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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정민 교수의 책은 우리 선현들의 훌륭한 글을 오늘에 되살려 일반 대중들에게 풀어 냄을 일생의 목표로 삼은 듯한 느낌을 준다. 나의 고문 읽기 역시, 정민 교수의 맛깔스런 해설 덕을 톡톡히 받은지라 그의 책이 발간되었다하면 무의식중에도 관심이 일기 일쑤다. <죽비소리>역시 정민 교수의 저력을 믿고 지난 1월에 주문했다.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이라는 부제는 책의 도착에 대한 기다림의 즐거움을 더해 주기도 하였다.
책은 농부의 할 일을 달별로 엮은 '농가월령가'를 따라 열 두장으로 나눴다는데, 그 나열 순서와는 상관 없이 독자가 원하는 부분을 펼쳐 선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마음밭을 가꾸고 제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겠구나 싶다. 한 번에 몽땅 읽을 수는 있으나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으므로 가까이 두고 오랫동안 씹어 음미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한 책이다.
사실, 주문한 책을 받아 들고 몇 장을 뒤적거리면서는 기대했던 죽비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민 교수의 다른 책에서 보았던 문장들이 중복된 것이 많아 식상했고, 원문의 부분을 빌어와 급하게 엮은 책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으며, 역자의 해석이 때로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나만의 생각을 가로막는 듯해 유쾌하지 못했다. 고려말에서 조선후기를 풍미했던 문장가들의 명문장들이라는데, 가슴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문장들이 원망스러워 나의 <죽비소리>는 책장에 한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다시... 죽비소리를 듣고 싶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지금, 무미건조한 일상속에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는 그 말씀을 나는 듣고 싶은 것이다.
옛사람의 책 속에 문자가 수도 없지만 뜻이 없으면 내가 가져다 쓰지 못한다. - 296쪽
그렇다. 소동파의 말씀처럼 그 때 내게는 죽비소리를 들을 뜻이 없었던 거다. 내게로 내려 쳐 지는 죽비는 있었으나 그 소리와 아픔이 내게 와 닿지 못했던 것은 내 마음이 우리 선조님들에게서 너무나 멀리 존재 했기 때문이리라.... 뜻이 있는 곳에 비로소 말씀을 듣는 귀와 깨달음의 길이 있는 것이리라...
어제도 할 수 없고 오늘도 할 수 없습니다. 삼가 마음이 열리는 길한 날을 가려 선생의 축수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 18쪽
이처럼 무엇이든 버리지 말고 한 켠에 묵혀 두면 그에 대해 삼가 마음 열리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무디어진 삶에 대한 경계를 주는 말씀을 묶어 놓은 책은 많지만, <죽비소리>는 고스란히 우리것을 묶어 놓은 것임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우리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의 뿌리로부터 끌어 올려지는 정신의 에너지는 다른 어떤 영양분들보다 알찬 열매를 맺게 해 줄 터이니...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고 화답하는 글이로다 . - 144쪽
문자가 책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듯, 죽비소리 역시 우리의 일상속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부모님의 삶속에 있고, 이름 없이 제 꽃을 피우는 들꽃에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비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자세이다. <죽비소리>에는 내 가까운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고, 말씀속에는 깨달음을 종용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민 교수의 고문 해석과 글쓰기 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