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반세기 만에 돌아온 비상 계엄 사태를 경험하고 보니, 그간 세상이 변화 발전한다는 느낌도 말짱 환상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이건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미국과 러시아는 신냉전에 접어들었고, 우크라이나며 중동 전쟁에서는 핵 위협까지도 종종 거론된다.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핵 공포가 사라지고 세계 평화가 실현되나 싶더니만, 21세기 내내 전쟁과 테러가 여전하여 지상에는 여전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민주주의건 자본주의건 끝없는 발전의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한때 그 대안으로 여겨지던 다른 이념과 체계 역시 매한가지다.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고 여겼던 반세기조차 실상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했으니 참으로 허망한 느낌마저 든다. 이런 상황에서 의외로 위안이 되었던 책은 지난번 현직 대통령의 실책 가운데 하나인 사과 가격 파동을 계기로 다시 읽은 역사 에세이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였다.
역사가 레이 황은 중국사의 여러 가지 특수한 사건들을 거론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역사가 장기적으로 합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격언처럼, 아무리 이상하고 이해불가능하게 보인 사건조차도 결국에는 이치에 맞는다는 걸까.
어쩐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나, 결국에는 하늘이 사람을 이긴다"는 말도 떠오른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에세이에서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인용문인데,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의 시체를 파내서 매질한 오자서를 향해서 복수가 지나치다며 자제와 포용을 당부하던 신포서의 말이었다.
물론 하늘의 법도나 섭리라는 것이야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허구의 개념에 불과할 것이고, 레이 황이 지적한 역사의 장기적 합리성 역시 무제한의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순진한 발전 사관까지는 아닐 것이다. 다만 수명의 장단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의 상대성을 지적한 것은 아닐까.
최근 뒤적인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에서는 물질 세계와 문명 건설을 처음부터 분리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왕조와 전쟁 중심의 정치사에 머무른 기존의 역사보다 더 넓은 시야를 도모하려는 것이었을까. 산과 바다처럼 유구함이 특징인 불변의 조건도 실제로 있으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비록 불변까지는 아니어도 비교적 변화가 적거나 느린 자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단지 그 위에서 복작대며 흥망을 거듭하는 인간사의 허망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군웅과 제국의 정치와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며 문명이며 하는 것 역시 찰나의 가치밖에는 없는 게 아니려나.
이쯤 되면 레이 황이 언급한 역사의 합리성도 설득력 있게 보일 수 있다. 그가 예시하는 중국 역사의 여러 사례만 보아도 수십 년의 정체와 퇴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수백 년의 단위로 보자면 그런 문제점조차도 결국 극복되고 일신되어 문명이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이 핵심 논지이니 말이다.
참새의 날개짓이 대붕의 날개짓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물론 길어야 칠팔십인 인간의 수명으로 보자면 수백수천 년의 장기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실수를 반복한다'는 인터넷 밈처럼, 순간의 착오로 수십 년간 이어질 차질을 빚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렇게 보면 지난 반세기의 제자리걸음도 수백 수천 년의 견지에서는 결국 역사의 합리성에 희석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될 날이 오려나? 물론 지금의 현실에서는 '교통 사고가 있어야 합리적 교통 정책도 생기는 법'이라는 역사가의 현명한 조언도 아주 큰 위로까지는 되지 못할 법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