츠비의 삶과 사랑 그리고 고독만으로도 오후의 절반을 개츠비 생각만으로 보냈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개츠비는 내가 드러내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대면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약 개성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는 뭔가 멋진 것을,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뿐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 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 >
 

 타인을 객관적으로 보는 남자,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위대함을 전해주기에 적당한 목소리를 갖고있다. 누군가가 비밀을 털어놓고 싶게 하는 적당한 거리감과 묵직함 그리고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유형인 닉은 동부에 허름한 집을 구하면서 개츠비를 만난다. 그의 허름한 집을 더 허름하게 만들어 버리는 대저택의 주인, 개츠비. 닉은 자신이 이사간 그곳 동부를 씁쓸하게 기억하지만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곳은 개츠비를 만났던, 개츠비가 살았던, 개츠비가 보여주었던 다정한 행동과 낭만적인 사랑과 배려 그리고 희망이 그곳에 있기에.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음에도 개츠비의 사랑이 누구인지가 초반을 넘어서도 나오지 않아 의아해하며 책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저택에 살면서도 흥청만청 파티를 여는 것을 취미인 양 벌이는 이 남자, 개츠비. 그는 왜 위대한 걸까? 그가 위대한 이유를 몇 가지나 될 수 있을까?

 

 하나, 그에게는 그의 참 모습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삶에서 이런 사람 하나 얻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누구나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매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지 못하기에. 사랑에 속았음에도 완전한 신뢰를 가지는 남자, 개츠비. 그는 누구에게나 사려 깊었으며 타인을 비웃지 않았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너무 사랑한 죄. 상처 입었으면서도 상처 입지 않은 것처럼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한 죄, 그 여인을 믿은 죄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개츠비입니다." 그가 불쑥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형씨. 제가 주인 노릇을 제대로 못했군요."
그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이상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확신을 내비치는, 평생 가도 네댓 번밖에는 만날 수 없는 미소였다. 잠시 동안 영원한 세계를 대면한 (또는 대면한 듯한) 미소였고, 또한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며 당신에게 온 정신을 쏟겠다고 맹세하는 듯한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 받고 싶은 만큼 당신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 믿는 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최대한 호의적인 인상을 분명히 전달 받았다고 말해 주는 미소였다.>

 

 둘, 꿈꾸고 행동하고 다시 꿈꾸는 사람, 개츠비.

 

 상처라고는 하나도 없을거라고 짐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본 적이 있는가. 책 속에서 개츠비의 미소가 내게는 그러했다. 개츠비가 사려 깊은 사람임을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그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던 그의 재산과 그의 겉모습만을 보려 했던 이들이 제멋대로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그의 인생역정을 쓰지 않았던가.

 

 개츠비, 그는 읽는 이에게 희망을 준다. 헛된 희망이 아니라 스스로를 단련시켜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노력하는 희망을 보여 준다. 그의 책 뒷면에 적혀있던 글에 코끝이 시큰해지지 않았던가. 그가 어떤 직업이었던, 그것이 잘못이었더라도 그의 인생 모두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사람됨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허황된 꿈말고 제대로 된 꿈을 꾸라고, 그리고 그 꿈을 향해 노력하라고 그러면 언젠가 당신에게 꿈이 현실이 되어 있을거라고.

 

 더 많이, 더 길게 그가 위대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데 왜 내 말은 되풀이 되는 것 같을까. 이제 길은 하나, 당신도 이 책을 읽어보라는 것. 개츠비를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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