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곳에 심어진 이후로 인간의 모든 강렬한 감정을 함께 나누었지만, 그 중 무엇도 나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우선, 한 나무에게 ‘자아’란 과연 무엇일까? 생존본능, 성장하려는 충동, 주위 환경과의 공감, 공간에서의 갈등, 종 사이의 갈등, 동일군 식물과 기생생물, 포식식물 등에 대한 지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활동일까? 아니면 그저 인간들의 자아가 옮겨진 것에 불과할까? …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아니다. 조화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새와 곤충, 버섯, 정원사, 시인 들과의 교류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우리를 태양과 달, 바람, 비, 그리고 어떤 풍경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칙-인간들이 자연이라고 일컬었다가 나중엔 환경, 혹은 생태계라고 바꾸어 부른 것-과 연결시켜주는 상호작용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죽어가는 나무는 뭔가가 자신을 대신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자신이 해오던 활동이 계속 보장되고, 해오던 역할이 계속 수행되고, 자신이 남겨둔 공백이 메워졌으면 하는 욕구. 그게 전부다. -13쪽
뿌리가 뽑혀나간 나무가 별안간 살아 있는 인간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정원 안쪽의 죽은 벚나무를 잎이 우거진 잔가지로 휘감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담쟁이처럼, 그런 생각이 내게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쓰러진 내 몸뚱이에 덧붙여진 대체에너지로부터 생겨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제 더 이상 생명활동을 하지 않는 내게, 그들이 남겨준 기억이 자유롭게 떠오른다. 이런 게 바로 나무의 죽음일까?-15쪽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인간의 감정이 또 다시 나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가까이 있던 나무가 사라지기 무섭게 양분을 흡수하고 성장한다. 내가 없으면 그녀는 더 많은 햇빛과 물,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가루받이 문제라면, 벌들이 조금 더 멀리 다녀오기만 하면 될 일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다른 배나무는 근처 마을 학교 뒤편에 있는 것들로,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사로잡혀 고문당하고 있는 포로들처럼 보인다. 과수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나보다 훨씬 더 풍부한 꽃가루를 지닌 젊은 나무들이다. 이졸드는 그 덕분에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자연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시인들이 자연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거의 없다. 트리스탕과 이졸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한 쌍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16쪽
"나는 펄프의 원산지를 조사하다가, 투구풍뎅이의 개체수가 과하게 늘어나 아메리카 낙엽송을 위협하면, 그 나무가 풍뎅이의 유충 호르몬과 유사하나, 양이 너무 많으면 생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유약 호르몬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를 다른 종들에게 적용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이 배나무가 그와 유사하게 기능한다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이 배나무는 자신의 콜레스테롤을 이용해 포식동물들의 호르몬을 합성해내죠." -147쪽
"…인간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있는데다, 나무들은 원자폭탄을 전혀 높이 평가하지 않았어요. 난 이제 나무들이 우릴 불임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우리 연구팀은 얼마 전에 석류 씨와 종려나무 꽃가루에서 그 호르몬들을 발견했습니다. 단순한 이상일까요, 아니면 우리 종이 멸종 위기를 맞은 걸까요? 자연은 뭐가 되었든 간에 결코 제멋대로인 법이 없고, 아무 이유 없이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 법도 없습니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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