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넷플릭스를 들여다볼 때마다 쓸데없는 드라마 따위 볼 시간에 책이나 보라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이번에 <던전밥> 애니메이션이 방영된다기에 '그건 또 못 참지' 싶어서 바깥양반 태블릿을 빌려서 1회 시청하고, 일주일 기다렸다가 2회까지 시청했다.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림이 달라지거나 각색이 과도해져서 혹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 같은데, 이번 작품은 두 가지 모두에서 원작을 최대한 존중하는 듯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일주일에 한 회씩 즐겁게 시청할 만해 보인다.
주인공 일행은 던전 공략 중에 동료 한 명이 용에게 잡아먹히는 희생을 당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지상에 돌아온다. 희생된 동료를 되살리러 다시 던전에 들어가지만, 빈털터리 신세라 식량 대용으로 각종 마물을 잡아먹으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줄거리다.
던전 공략이라는 게임/만화의 전형적인 소재에다가 요리라는 역시나 전형적인 소재를 접목시켜 의외의 장르를 창안했다며 격찬을 받은 작품인데,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마물 등 갖가지 생명체의 먹고 먹히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아가 최종 흑막의 존재며 던전의 형성 과정을 통해서 생물체의 유한한 육신과 무한한 욕망의 불균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던전의 마물 형성과 관리를 통해서 생태 보호와 자급자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어서 이래저래 의미심장한 만화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만 해도 마물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를 혐오했던 엘프 마법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태도를 바꾸고, 급기야 삶과 죽음 모두를 긍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서, 애초의 목표였던 동료의 소생에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독려한다.
왜냐하면 일행이 동료를 살리려 각종 마물을 잡아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던 모든 행보야말로, 결국 생물의 기본 조건인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태도를 위한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설정을 현실에 적용해 보면 살짝 "불편"해 할 사람도 있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어느 무인도에 들어간 모험가 일행이 식량 조달을 위해 사슴과 멧돼지는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 뱀과 쥐, 심지어 바퀴벌레와 빈대까지 잡아 먹어치운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얼핏 보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법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괴식과 악식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부스럼 딱지처럼 혐오스러운 물질을 별미로 여겼다는 기록도 있고, 식품학자의 저서 <맛없어!>에도 이에 버금가는 각국의 실존 음식이 소개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한 안데스 산맥 조난자들의 식인 행위처럼 생존을 위한 처절한 악식도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 고든 리시가 꼭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싹싹 긁어 먹었다는 증언처럼 편집자라는 직업의 본질을 반영한 듯한 괴식도 있다.
괴식과 악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대목에서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는 개고기 식용 금지법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는데, 왜 갑자기 법안까지 통과되며 굳히기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개 식용이 좋건 싫건 오래 묵은 우리 식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굳이 금지한다는 것 자체는 불필요한 과잉 입법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사실 개고기 식용은 가만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사라질 식문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빌 브라이슨의 지적처럼 과거에 사슴, 멧돼지, 꿩, 비둘기 같은 다양한 육류가 소비되었던 것은 지금처럼 육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즉 극상의 별미라서 먹은 것이 아니었기에, 지금처럼 고기가 흔한 세상에서는 자연스레 외면당하는 것이다.
개고기도 마찬가지여서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소나 돼지나 닭에 비해서 딱히 큰 장점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기름이 적기 때문에 보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있지만, 냄새를 비롯한 조리 과정의 번거로움을 감안하면 아주 큰 장점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독 개 식용을 겨냥한 반대에는 문화적인 편견의 기미도 없지 않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베트남계 등 아시아계 이민자가 늘어나자, 새로 온 동양인이 애완견을 훔쳐가 잡아 먹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급기야 개 식용 금지 입법 청원 운동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입법 청원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유언비어에 불과한 주장을 가지고 법까지 만든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이런 선례를 만들 경우에는 자칫 다른 육류의 식용 금지 주장으로까지 번질 가능성까지 있다고 우려했던 까닭이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식품 관련법이 개정되며 개와 고양이 식용을 딱 꼬집어 금지하는 법률이 생긴 모양인데, 이것도 미국 내 소비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동물 보호 단체의 주도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의 개 식용 금지를 노린 포석이라 한다.
단적으로 자국의 소수 집단인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에는 개고기 식용도 고유 문화라며 법 적용의 예외로 두었으니 애초의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애초부터 외국 식문화에 대한 몰이해, 또는 차별적 의도가 있는 입법은 아니었는지 충분히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입법이야말로 애완 동물에 대한 과보호의 극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른바 동물 애호가는 "애완"이라는 단어조차도 질색팔색하며 "반려"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들의 이런 호들갑 자체가 "애완"의 본래 뜻이다.
"완물상지"란 사자성어가 있다. 직역하면 "물건을 좋아하다 보면 뜻을 잃는다"인데, 그 출전인 <서경>에서 말하는 "물건"은 주나라 무왕이 외국에서 선사받은 개 한 마리였다. 왕이 개를 너무 물고 빨고 하니까 신하가 주의하라는 뜻에서 군주에게 간언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골동품, 현재에는 명품 같은 희귀품이 대표적인 "완물"이다. 즉 "애완" 자체가 이처럼 주위에서 걱정스레 생각할 만큼 뭔가를 애지중지한다는 뜻인데, 지금에 와서는 한자에 무지한 세대가 "애완"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희롱하는 뜻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대신 "반려"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데, 이게 보통 "배우자"를 가리켰음을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다. 세상에 무슨 "반려"를 상대방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의지로만 곁에 둔단 말인가. 그것도 대개는 무려 "펫샵"에 가서 돈 몇 푼에 "구입"하는 주제에 말이다.[*]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 봐야 동물은 동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동물의 감정이며 언어라는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인간과의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십중팔구는 인간의 감정 이입에서 비롯된 착시가 대부분이다.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흐려진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물론 동물이라고 해서 잔혹하게 다룰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그런 행동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의 전조 증상이기 때문에 각별히 주목하고 단속해야 한다. 하지만 동물 보호 운동이며 단체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번 살처분 폭로처럼 자기네도 대책 없으면서 유독 "귀여운 털복숭이 동물"에게만 관대한 동물 보호 단체의 행동을 보면, 마치 <맹자>에 나온 어느 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딱하게 여겨 양으로 바꾼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일명 '법륜 스님 캣맘 참교육' 영상 내용처럼, 내가 좋아하는 뭔가에 남이 무관심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편협한 행동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이 천벌 받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천벌 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자연 보호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생물학자 제인 구달만 해도 '개는 똑똑하니 먹지 말아야 한다면, 돼지도 마찬가지니 먹지 말아야 한다. 개고기도 돼지고기처럼 식문화의 일종이니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유연한 태도를 보인 바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나 쇠고기를 먹지 않는 힌두교도가 남들의 식문화를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거위 간 요리나 새끼 돼지 요리나 각종 고렙용 치즈나 기타 차마 입에 올리기도 싫은 나라마다의 고유한 괴식/악식에 대해서도 우리가 뭐라 하지 않듯이.
이 모든 식문화의 공통점은 바로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다. 생물은 살기 위해서 다른 뭔가를 소비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다른 뭔가를 죽여서 섭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고 본능이기 때문에 거부하려 해도 감히 거부할 수 없다.
박완서가 아들을 잃고서 '나도 따라 죽으련다' 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어느 날 수녀원 식당에서 풍겨오는 된장국 냄새를 맡고 식욕이 용솟음쳐 걸신들린 듯 비빔밥 한 공기를 싹 비웠다는 일화를 떠올려 보면, 식욕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강한 본능이 아닐까 싶다.
식욕 못지않게 강한 본능인 성욕만 놓고 보면, 한때 "변태"라 손가락질을 받았던 갖가지 행위도 오늘날에 와서는 "취향"이라 긍정되고 보호받는 판에, 유독 식욕에 대해서는 혐오니 환경이니 정말 갖가지 이유를 들어 규제를 하려 드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삶은 죽음의 지연이고, 죽음은 삶의 종국이며, 그 사이에 먹는 행위며 크고 작은 집단의 식문화가 있다. 그러니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말라"는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타인의 "식사"에 대해서도 함부로 비웃지 말 일이다. 그 식사가 "마물"이건 "개"이건 간에...
[*] 오늘날 자칭 "반려" 동물보다 더한 진정한 "반려"이자 "애완"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스마트폰이 아닐까. 개나 고양이나 심지어 배우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심지어 몸에 밀착한 상태로 보내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걸핏하면 갈아치우는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