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나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말하고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연구한다. 인문학자가 잘못한  건 없다. 인문학은 그런 학문이다.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인문학에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렇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럴법한 견해끼리 충돌하면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어느 쪽도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에는 과학과 달리 영원한 진리가 없다. 한때 진리로 통하는 이론도 100년을 견디지 못한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 다 그랬다. (28p)



<유시민의 과학공부>를 흥미롭게 읽었다. 쉽고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인문학자/ 과학자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흥미롭게 대비시킨다. 몇 년의 나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명사로서의 '인문학자', '과학자'를 내세워 그들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읽는 게 너무 괴로웠었다. 



읽는 내내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과학자'혹은 '인문학자'라는 집단 혹은 사람이 무엇인데? 누구를 말하는데? 그것이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인가? 통계론적 수치로서의 평균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또한 당신이 편의상 혹은 자기 글의 맥락을 위해 그저 두루뭉실하게 퉁쳐버린 가상의 집단 아닌가? 그런 가상의 통친 집단을 이미 있는 집단인양 기정사실화해 논리를 전개해나간다는 것 자체가 모래 위에 쌓인 성 아닌가?"


 이런 생각들 때문에 글을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가 없었고, 그런 구분 자체가 너무 폭력적일 정도로 거칠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자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리고 과학자/인문학자의 나눔은 현실을 방법론의 차이이고, 질문 방식의 차이였음을 말이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인문학은 '왜'와 '무엇을'을 묻는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인간은 왜 신을 창조했는가? 살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서다. 그러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믿는 자에게 진리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망상이며 권력자에게는 유용한 통치도구다. 문과는 보통 이런 식으로 묻고 답한다. 

사회생물학의 질문은 인간과 다르다. '어떤 적응의 이익이 있기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군집에서 종교행위가 진화했는가?" 신의 숫자와 이름과 교리는 다르지만 모든 종교에 종교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초월적 존재를 믿고 종교 공동체에 속하려는 성향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보편적 특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행위 양식이 인간 사회에서 진화한 것은 '적응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적응의 이익'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를 가리킨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도바 더 잘 생존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종교 자체가 '적응의 이익'이 있는 게 아니라 '적응의 이익'을 제공하는 다른 요소가 종교라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다른 요소는 무엇이며 왜 하필 종교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했는가? (131)


그러니 이 책은 이과와 문과의 학문적 방법론의 차이를 다룬 책이자, 30년 동안 문과만 공부한 한 남자가 과학을 공부하며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학문의 방법론은 단순히 학문이라는 좁은 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세사응 ㄹ어떻게 바라보고 설명하느냐, 나아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문제까지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이 안내하는 과학지식은, 과학을 차갑고 냉정한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세상과 사물을 알아가고자 하는 연구자의 뜨거운 집념의 열정의 산물로서 느껴지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시민의 지적 여정과 깨달음을 함께하는 즐거움+과학자의 사고와 질문법을 알게 됨*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세 겹의 즐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과학은 스스로 발전했고, 인문학은 과학을 껴안으면서 전진했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을 즉각 받아들여 활용하기도 하지만 완강하게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의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잇게 되엇다. 인문학에 가장 크고 깊고 넓은 변화를 가져다준 과학적 발견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에게 가장 큰 감사패를 주어야 할까?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을 공동 수상자로 추천한다. 두 사람은 '우리 집과 우리 엄마'의 진실을 밝혔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32/~33)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47)



세상은 사실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도 이야기, 나를 괴롭게 하는 것도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는데, 자기만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마치 실체인양 말하는 것도 강요 강조하는 것도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나는 좀더 담백하게 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보면서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이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인문학자들은 오랜 세월 인간 본성을 두고 논쟁했지만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논쟁을 종결하려면 사실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자는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신경과학자들이 해냈다. ..


'거울신경세포'라는 멋진 이름을 얻은 그 세포는 세상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마음을 읽는 세포'라거나 '문명을 만드는 뉴런'이라고 명예로운 별명도 생겼다.거울신경세포는 대뇌피질을 비롯한 뇌의 여러 부위에 분포해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행위를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등 여러 일을 한다. 또한 공감과 도덕적 동기 유발의 기초를 제공하며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염려하고 덜어주는 행위를 장려한다. 


맹자는 사람한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남을 도우려 하는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고 봤다.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했고 거기에서 인이라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 나온다고 판단했다. 오로지 관찰과 추론으로 구축한 이론이었다. 거울신경 '세포'면 어떻고 거울신경 시스템'이면 또 어떤가. 우리 뇌에 이기적 행동뿐만 아니라 이타적 행위도 하게 만드는 본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공부를 하니 맹자가 더 대단해보인다. 뛰어난 인문학자는 물질의 증거 없이도 옳은 인식에 다가선다. 때로는 과학자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88)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의 많은 선택들에 의한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것들의 실수, 성공, 행복, 슬픔, 내 한계와 내 가능성까지 모두 아는 상태에서 내가 아는 최선의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통제강박이자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한계 안에서의 새로운 자유를 준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가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로게 다양한 견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3장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고 말했다. 엔트로피 법칙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으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앙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253)



나는 내 자신을 무한정 믿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뇌피질의 신경세포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드는 때가 올 것이다. ... 나는 욕심많고 인색하고 어리석고 보수적인 노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하는, 더 젊은 내가 했떤, 모든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언행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뇌의 하드웨어 퇴화로 인해 벌어진 신경생리학적 사건으로 여겨 주기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해 주기를 바란다. 내 자아가 오늘의 상태를 유지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로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언하지 못하겠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101)


그는 이렇게 과학을 공부하며 조금더 겸손해졌고, 한계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안에서 더 지혜롭게 되엇다. 그리고 조금더 멋있어졌다. 나도 이랬으면 좋겟다. 한계를 알고 담담히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것이 유시민 작가의 책에서 배운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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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찰을 준 부분이 많아서 아까워서 기억하기 위해 필사한다. 


물리학과 화학이 없으면 천문학과 생물학은 존립하기 어렵다. 윌슨은 인문학이 다윈주의를 거부하면 학문 자격이 없다고 말한 셈이다. '생물학 패권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질만했다. 윌슨은 실제로 공공장소에 욕설을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윤리학자 싱어는 인문학자들에게, 특히 다윈주의를 오해하고 배척하는 좌파에게 사회생물학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삶의 영역을 문화에 따라 크게 다른 것(경제구조, 정부형태), 조금 다른 것(결혼주의, 인종주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사회적 위계)으로 나누고,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경향성에 근거를 둔 개혁 정책을 추진하라고 충고했다 인간 본성과 마찰을 덜 일으키는 과제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앞에서 나는 다윈주의와 관련해 우파와 좌파 모두 오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우파는 진화라는 사실을 도덕으로 만들었다.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한다고 해서 다 아름답고 좋은 건 아니다. 생물은 어디서나 생존경쟁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존경쟁이 아름답거나 고귀하다고 하는 건 어리석다. 반면 좌파는 도덕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실을 무시했따. 자연선태고가 진화는 특정한 방향이 없다. 인간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결쟁하며 인간에게도 보편적인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 좌파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사회를 재족했다가 대형 참극을 저질렀다. 

마르크스는 이기심, 소유욕, 지배욕을 포함해 계급 착취와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의식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토대의 산물로 규정했다. 인간을 그렇게 이해하면 폭력혁명과 계급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계급 착취를 폐지할면 사유재산 제도에 근거를 둔 사회구조를 변혁해야 하는데 지배계급이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 없다. 부즈주아지(유산계급)은 국가 폭력을 동원해 혁명을 탄압한다. 혁명을 성취하려면 부르주아지의 국가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해야 한다. 그런 폭력을 확볼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을 조직하느 ㄴ수밖에 없다. (134)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틀렸다. 다윈주의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꿈을 이룰 수 잇는 종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물론 철학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겉으로는 진화론을 인정했지만, 인간 심리와 행동에 자연선택이 만든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명제를 부정했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을 호모 사핑네스의 보편적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았다. 사회적 관계를 바꾸면 본성도 달라진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는 '올바른 사상'을 지녔기 때문에 권력을 잡아도 오직 인민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꿈에 홀려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권력자보다 무자비하고 집요하게 권력을 탐했다.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 다윈주의자인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잘못 본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ㅅ회제도는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충돌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사유 재산을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 정책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한 사회체제는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136)



인간은 적응의 이익을 생각한다. '성실'과 '태만 "결과적으로 '태만'이소련이라는 인간 군집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되었다. '성실'과 '태만'이 공존하는 '쌍안정 시스템' 이라도 되었다면 체제가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의 권력자들은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다. 인간 심리와 행동의 밑바닥에 생물학적 제약조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기심가 가족에 대한 집착 같은 성향은 사적 소유를 통대로 한 계급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고 교육을 실시하면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국민 대다수가 '태만'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사회는 혁신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소련은 미국이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싸우다 졌다. (142~143)



'자등명 법등명' 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법(진리)을 등불로 삼는 것은 관습과 미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산다는 뜻이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ㅇ로 살라 했으니 석가모니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장이라고들 한다. 기계벅으로 옮기면 간단하다. '색과 공은 같다.' 문제는 '색'과 '공'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불교 철학자들은 '현상과 실체', '존재와 변화', '물질과 마음''존재와 무''물질과 에너지'등 갖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리를 담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게 당연하다. 이 문장을 양자역학과 연결하려면 '색'과 '공'을 '존재'와 '무'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238







"칸트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칸트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떤 천재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불가지론이다. 사물이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알았다. ..스무 살에 카느의 인식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지금은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뇌과학과 양자역학을 얻어들었다. ‘배웠다‘고 하기에는 변변치 않아서 ‘얻어들었다‘고 햇다. 칸트의 인식론은 칸트의 언어로는 해설하기 어렵다. 연구자들의 해설서가 원저 못지않게 난해한 것은 칸트의 언어에 갇혔기 때문이다. 천재의 이론을 해석하려면 그의 시대에 없었던 정보와 지식을 동원해야 하고 그의 것과는 다른 언어를 가져와야 한다. (71p)

- P71

"과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느꼇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짚어 보았다.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엇다는 것이다.본문에서 누차 말했지만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올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학,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 P292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서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 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느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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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인가,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판권은 2012년 8월에 발행된 초판 3쇄이고, 10년 전 얼마나 접고 밑줄을 그었는지 너덜너덜하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 읽어버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이렇게 쓸 수 밖에 없고, 언젠가 다시 쓸 수 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어쨌든 2024년의 첫 책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밖에. 





기왕 10년 만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저자 또한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며 "초조한 것은 죄다"로 시작해 반복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완전 몰입해서 읽었고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하지만 그의 글에 관해 쓰려고 하니 한 글자도 쓸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몇 번을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지웠다가, 그렇게 그의 글을 숱하게 읽기만 하고 필사만 해댔다. 



이번에 글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욕심을 내려놓는다. 잘 쓰려고 하는 욕심, 뭔가 잘난척 하고 싶은 마음, 나 이것도 알아, 내가 옳아 이런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려놓은 빈자리에 내가 감동깊었던 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 타인과 나누고 싶고 연결되는 가능성을 그 자리에 채워놓는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혁명의 본질에 대한 부분과 루터, 그리고 마지막 장의 문맹률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데, 우선은 혁명의 본질부터!



#1. 혁명의 본체는 "읽는 것, 그리고 다시 쓰는 것: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인지혁명이 모든 변혁을 가져온 첫번째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모사피엔스를 '이야기하는 동물 stoytelling anmal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국가와 기업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의 근간이자 삶에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된다. 그 이야기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다. 이런 형태는 침팬지나 늑대를 비롯해 사회생활을 하는 똑똑한 다른 종에서는 볼 수 없다."<사피엔스> 14p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상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무리나 집단이 아닌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 사회는 가족, 국가, 종교, 공동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언어를 통해 현실화되고 구속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법과 교리, 경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인지혁명은 바로 언어,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지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 어떻게 혁명인지, 혁명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읽어버렸고, 읽은 이상 다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결국 혁명의 본체라는 말한다. 




#2. 읽고 쓰는 것은 '준거를 만드는 것'


<팔순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면 팔순이 되어서야 한글을 익힌 할머니들이 하는 말씀이 있다. 한글을 익히고 나서야 이제 더이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게 되었다고. 그 전에는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항상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틀린 것은 아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물어봐야 했는데 한글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준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앞에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가 무인도에서 혼자 있을 때 그를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바로 지각과 사고를  구별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혼자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각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된다는 것은 사실 지각되지 않은 것과 같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인식주체로서 자기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을 준엄하게 직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우리가 읽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 뿐이다. 그래야만 미치지 않을 수 잇을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는다. 철저하게. 제대로, 진정으로, 미쳐버릴 정도로, 읽는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_36p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중략)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중략)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중략) 그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준거야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85~86p)



이것은 저자의 말대로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일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88)그리고 거기에서 혁명이 탄생한다. 



그래서 결국 루터는 성경을 읽었고, 읽어버렸고, 읽어버린 이상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냈다. 1517년 문맹률 95% 식자율은 단 5퍼센트에 불과한 때, 라틴어로 쓰여 있는 95개조의 의견서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1%도 되지 않았다. 그는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주장을 철회하라는 국회의 소환에 응하게 되는데 이때 유명한 대사를 날린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루터는 자신의 준거를 '책'에서 찾았다. 이슬람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계시를 받기 전 명삼을 위해 동굴에 가는데, 거기에 대천사 지브릴이 있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란다. 바로 "읽어라" 이슬람의 성전 <코란>이란 '읽기'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중세 해석자 혁명도 마찬가지다. 11세기 말쯤부터 법제도의 정비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범유럽적인 대규모 상업권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12~14세기에는 이미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 활동이나 가격경쟁, 개인의 신용 거래나 자본의 원시적 축적 등 이른바 자본제의 기초로 생산되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법의 정비, 아니 '법의 혁명'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이것은 루터나 무함마드와 달리 전혀 극적이지 않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안출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의제가 있습니다. '단체'입니다. '회사, 법인'이나 ;조합, 협회'입니다. "(212p)



그러니 문학은 단순히 문학작품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우리의 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상에 대한 준거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다시 쓰는 것이 필요하다. 읽어버린 이상 다시 읽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 이상 다시 쓸 수밖에 없다. 나의 인생의 준거를 내가 써야 하기 때문이다. 


 

#3. 언어가 가능성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하면 이루어진다.""끌어당김의 법칙"과 같은 개인의 기복신앙이나 바람과 같은 좁은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텍스트를 새로 쓴다는 건, 그 가능성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박에 안 되었다는 사시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스빈다. 문맹이라느 것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거나 표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등 여러 수준의 문맹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사인을 할 수 없으니 x표를 해두는 사니의 이름도 쓸 수 없는 완전한 문맹입니다."(260)



"1850년대 잉글랜드는 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룰 출판한 해이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였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이 1939년, 프롤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1857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도 1857년에 나왓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였습니다. 정말 우리의 세르반테스는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274)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년,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운 90퍼세트였습니다. 완전 문맹의 데이터입닏.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시대>를 냅닏니다... 제국의 인구는 4000만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마념ㅇ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274)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면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76p)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물여섯살 때 병에 걸려 대학을 그만두었고, 책을 냈으나 바그너 일파로부터 중상을 받아 전혀 팔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리고끝내 발광하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게 패배인 걸깡? 암것도 되지 못한 걸까요? 모든 게 쓸데없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이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298p)



나는 언제나 이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부터, 작가의 마지막 문장처럼 환희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텍스트가 장악하는, 무엇이 어떻게 만들어갈지 모르지만 가능성만으로 가득찬 언어라는 세상 속으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항상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가슴 벅차도록 고맙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옳은 일,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거였다. 나의 에고가 간절히 원하고 원하던 말을 이 책이 다 해주고 있었기에. 



이제 나는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이 책을 열렬히 환호하던 그 모든 순간 또한 내가 옳다는 맞다는 자아의 외침에 끌린 것 뿐임을 이제는 안다. 그 에고를 내려놓는다. 그 자기만족과 자기 신념을 내려놓는다. 이 말은 이걸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호불호의 자기만족을 내려놓고, 이 책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 혁명으로서 텍스트의 가능성을 더욱더 한껏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과거에서 오는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텍스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언어를 고쳐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 이제 내가 만들어갈, 내가 새롭게 고쳐 쓸 나의 인생 속으로, 나의 언어 속으로. 그것이 이 책을 덮을 때마다 항상 느끼던 환희와 설렘의 이유였고, 그것이 혁명의 향기였다. 이것이 나의 미래의 문헌학이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 P36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글쎄요. 이 책도 바라건대 무지와 어리석음의 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 P45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P87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박에 안 되었다는 사시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스빈다. 문맹이라느 것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거나 표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등 여러 수준의 문맹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사인을 할 수 없으니 x표를 해두는 사니의 이름도 쓸 수 없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 P260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면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P276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물여섯살 때 병에 걸려 대학을 그만두었고, 책을 냈으나 바그너 일파로부터 중상을 받아 전혀 팔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리고끝내 발광하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게 패배인 걸깡? 암것도 되지 못한 걸까요? 모든 게 쓸데없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이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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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 읽은 책을 제대로 정리도 못했는데 벌써 2024년이라니, 


요즘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하기도 힘든데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고민을 접을수가 없을까? 심지어 3년도 더 전부터. 


며칠 전 만난 친구들은 내가 계속 하고 싶다고만 하고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는데 이런 것들이다. 

첫째, 실패하기 무서워서. 이건 일정 정도 맞다. 하지만 이 이유가 큰 것 같지는 않다. 

둘째, 완벽한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이건 아니다. 내가 언제 완벽한 상태에서 시작했던가. 그런 적도 그걸 원한 적도 없다. 

세번째 친밀한 관계가 싫어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잠깐 소름이 끼쳤다. 이것도 분명 맞다는 것을 내 영혼이 먼저 알아차리고 수긍했기 때문이다. 맞다. 친밀한 (척하는) 관계를 새로 맺는게 싫어서 계속 망설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이쯤되서는 질문을 다시 해봐야 한다. 왜 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하려고 하는지를 말이다. 돈 때문에? 맞다. 대출금이 너무 많아서 돈을 갚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것도 맞다.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그럼 그 일을 하면 돈을 더 벌수 있나? 그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게 돈은 더 벌수도 있을거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건 지금도 취미생활로 지금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왜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거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책을 나누는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수익모델이 마땅치 않고, 교육과 북클럽 어디메쯤에서 계속해서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니 애당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교육도 아니고, 북클럽도 아니고, 그 어디메쯤도 아니었다. 그냥 이것들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이었고(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글을 쓰고 그 글을 사람들과 나누고 같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즉, 나는 그냥 글을 쓰고 싶었고, 혼자 쓰는 일기가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거다. 그 글을 인스타나 블로그에 연재하고 싶었던 거고, 그것으로서 독자를 얻어서 책을 출판하고 그걸로 강의도 하고 북클럽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렇게 단순한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맨날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니. 이걸 눈물이 난다고 해야 하나, 어이 없다고 해야하나, 헛똑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무언가 대단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김연수 작가의 말마따라 재능이 없고, 문창과를 못 나왔고, 독후감 대회에서 한번도 상을 받지 못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글을 쓰는 사람이, 계속 끊임없이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 이걸 깨달은 순간 3년 넘게 나를 따라다니던 사업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는 3년 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구나. 하나의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금 갈증을 느끼고 있었구나. 하나가 끝난 바로 그 다음부터 바로. 


그래서 이제 돌아가지 않기도 했다. 그냥 글을 쓰기로. 그냥 오늘부터. 그냥 되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그냥 닥치고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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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0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잠자기 전 일기나 다이어리에 글을 쓴다면 결국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해요. 물 한 방울이 결국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지요.
 

올해 3월이었나. 주말에 회사에 나가는데 차문 너머로 벚꽃이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벌써 벚꽃 필 때가 됐던가. 차문을 여는데 봄내음이 가득한 바람과 함께 벚꽃과 그 뒤의 파랗고 높은 하늘이 보였다. 눈이 부시게 맑은 봄날은 이런 것일까. 생각하며 나는 잠시 운전대를 잡고 울었다.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파란 하늘을 보며 벚꽃이 흩날리는 이 좋은 날들에 사람을은 나를 떠나고, 나는 악에 받쳐서 남들 탓만 하면서, 끝임없이 내 몸을 혹사하며 밤낮없이 주말이고 계속해서 일을 하면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 미움은 없었지만 질린 사람들, 더이상 나눌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눈치채고 떠난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랑했지만 결국 떠난 사람들, 돌아보니 모두 떠나버린 상태. 악만 남은 것 같은 날들이었다. 



 그렇게 작년 겨울부터 봄을 지나 여름까지 울면서 버텼다. 일기장에 이런 말을 주문처럼 쓰면서 말이다.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씩 재건해나가야만 한다.' 그때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에고라는 적>



어린 나이에 일찍이 성공했다가 여러 사업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방황하면서 저자 본인이 인생의 전환기마다 이런 책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던 경험에서 출발해 쓴 책이라니, 프롤로그를 볼 때부터 알아차렸다. 나도 에고라는 함정에 빠져있었구나. 그래서 지금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로구나. 



에고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다. 거만함과 자기중심적인 야망,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자고 있는 성마른 어린아이와 같고 어떤 것보다 자기 생각을 우선하는 특성. 그 누구(무엇)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에고이다. (p.26)



이 책에는 보이드 라는 장군을 통해 에고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는 우등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쪽으로 가면 자네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런데 타협해야 할 것이고 또 친구들에게 등을 돌려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출세한 사람들이 모인 클럽의 회원이 될 것이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할 거야. 또 좋은 임무를 맡게 될 걸세."


"그런데 다른 길로도 갈 수 있네. 이 길로 가면 자네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지. 조국과 우리 공군 그리고 자네 자신을 위한 일이야. 만일 자네가 그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승진을 못할수도 있고 좋은 임무를 맡지 못할 수도 있어. 또한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는 상관의 마음에 쏙 드는 부하는 되지 못할 걸세. 그러나 이 길을 가면 자기 자신과 타협하지 않아도 되네. 친구들이나 자기 자신을 배반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면 자네가 하는 일도 소중한 성과를 낼 걸세. 중요한 사람이 도리 것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을 할 것인가. 인생을 살다보면 분명히 이 갈림길에 서게 될 텐데, 바로 그때가 자네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라네."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갑자기 모든 것은 더 쉬워지고 동시에 더 어려워진다. 당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 외의 다른 것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관한 문제가 되므로 당신은 타협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선택은 쉬워진다. "(p.60~62)



그러니까 에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추동한다. 열정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며서 감정을 휘두르고 자기만의 영광을 추구하며 목표로 나를 추동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해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로 다른 사람을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항상 내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단순히 남들과의 비교나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도달하지 않은 나의 미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고 현재를 폄하한다. 누군지 모르는 성공한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 평가하고 판단한다. 이 모든 것이 에고가 나 자신과 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망쳐버린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탈탈 털려서, 완전히 발려버렸음에도 에고라는 허위에 지탱하고 있다. "이게 다 그 사람들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이쯤되면 사실은 한심한 것 아닌지. 어쩌면 이것이 진실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내가 잘한다고 믿었던 것들,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거대한 에고로 이루어진 허상이었음이 지금 낱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직면해버렸으니 이제 더는 무언가를 숨기거가 가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을지도. 여기가 나의 끝이 아니기를, 막다른 길이 아니기를, 바닥이 아니기를, 나는 매일 빌었다. 나의 구렁텅이에 거기에는 거대한 에고만 있었던 것일뿐. 그게 전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 행세를 할 게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하라고. 일을 실행해는 것 자체에, 무엇보다도 그 일을 탁월하게 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이제 거대한 에고를 좀 내려놓고 실행에 포커스를 맞추자. 이런 다짐이 아닌 그냥 닥치고 하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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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29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이즘이 지나치면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듯해요.
 

오랫만에 알라딘에 와서 내가 올해 한번도 리뷰를 쓰지 않았다는 것에 너무나도 깜짝 놀랐다. 올해도 나는 여전히 수많은 번민에 휩싸였으며 활자중독자답게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어제꼈고, 여전히 일주일에 한번씩 독서모임을 하고 있고, 독서모임에서도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단 한 권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어쩐지,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니 ㅠㅠ


반성하며 2달밖에 남지 않은 올해의 독서를 이제라도 기록해보려 한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드뇌 빌뢰브 감독의 <컨택트>이다.

 

이 책의 원작이 실려있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책 또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영화 <컨택트>에 나오는 모든 장면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이거다.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걸 껴안을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꺼야."








그냥 들으면 삶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선택하는 고뇌하는 자의 자기결심 같기도 하고, 니체식 영원회귀의 잠언같기도 한 이 문장은 신기하게도 실재가 무엇인지 바로 직면하려는 물리학이자 현실을 인식하는 뇌과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것의 문학적 버전이 바로 이 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아닐까. 그리고 이 결론의 자기계발적 버전은 아마도 <퓨처 셀프>가 되겠지. 















그렇지만 오늘은 우선 <이토록 평범한 미래>부터. 



이 소설이 처음 나온 이후부터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사랑했다. 매일마다 이 책에 나오는 글귀를 되뇌이곤 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 책 속에 나오는 책처럼 인생을 세 번째 삶을 사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이 책에는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칸트의 인식론이라던가 불교의 일심사상과 일치한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도 매일 상상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그리고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모든 순간을 껴안고 모든 순간을 반길꺼다. 그것이 너무나 평범할지라도 시차가 주는 그 경이를 알기에. 나는 그것을 상상하면서 오늘을 살아갈거다. 


#새벽문장#이토록평범한미래#김연수#책속한줄#좋은글귀#예쁜글귀#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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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dark 2023-12-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이 책을 보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떠올린 게 아니었군요 ㅎㅎ 반가워서 댓글 달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