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40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얼마나 춥게 살았으면 우선 따뜻한 것이 가장 좋다 하였을까. 한갓져서 조용하고 마음껏 외로울 수 있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마음대로 아플 수도 있고 하염없이 생각에 젖어 들어도 누가 뭐라 않는 곳이어서 좋다는 마음을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은 적이 있다. … 이 집에 살면서부터 선생은 비로소 스스로를 스스로답게 부리며 살아 냈던 것이다. -5쪽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가장 인간스럽게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한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내가 사람답기 위해 또 한 사람을 찾고 있다. 나는 여지껏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태까지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외로운 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46쪽
옛날 어느 며느리가 보리방아를 찧는데 시어머니가 쓸어 넣어 주지 않아 고생스럽기 짝이 없었다. 본래 보리방아는 마른 보리에 물을 줘서 찧어야 껍질이 벗겨지는데, 확에다 물을 부으면 보리가 한데 엉겨 붙어 계속 쓸어 넣어야만 한다. 그러자니 며느리 혼자서 디딜방아를 찧다가 확으로 내려와 빗자루로 쓸어 넣고 엉겨 붙은 보리를 우겨 넣고, 다시 방아가랑이로 올라가 찧고,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혼자서 찧자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결국 며느리는 여름내 혼자서 보리방아를 찧다가 쓰러져 죽어버렸다. 죽은 며느리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게 금빛 꾀꼬리인 것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한풀이를 하느라 "보리방아 쓸어 넣어 주소." 하면서 운다. 물론 꾀꼬리는 이렇게 길게 사설을 읊조리며 울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동 달아매용!’이라는 소리는 틀립없이 들린다. 이곳 안동 지방에서는 꾀꼬리를 ‘달아매용새’라고 하는데 그런 사연이 있고, 울음소리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135쪽
괴인테마을 아주머니는 뻐꾸기가 ‘볼걸! 볼걸!’ 하며 운다고 했다. 옛날, 어느 곳에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처녀 총각이 혼약을 했다. 다가오는 가을이면 혼례를 치를 텐데 갑자기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총각이 싸움터로 가 버렸다. 3년을 기다려도 총각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그만 몸져눕게 되었다. 분명 총각이 싸움터에서 죽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누워 있던 처녀는 점점 야위어 죽고 말았다. 그런데 처녀가 죽은 다음 날 그토록 기다리던 총각이 천신만고 끝에 싸움터에서 돌아온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처녀가 바로 전날 그만 죽었다는 것을 알자 총각은 대성통곡을 하고 역시 그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다. 죽은 두 사람은 새가 되었다. 그래서 구슬프게 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볼걸! 볼걸! -136쪽
돌아가신 박실 어르신네는 제비 울음소리를 재미있게 흉내 내셨다. 제비는 벌레만 잡아먹지 절대 곡식은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울 넘어 담 넘어 콩 한 쪼가리 집어 먹었더니 비리고 배애리고!
옛날, 어느 멍청한 제비 한 마리가 배고푼 것을 참지 못해 콩 한 조각을 집어 먹고 죽을 애를 먹었다. 어찌나 쓰고 비리던지 새끼들한테는 절대 먹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할아버지, 할머니 제비와 아버지, 어머니 제비는 빨랫줄에 새끼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열심히 가르친다고 한다.
비리고 배애리고! 비리고 배애리고! -137쪽
할미꽃은 이른 봄부터 진한 자줏빛 족두리 같은 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꽃잎이 떨어지면서 머리칼 같은 텁석부리가 다시 피어난다. 아이들은 그 머리칼 같은 털씨를 잔뜩 뜯어 모아 손아귀에 가볍게 놓고 두 손으로 조심조심 비빈다.
할망이 할망이 꼭꼭 숨어라 뒷집 영감 도끼로 네 머리 쪼로 온다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그렇게 살살 쓰다드듯이 비비면 동그란 할미꽃 공이 된다. 어떤 애들은 탁구공만 하게 만들고 재주가 좋은 아이는 테니스공만큼 크게 만들기도 한다. 풀꽃으로 만든 공이니까 풀 향기가 물씬 나는 살아 있는 공이다. 말랑말랑해서 망가지기 쉬우니 살살 던지면서 논다.
질경이 줄기-풀싸움 왕골 잎-시계 만들기 보릿짚 대궁-여치집 만들기 무릇 뿌리-풀각시 댕댕이덩굴-바구니 -139쪽
누군가가 말하길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라고 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도 결국은 수많은 목숨들의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구잡이로 잡아먹는 일이다. 이 세상에 절대 강자는 있을 수 없듯이 어느 하나만 살기 위해 다른 것을 모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만 살기 위해 다른 것을 모두 제거해 버리면 결국 나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도둑놈도 씻나락은 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남의 것을 훔쳐 먹는 도둑이지만 씨앗까지 훔쳐 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도둑만도 못한 인간이 다 되었다. 1년에 5만종 이상의 씨를 말리고 있는 삶을 예사로 살고 있지 않은가.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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