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 009>의 "연재재현판"을 읽다 보니, 이 작품에 대해 그간 알고 있었던 몇 가지 내용과 상충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지 알아보려 구글링을 하다 보니 얼떨결에 이 만화의 연재 이력이며 단행본 수록 순서 등에 대해서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답게 워낙 다양한 내용이 워낙 많은 지면에 워낙 오래 연재되다 보니 자연스레 혼란이 생겨난 셈이었다.


"연재재현판"은 이름 그대로 잡지 연재분을 판형과 디자인 그대로 영인한 판본이다. 심지어 페이지 모서리에 실린 광고 문구까지도 그대로 번역해 실었기 때문에 <거인의 별>, <게게게의 기타로>, <악마군>처럼 같은 지면에서 경쟁한 유명 만화에 대한 언급을 찾아내는 소소한 재미도 맛볼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의 전면 광고를 그대로 옮겨 놓은 페이지까지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보다는 더 일반적인 방식대로 잡지 연재분을 일정한 분량씩 엮어 간행한 "단행본판" 번역서는 오래 전에 시공사에서 전18권으로 간행되었다가 지금은 절판되어서 부르는 게 값이 되어 버렸다! 아쉽게도 나귀님이 지금 갖고 있는 책은 그중 도입부에 해당하는 단행본 1-3권뿐으로, 1964-65년의 <주간 소년킹> 연재분인 "탄생편"부터 "뮤토스 사이보그편"의 앞부분까지뿐이다.


이번에 읽은 "연재재현판"은 1966-67년의 <주간 소년매거진> 연재분인 "지하제국 요미편"과 몇 가지 부록만 수록하고 있는데, 연재 순서로 편집했다면 아마도 시공사의 단행본판에서는 5-6권쯤에 수록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런데 내용만 놓고 보면 "지하제국 요미편"은 다른 편들에 비해 독립적, 완결적 성향이 두드러지고, 심지어 주인공들의 기원도 달리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단행본판에서는 주인공이 자동차 경주 선수로 활동하던 중에 납치되어 사이보그로 개조당하지만, 연재재현판에서는 주인공이 소년원에서 탈출하던 중에 납치되어 사이보그로 개조된다. 다른 동료들의 과거사도 단행본판과 연재재현판의 묘사가 서로 달라졌고, 심지어 "지하제국 요미편"의 결말에서는 002와 009가 최후의 결전 직후 나란히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암시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사이보그 009>는 계속 연재되어서 결국에는 그때까지의 분량의 세 배나 되는 전18권의 단행본이 나오고 말았다. 구글링해 보니 여러 번 지면을 옮기는 과정에서 도입부며 마무리를 바꾸다 보니 이렇게 상충되는 내용이 나왔다고 한다. <도라에몽>도 이와 유사하게 최종화를 내보냈다가 독자의 항의로 연재를 재개하느라 내용이 번복되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사이보그 009>는 만화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던 것도 같다. 1980년대에 TV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게 만화로도 나와 있다는 사실은 얼마 뒤 친구 집에 갔다가 단행본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본 만화를 간행하면서도 원작자 이름을 한국인인 척 바꿔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이게 번역서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여하간 그때 맨 처음 본 <사이보그 009> 만화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대목은 008이 적의 습격을 받아 머리만 남기고 완파되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시공사의 단행본에는 그런 내용이 없기에 내가 잘못 기억했나 싶더니만, 이번에 "연재재현판"을 보니 그 장면이 나와 있었다! 결국 내가 예전에 친구 집에서 본 만화책은 "지하제국 요미편"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아울러 이번에는 그 장면 이후의 상황에 암시된 민감한 내용까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아프리카 출신 흑인인 (원래 도입부에서는 노예로 팔려갈 뻔하다가 탈출한 것으로, "지하제국 요미편"에서는 밀렵 감시원인 것으로 묘사된다) 수중 능력자 008이 부상당하자, 사이보그 부대 지도자인 과학자가 성능을 개선시킨답시고 검은 피부를 물고기 비늘로 싹 교체한 것이다!


결국 008은 인간다움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사람의 피부마저 빼앗긴 것을 한탄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자기보다 더 심하게 손발이며 몸통마저 기계로 개조당한 004가 건넨 위로의 말에 마음을 풀게 된다. 만악의 근원인 박사는 '검은 피부보다는 비늘이 낫다'고 인종차별적 궤변을 내놓았다가, 동료 003으로부터 '008은 피부색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질책을 듣기도 한다.


여하간 나귀님으로선 오랫동안 궁금했던 008의 부상에 대한 의문이 풀렸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그때 본 만화책 임자인 동네 친구는 이후 다니는 학교가 달라져서 거의 못 보고 지내다가, 나중에 공주교대에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되었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를 둘러싼 논란을 뉴스로 자주 접하다 보니, 새삼 40년 전의 그 친구, 아직 선생 노릇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 그나저나 최근 <애꾸눈 선장>과 <천년여왕>과 <은하철도 999> 같은 명작들이 줄줄이 번역되는 것으로 미루어, 시공사에서 나왔다가 절판된 <사이보그 009> 단행본도 재간행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이번처럼 일부 에피소드만 "연재재현판"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단행본 전체 재간행은 어려운 건가 궁금하기도 하다. 그 사이에 "완결편"이라는 다섯 권짜리가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건 저자가 생전에 구상한 줄거리를 사후에 다른 사람들이 작화해서 내놓은 일종의 스핀오프라고 알고 있다.




[**] 이번에 다시 읽은 시공사판 2권에는 "비싼 성의 남자편"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P. K. 딕의 공상과학 소설 제목에서 가져온 "높은 성의 남자"(高い城の男, The Man in the High Castle)를 오역한 결과물로 보인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서야 구글링 끝에 비로소 알아채게 된 오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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