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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것,
그것이 내 꿈이었다.
여자를 보았다. 나와 같은 사고와 병적인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를 이 소설에서 보았다. 1984년 생, 나와 동갑내기 소설가가 그려낸 허구의 여자이거나 혹 소설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여자였다. 동갑내기의 작품을 읽는 건 꽤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에서 불거져 나왔던 이 소설가의 이름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읽지 못한 책들이 방치된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있기는 했지만 이 책만은, 되도록이면 빨리 구입하여 읽고 싶었다. 별다른 기대도 없었거니와 막연히 김사과의 약력을 노려보다, 페이지를 넘기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정확히 팔랑팔랑팔랑 세 번째 장을 넘기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 곳에 내가 있었다. 어느 소설속에서도 만나 볼 수 없었던 내가, 거기, 있었다. 아니, 그 여자처럼 살고 싶어했던 어느 한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음악과 책 그리고 술과 사랑만있으면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던 그런 시절의 내 모습, 그 낭만적이기만했던 삶이 이 소설에 존재한다. 실로, 감격적이었다.
실패한 소설가인 여자처럼, 걷는 것에 가진 모든 시간을 허비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난 정확히 열여덟 살이었고 보이지않는 꿈을 쫓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여자처럼 책도 읽었으며 책을 읽지않는 사람들을 멍청이 취급을 하기도 했다. 친구 많고 윗사람에게 싹싹한, 나 보다 예쁘고 다부진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나와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담배를 배웠으며 더불어 술도 배웠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을 만났을 때, 나도 누군가를 만났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의 집으로 짐을 옮겼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고 책을 읽고 티비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여자와 풀 처럼 매일매일 섹스를 하기도 했으며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매일 그 누군가와 함께였다. 실패한 소설가, 여자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풀이 그런것처럼 그 누군가는 나의 삶이었고 목표였으며 희망이었고 전부였다. 그림 그리는 풀이 그랬던것처럼 나 또한 돈이 떨어지면 종종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담배를 사고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그 누군가의 집에서 시켜먹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먹고 싶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여자와 풀 그리고 나와 누군가는 지나칠정도의 평화로움과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활에 익숙해졌으며 망가져갔고 사랑은 여전했으며 위험수위에 도달해있었다. 여자와 같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여자는, 돈에 엉켜버린 세상을, 현실을 부정했으며 경멸했고 침을 뱉었다. 허기에 대한 굶주림의 이유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먹을 것, 그림 그리는 풀의 집 보다 더 좋은 곳이 여자의 것이 아니고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니어도 여자는 행복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일, 그것이 여자의 꿈이었다. 노을빛이 젖어드는 옥상에서도, 길거리의 싸구려 음식들도,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탈출구가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국한되어질때도 그림 그리는 풀의 옆이라면 여자는 행복했다. 그림 그리는 풀의 그림을 술에 취해 여자가 망가트렸을 때, 그로인해 절망에 가까운 그림 그리는 풀과의 끝이 예견되었을때도 여자는 그림 그리는 풀이 자신의 것이라서, 그리고 그 그림 그리는 풀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여자는 삶의 의미를 사랑안에 옭아맸다. 그리고 공백, 그리고 침묵, 그리고 무의미한 삶.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의 집을 떠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회색빛의 거리를 다시 걷고 돈과 돈으로 결탁하여 지어진 세상의 건물들 사이로 자신의 삶을 다시금 끼워넣는다. 아무런 의미도, 그림 그리는 풀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새겨지지않는 삶을 견디며 살아 낼 뿐이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여자의 꿈이 사그라들고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오로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 마음 하나만 있다면야 불가능이란 없을거라고 믿었던 때가. 그리고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일을 하지 않아도 여유있는 행복에 충만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적어도 돈의 의미와 돈의 가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을 때, 그 누군가가 나의 돈이었고 음식이었으며 생명이었고 삶의 이유가 되었을때였다. 사랑, 그게 전부였고 사랑,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의 집을 떠나오면서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곁을 떠났을때였다. 마음 둘 곳이 마땅히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눈 앞의 현실을 두고 마냥 등을 돌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그 누군가를 만나면 더 풍족하게 사랑하고 싶었다. 더 좋은 담배를 태우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지하 단칸방이 아닌 더 좋은 곳에서 그 누군가와 살고 싶어 나 또한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다시 재회했을 때는 더 이상 사랑 하나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절망감, 그것이었다. 그림 그리는 풀과의 재회에 손을 잡고 노을빛 젖어드는 옥상에서 춤을 추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음에 여자의 낭만적인 삶을 경멸할만큼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 다만, 그림 그리는 풀을 따라 추락하고만 싶었다.
참으로, 애달픈 소설이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여자와 그림 그리는 풀이 그려내던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던 퍼포먼스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통쾌했으며 유쾌했다. 지나 온 시간과 시절을 되묻는 소설이기는 했지만 웃으며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소설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직 김사과만의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문체와 더불어 소설의 분위기가 전부 전경린을 닮아 있다. 전경린 이미테이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쾌하지않을 정도이긴 했지만 안타까웠다. 부디, 그녀가 경멸했던 현재의 세속적인 삶을 쫓는 사회를 바꾸는 작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