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
어느 책 도둑놈 이야기
어려서 영어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한 친구가 장서가 친구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 급히 보아야 할 책이 있다면서 며칠만 책을 빌려달라고 하자, 장서가는 절대 안 된다며 거절을 한다. 그러면서 “여보게 친구, 내가 5,000권이 넘는 책을 수집하였지만 이게 다 빌려왔다가 돌려주지 않은 책이라네!” 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의표를 찌르는 이야긴가?
이 욕심꾸러기 장서가의 이야기가 농담이었건 아니면 어느 정도 사실이었건, 나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한다.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아빠의 숨결을 느껴보라고 내가 읽는 모든 책에 밑줄을 쳐 놓는다. 그래서 내 책은 세상에는 단 한 권 밖에 없는 책이 된다. 그런데 그 책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하면 내 삶의 흔적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게 책밖에 없는데 책을 함부로 빌려줄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재작년인가 아내가 어떤 책을 읽더니 감명을 받았다면서 친구들에게 선물했으면 좋겠다며 책을 사다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얼마나 기쁘던지, 나는 몇 권의 책을 사다 주었다. 그 때 아내는 잠시를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는데 친하게 지내게 된 동생에게 그 책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마침 그분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때라 아내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 주기도 했단다. 그러면서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게 되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 아내가 그분께서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어떤 책이 좋으냐고 내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을 알아야지 적당한 책을 추천해 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우리 책을 빌려주고 싶지가 않았다. 차라리 책을 사 주면 주었지 말이다. 만약에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하면 책을 다시 살 수도 없고, 설령 산다고 해도 같은 책이 아니니 곤란한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책을 빌려주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지껏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한 책이 몇권 밖에는 안 된다. 책을 빌려준 사람을 지금도 만나고 있지만 쪼잔하게 책 돌려달라고 얘기를 못하겠다. 책이나 돈이나 빌려줄 때와 돌려받을 때는 상황이 사뭇 다르게 된다. 기분 좋게 빌려주지만, 힘들게 돌려 받게 되거나 돌려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차라리 책을 빌려달라면 사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어려서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일이 있다. 이런 기회를 빌어서나마 고백할 수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이 어린 영혼이 어려서 책을 훔치는 죄를 저질렀나이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라옵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들려주고 싶다.
어려선 방학 때마다 외갓댁에 놀러갔다. 나의 집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이었고 외갓댁은 사리면 소매리인지라 같은 군에 속해 있어 가까운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는 버스로 신작로 길을 달려가려면 두어 시간도 더 걸리는 먼 거리였다. 지루해서 진득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찌나 심심하던지 길가에 심겨져 있던 미루나무를 세면서 차를 타고 가는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 그 땐 왜 책 한 권 없었나 모르겠다. 하긴 그 때는 책을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시절이 어렵고 모두가 가난한 때였다.
아무튼 어느 해 외갓댁엘 갔더니 무협 만화책이 있는 것이 아닌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10권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얼마나 신이 나던지 참 재미나게 보았다. 두어 번도 더 보았을 것이다. 문제가 생긴 것은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어찌나 책 욕심이 나던지 만화책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민을 한 끝에 만화책을 훔쳐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 만화책이 외갓댁에 있는 사촌형제들의 것도 아니고 빌려온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것을 훔쳐 집으로 가져 가기로 했다니 참 놀랄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결행을 했고 그 책을 집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나는 것은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책들을 사촌 형제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때 그만큼 머리가 좋았을 것이다. 언제고 외사촌 형제들에게 물어보아야겠다, 그 사건이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재미난 일이 생겼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외갓댁에서 훔쳐온 만화책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는지, 같은 반의 친구에게 그 만화책 전집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책을 돌려주기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책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나는 만화책을 돌려달라고 매일 친구를 괴롭혔다. 당시에 힘으로는 내가 더 세었으니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매일 윽박지르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책을 정말 잃어버렸던 것인지 어쩐지 끝까지 만화책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갖은 협박을 해도 만화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 집에 삼국지 2권이 있는데 대신 그것을 주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 만화책이 10권짜리인데다가 무척 재미나는 것이었으니 나는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 책이라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놀라운 일의 시작이자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친구에게서 삼국지 책을 받아 읽었는데, 너무나 재미가 났다. 그 삼국지 책을 읽고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친구가 내게 준 것은 2권까지만이었다. 잘 알겠지만, 삼국지는 3권부터가 재미나는데 2권에서 끝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다음 책이 보고 싶었겠는가. 얼른 다음 편이 보고 싶어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듣는 소리는 책이 거기까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언젠가 삼국지 책을 읽게 되기 전까지 나는 심하게 홍역을 앓았다. 보고 싶은 책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런데 언제쯤 내가 삼국지를 읽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삼국지를 2번 읽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런 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비석가 쓴 삼국지였을 것이다. 나는 기억력이 지독하게 나쁘다. 이렇게 소중한 추억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옛 기억을 돌이켜 글을 쓰려니 정말 일기를 쓰는 것의 중요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만일 일기를 꾸준하게 써왔더라면 이럴 때 참고하고 얼마나 좋았을까. 오, 얘기가 곁으로 샜다. 삼국지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혹 그러면 기억이 되살아 나지는 않을까.
아무리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지만 이렇게 용기를 내어 고백하면서 만화책 원주인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더 용기를 내어 고백하자면 고등학교 땐가 헌책방을 다니면서 한두 번쯤은 진짜 책 도둑질을 했던 것 같다. 그 수법을 공개하면 널리 퍼질까봐 공개를 하지 못하겠지만 가난했던 그 때는 책을 마음껏 사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어서 책을 훔치게 된 것이다. 가난이 죄라고 하면 용서가 될까. 아직도 내가 헌책방에 다니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백권씩 쏟아지는 새 책을 다 사보고는 싶지만 그 비용도 만만치는 않으니 헌책으로라도 허기를 때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요즘도 기를 쓰면서 하는 일이 있다.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삼국지에 나오는 그 ‘계륵’ 이야기와 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 말이다.
요즘에도 나는 매일 5종이나 되는 무료신문을 다 챙겨서 사무실로 가져가고 있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가 5종의 신문을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하겠는가. 결국은 다 보지 못하는 무료신문이 수북하게 쌓인다. 어쩔려구 그러는지 다른 사람들은 한심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무료신문 더미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보물이 무엇일까.
요즘엔 어느 무료신문이고 신간에 대한 소개 기사가 양면에 꽉 차게 나온다. 나는 그 신간소개 기사를 몇 년째 모으고 있다. 그러니 자리가 온통 신문 스크랩으로 꽉 차있다. 그래서 지저분하기가 이를 데 없다. 왜 이러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일 것이다. 새로 나오는 모든 책들을 한번 다 읽어보고 싶은데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여 사볼 수는 없으니 책 소개 기사라도 모아두어 책을 사고 싶은 욕망의 허기를 때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새 책을 적게 사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작년에 산 책이 헌책 포함 전부 550권이었는데 아무리 못해도 새 책이 4분의 1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 나는 평생을 헌책방에 다니게 될 것이다. 책에 관한 한 늘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