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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책이 있다. 분명 재밌게 읽었고 가슴을 울렸던 책임에도 누군가가 이 책에 대해 묻는다면 재밌다라는 말과 함께 '읽어봐' 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책이 있다. 괜찮은 책이라는 지인의 말에 이모집으로 가서 가져온 책은 정말 괜찮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괜찮다라는 말이 술술 나왔고 괜찮다라는 말 대신에 다른 말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입 안을 맴도는 언어는 나오지 못하고 '읽어 봐.' 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이 내게는 그러하다. 말을 하면 그 반짝이는 빛이 사라질 것 같아, 말로는 그 빛을 표현할 수 없기에 읽어보라는 말만 하게 되는 책이다.
그런 시절이 있다. 가난이란 단어를 글보다 몸으로 먼저 느꼈던 시절, 신기한 것은 그 시절이 전혀 춥거나 굶주림 혹은 차가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은 그런 마술을 부린다. 배고픔도, 슬픔도, 아픔도 다 잊고 그 시절 걱정 없이 '꺄르르르' 웃던 느낌만 간직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 혹은 음식을 그리워 하는 이유는 그 시절이 주던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풍요 때문이었다. 먹고 살 일이 걱정임에도 우리는 어린이라는 의무와 권리를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 그것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웃음과 따뜻함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책의 저자 현기영 선생님처럼.
<나의 유년과 소년이 투영된 자연 속의 사물들, 나는 거기에서 잊혀진 나의 어린 자아를 되찾아보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기억은 잊혀진 나를 되찾는 과정이다. 겨우 27살임에도 앞으로 살아갈 일이 구만리라고 해도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한 숨 쉬게 된다. 어린이였던 내가 그리워서, 땅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소매에 코가 뭍어 반들거리고, 일 나간 엄마와 아빠가 올 때까지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로 누렁이와 놀던 그 시간이 보고파서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살아 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데 필요한 시간은 얼만큼 일까? 아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그 시간은 보통의 시간과 다르다. 어린시절의 추억과 기억은 분명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내가 늙어 저자와 같은 나이가 된다하더라도 그 기억은 선명할 것이기에. 그건 마치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을 다 합친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만큼의 무게가 있는 시간이기에.
<몸 가벼운만큼이나 마음또한 가벼워 울다가도 금방 웃을 줄 아는 것이 아이들이니, 어떠한 슬픔에도 기쁨의 양지를 향하여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수록 나는 내 어린시절이 보고파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소설임에도 읽다보면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다분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산문 혹은 수필 (산문과 수필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로 생각 될만큼 글들이 4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종이 속에 펼쳐져 있다. 신기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이야기가 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중학교 이후부터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책의 1/3도 되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이라고 불리는 시간 분명 그 시간은 우리의 삶을 껑충 자라게 해주었다.
<겨울철 그 고장에 관광 갔던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더 어렸을때는 떨어진 그 통꽃에 입을 대고 꽃물을 빨며 즐거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어린이 였을 때 살았던 곳은 제주도 였고, 제주도에서 광복전후, '4·3사건’, ‘6·25’ 등을 겪게 된다. 시대적 배경만을 듣는다면 그 시절 누가 어린이가 웃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린이는 웃는다. 배고파서 울다가도, 친구를 호열자로 잃고서 울다가도, 친척 잃은 아픔에 울다가도, 나무에 떨어져 다쳐 울다가도 어린이는 웃는다. 어린이 만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건망증' 이다. 어린이는 잘 자라야 하기에 슬픔도, 아픔도 잘 잊어버린다. 얼마나 큰 힘인가! 그 시절을 빛나게 하는 모든 것은 아마 '슬픔 잊는 건망증'에서 나온 것 아닐까?
<아이는 무조건 자라나야 한다. 무조건 자라나야 하는 것이 아이의 의무이므로, 아이는 결코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다.>
어린이는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뛴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 과거에 발목 잡히는 것은 어른이다. 왜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 보고 발목을 잡히는 걸까? 그건 내 소중한 사람들, 어린시절의 고향 그리고 자연을 잊지 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일까? 아버지의 죽음으로 저자는 어린시절을 돌아본다. 그건 귀향을 준비하는 것, 아버지의 죽음으로 저자 역시 언젠가 자신이 죽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자신을 태어나게 해주고 자신을 키워 낸 자연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건 귀향으로의 과정이다. 아름답고 미소가 지어지는 결국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만이 나를 키운 것은 아니다. 내 동무들도 내 성장을 도왔고 동무들과 함께 뛰놀던 대지 또한 내 성장의 요람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속물이면서 동시에 아이들 무리 속의 일부였고 대자연 속의 한 분자였다.
"아이고, 요 고운 것! 요것이 어디서 솟아나싱고?"
외할머니는 내가 하는 어린 짓이 귀여우면 이렇게 탄성을 지르곤 했는데, 얼핏 들으면 그 말은, 내가 어머니의 배를 빌리지 않고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만 해도 우리 고장에서는 어린 것이 귀엽다고 흔히 그러한 표현을 썼다. 어째서
'생겨났다' '태어났다'라는 말 대신에 '솟아났다'라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성혈의 고.양.부 세 선조가 땅에서 솟아난 것과 연관해서 그런 말을 쓰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나의 외가가 바로 제주 양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