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에 'TV 책을 말한다'(장정일이 사회를 본다기에 찾아 봤다.)에서 청소년기에 읽어야 할 책, 감동을 줬던 책이야기를 하는데 '전태일 평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제인에어'''마린을 찾아서' 같은 책들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난 '전태일 평전'을 안 읽었다. 쪽팔리는 짓이다. 대학을 나왔다는 인간이....

*저녁 6시30분 쯤 동네 도서관에 가서 10시까지 읽고, 집에 와서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진짜를 산 사람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글로 읽으니 다르다. 전태일의 수기를 읽고, 삶을 돌아보고, 자료도 찾고 미루어 짐작도 했을 조영래..도 대단하다.
전태일이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냉방에 앉아 밤 늦게까지 쓴 수기, 소설, 청계천피복상가들의 노동 현실을 고발한 글들....그런게 글이 가지는 힘이다. 글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테고.
이 책을 소개한 이가 전태일은 성자다, 라는 말을 다른 시인의 입을 빌려 했는데, 맞다.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인간으로 보기에 그 고통과 슬픔이 감당이 안간다. 그래서 무책임하게(시인은 다른 의미였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성자라고 하는데는....)성자라고 말해버린다. 안 그러면 같은 인간으로 내 모습이 너무 쪽팔려서.

*강풀의 '518'에 대한 만화를 보고,(강풀의 만화는 그림이, 글이 특별히 좋지도 않은데, 읽고 나면 공감이 되고 감동을 준다. '다음'에 연재한 '바보'를 빼놓지 않고 챙겨봤다. 너무 뻔하고 신파라고 생각하면서, 챙겨보고 눈물도 찔끔나고. 소시민같고, 옆집 총각같은 이 사람이 주는 진정성 때문인가. 어쨌든 '다음'이라는 매체에 그런 발언(만화라기보다는 발언)을 싣는 용기.)'전태일 평전'를 읽고.
일상을 때우면서 살아가다 현실을 잊고, 눈을 돌리고....뭐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어지럽게 들려오는 쇠금속 소리. 짜증 섞인 미싱사들의 언성. 무엇이 현재의 실재인지를 분간 못하면서, 그 속에서 나도 부지런히 그들과 같이 해나갔다.
무의미하게. 내가 아는 방법 그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무아지경이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도 순서대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될 때이다.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으면 그 걸로 하루가 끝나는 거다.
-1967년 3월 일기에서(전태일 평전 130쪽)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가끔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 인간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사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문제일 뿐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로 민중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를 지향하는 사회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이래 잔존해오고 있던 이러한 억압/피억압의 관계를 우리는 불식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저 '노예의식'의 찌꺼기, 깨어나지 않는 혼미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사회적 민주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전태일 평전 133~134쪽)

*아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목소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전태일이 가난하고 못 배운 밑바닥 인간에게 강요되어온 무력감과 열등의식을 완전히 청산해버리고, 자신의 힘과 인간성의 승리를 확신하는 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제 발로 선 것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전태일의 성숙한 모습, 한 각성된 청년노동자가 스스로의 인간적인 책임에 대하여 가지는 강한 자긍을 보는 것이다.
....
목숨을 걸지 않는 '투쟁'은 거짓이다. 그것은 소리치는 양심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달래는 자기 위안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의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태일 평전 232~233쪽)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나의 나인 그대들.
(200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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