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상을 읽다
해외 여행을 하며 세상을 읽다
무역업을 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게 되자 할 일들이 생겨났다. 첫째는 외국어 공부를 해야만 했다. 영어 하나로는 부족하다 싶어서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고, 나중에는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외국어 공부를 하는 한편 해외여행도 계획하게 되었다. 그 동안 배운 회화 실력을 테스트도 해보고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 습관을 배우고자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책을 보아도 업무와 관련된 책을 많이 사 보았다. 특히 외국어 공부를 여러 개 하다 보니 어학공부 책을 많이 샀던 것 같다. 월급을 타면 투자하는데 다 쓰였다. 학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또 견문을 넓힌다고 해외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명목이야 외국어 테스트였고 문화를 익힌다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놀러 다니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짧은 여름 휴가 때, 친구와 함께 펜팔로 사귀던 사람을 만나러 갔다. 중학교에서 일본어 과목을 담당하던 여선생님이었다. 그러니 편지를 쓸 때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1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공부를 하다가 드디어 직접 일본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비행기를 타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와 함께 고도가 높아지면서 그렇게 세상을 압도할 것 같은 서울 시내가 점점 작아 보이더니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진실로 큰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객관적으로 멀리서 떨어져 본다면 다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세상일에 구애를 받게 되면 높이 높이 떨어져 내려다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고 보다 너른 시야에서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에 영어를 테스트 할 때는 필리핀을, 중국어를 테스트 할 때는 대만을 다녀오게 되었다. 꿈을 갖고 사는 삶은 사람을 힘있고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틀림이 없다.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미국 제조사의 한국 대리점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시카고에서 전시회가 있었다. 그 때 미국에서 세일즈를 제일 잘 한다는 사람의 영업교육이 있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기법을 이야기 하면서 그런 걸 공부해 본적이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다 늘 영업이나 마케팅에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금시초문이었다. SPIN Selling을 아냐는 것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시카고 시내에 있는 큰 서점을 찾아갔다. 그 분야 관련된 책을 모조리 구입했다. 그리고 세일즈에 관련된 책, 자기 계발에 관한 책을 한권씩 샀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책을 구입한 것이었다.
미국 본사의 영업사원이 추천한 책을 읽으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참 좋은 책임에 틀림이 없었다. 영업을 하면서 그 방식을 적용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 책 첫 부분에 실제로 실무에서 적용해 보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언급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ING에 입사하고 2년이 지났을까, 회사에서 부지점장들을 대상으로 그 기법에 대한 교육을 한다고 했다. 신기했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직접 그 마케팅 기법에 대해서 듣고 공부를 했었는데, 한국에서 그 기법을 들여와 일반 회사에 보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일종의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그 때 나는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야 선진 기술이나 기법을 빨리 받아들일 수가 있으니깐 말이다.
한번은 벨기에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참관하기 위해서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하는 첫날부터 참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네델란드의 공항에서 한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벨기에로 가게 되었는데 가는 날 안개가 심하게 끼어 연착을 하게 되었다. 육로로 가야 되느냐 비행기로 가야 하느냐 우왕좌왕하다가 안개가 조금씩 걷히게 되면서 비행기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수화물을 찾으려고 기다리니 내 것이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개에 신경이 쏠려서였을까 갈아타는 비행기에 내 짐 가방을 옮겨 싣지 못한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 가방에 세면도구며 전시회에 참가할 때 필요한 것들이 들어있었는데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음날 일찍 물건을 찾게 해 준다고 하여 할 수 없이 그냥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나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짐을 찾으러 공항에 오가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었다.
공항에 가는 전철을 잘 못 타서 기차를 타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얼마쯤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다시 전철을 타고 공항에 가게 되면서 출근하는 시민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고 있었다. 조용한 기차 안에서, 전철 안에서 책을 보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여성분들의 얼굴을 보니 전부 맨 얼굴이었다. 늘 화장한 사람들의 얼굴만 보다가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을 한 출근길 시민을 보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도 EU의 수도가 있는 벨기에서 말이다. 그날 짐을 찾으러 공항에 왔다갔다하면서 본 모습이 뇌리에 많이 남게 되었다.
여행도 책읽기와 다르지 않다. 세상이라는 책을 보는 것이니깐 말이다.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나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다. 비록 사는 모습과 사람들은 달라도 희로애락을 느끼며 사는 인간이라는 점에 있어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여 나는 이제 더 이상 먼 미지의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다. 멀리 나가 보아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나의 자리였으니깐 말이다. 이제 나라는 인간 존재의 심연으로 탐험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매일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나는 늘 여행을 떠난다. 출.퇴근 길에 책을 읽으면서 책 속으로, 책 속의 세상으로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세계를 향했던 발걸음 대신 책 속으로 눈 길을 내고 있다. 안으로 안으로 치달린다. 그래도 결국 닿는 곳은 바깥 세상이다. 전철에서 만나게 되는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보면 괜히 말을 걸고 웃어주고 싶다. 친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