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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 - 운영전 ㅣ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
조현설 지음, 김은정 그림 / 나라말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슬픈 사랑의 책을 품고 속세를 떠난 선비 유영에게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이 시는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인데요. 유영 선비님께 들려드리고 싶네요. 시의 화자가 선비님을 닯지 않았나요? 운영이의 사랑이야기에 눈물을 흘리셨잖아요...... 선비님이 그네들을 만난 것은 꽃 피는 봄이었고, 제가 그들을 만난 것은 나뭇잎 떨어지는 지금, 가을입니다.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이야기에 저 역시 선비님 못지 않게 마음이 아팠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다니요....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그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오세요. 지금은 옛날보다 많이 좋아져서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은 거의 없답니다. 오히려 사랑의 대상을 너무 쉽게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져 운영이와 김진사처럼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모습을 사랑의 모범답안으로 설정해야할 지경이라니까요.
전 궁녀 운영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은 정말 사소한데서 시작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운영이였고, 늘 사람을 그리워한 모습을 그녀의 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녀의 손가락에 김진사가 흘린 먹물 한방울 때문에 위험한 사랑을 시작하다니요? 그렇지 않나요? 김진사 역시 운영이와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는데, 그녀를 보고 간 그 다음부터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하고 말았으니요. 또 사랑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열 명의 궁녀들에게 처음 시를 지어 올리라 했을 때, 멀리 바라보니 푸른 연기는 가늘기도 한데 미인은 문득 비단 짜기를 멈추네 바람을 쏘이며 홀로 슬퍼하니 생각은 하늘 날아 무산에 떨어지네 라고 운영이 지었답니다. 저는 아직 한시의 맛과 그 의미를 잘 모릅니다만, 안평대군은 대번에 운영의 시만이 외로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뜻이 있구나라고 평하더군요. ‘무산’은 남녀간의 사랑이 이루어진 장소이므로, 무산에 생각이 떨어진다는 말은 사랑을 늘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유영님! 그래도 운영과 김진사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지 않나요?
당시의 궁녀는 한 번 궁에 들어가면 평생을 임금과 대군을 위해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궁의 담장을 뛰어넘어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말이에요. 사랑의 마음은 자신의 몸이 타는지도 모르나봐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성취했으니 둘은 죽었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습니다.
유영님!! 가을입니다. 선비님이 세상을 등지신 것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과 사람의 삶이 참 허무하구나란 그런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의 신분이 제약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김진사의 하인 ‘특’은 방해하지 않았나요? 또 안평대군과 궁녀들이 머물렀던 아름다운 수성궁은 몇 번의 전란으로 재가 되어, 섬돌 위에 피어오른 꽃만 향기롭고 무성해서 봄빛을 자랑하고 있으니 인생이 허무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이젠 돌아오세요. 가을입니다. 쓸쓸하긴 하지만 올망졸망한 가을 열매들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와 못다하신 유영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시길 바래요. 그리고 저도 꼭 찾아 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