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원수필 ㅣ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9월의 첫날... 날은 더워 땀 빨빨 흘리며 앉았으나 마음은 벌써 가을이다. 급한 성질 어디가랴마는 파란 나무 끝에 살짝 든 가을빛과 앞집 마당에 줄을 타고 올라가는 노란 수세미꽃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도 자그마한 마당이 있어, 봄에는 홍목련을, 여름에는 커다란 토란잎에 빗방울이 또르륵 흐르는 정경, 가을에는 대추 몇 알, 겨울에는 황량한 나목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를 모두 메워 방을 만들어 버린 바람에 흙이 있는 땅과 우리집은 멀어지고 말았다.
그 때는 흙을 버리고 깨끗하게 만들어진 건물에서 거실과 부엌이 서로 통하고, 타일과 연탄 아궁이를 없애고 씽크대를 들여 놓아 한껏 신식화된 집에서 생활하는게 정말 좋았다. 우리는 왜 아파트로 이사를 못가는가라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나마 이게 어딘가 싶은 생각에 적지 않은 만족감으로 생활한지 10여년.....그런데 지금은 우리집에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이 든다.
몇 주전에 마법의 콩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씨앗 한 알이 심겨 있는 아동용 화분을 얻었다. 물을 준 후 열 흘쯤 지나니, 싹이 나서 잎이 되고, 그 이파리에는 " I love you"란 글귀가 뜨는데,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찐한 감동으로 전해온다. 하앗!!~~ 요 조그마한 자연이 주는 기쁨이 이러한데, 마당이라도 있어 꽃을 심고 풀을 심어 얻을 수 있는 기쁨은 그 크기가 얼마만 할까?
다행이도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주가 있다. 최근에는 경주의 여러 못들 군데 군데에 피어 있는 연꽃을 눈에 넣어 왔는데, 아름다운 것은 꽃이지만 매력적인 것은 연잎이기도 하다. 둥굴한 이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에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엔 꼭 와서, 비 듣는 소리를 들어 봐야겠구나 싶다. 오늘의 이 텁텁한 날씨는 아무래도 비님을 몰고 오는 전조이지 싶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에 이은 근원 김용준...!!
평생 남의 흉내나 내다가 죽어 버릴 인간이라해서 근원이라 했다는데, 그의 겸손함이 드러나는 이 평가보다는 단원과 오원에 가깝다는 뜻인가?하고 물었던 그의 친구들의 평이 더 맞지 않을까 한다. 내가 비록 그의 그림을 보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의 글은 알라딘의 여러님의 평대로 영혼의 맑은 향기가 맡아지고, 세월을 비껴 가는 듯, 지금 읽어도 식상하지 않게 신선한 맛을 준다. 예술가답게 일상과 미감을 솔직담백 예민하게 펼쳐 놓은 그의 수필은 가을에 읽어도 좋겠다. 가을은 사색 계절.. 수필은 사색의 산물....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은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 댁에 매화가 만발하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입니다. (9쪽)
7, 80년 된 감나무가 이 집에 사는 주인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76쪽)
매화는 기르기가 힘드니 한 번 심어 놓고 간간이 물을 주며 정들고 싶은 감나무 또는 다른 과실 나무를 심어 나를 보러 아니 오더라도, 손님에게 보는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나에게도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