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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퍼유전자를 타고 났다고 절대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던 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제야, 드디어... 마침내?



지난 이틀간 목이 아프고 온몸이 쑤신 근육통과 오한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약 먹고 자고 약먹고 자고 중간중간 간신히 비몽사몽간에 회사일을 체크하다가 오늘 드디어 조금 제정신이 든다. 마스크를 쓰고 아이들 밥도 챙겨주고, 학교에 보내고 나니,(엄마 코로나 확진자에게 자가격리라는게 과연 가능하긴 한걸까, 왜 아무도 코로나 시국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어쨌든, 아이도 없고 밥도 먹고 약도 먹고 식탁에 앉아 있으니, 이건 뭔가. 너무 좋은 것 아닌가! 아직 몸은 아프지만, 회사에는 연차를 내고, 아이들은 학교를 가서 오후에나 올 테고, 나는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사방은 조용하고 집안은 따뜻하다. 아, 너무 행복하다. 코로나에 걸려 행복을 논한다는게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 너무 행복하다. 이런게 행복이였구나!!^^



최근에 읽었지만 계속 정리하지 못했던 책들을 다 꺼내놓았다. 먼저 <주역강의> 부터. 



낭독모임에서 다함께 읽었던 책인데 주역의 64괘를 하나씩 설명하다보니 지금 우리의 관심사와 크게 상관없는 부분도 꽤 있어서 그런 부분은 스킵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좀 너무 뻔하다고 해야 할까, 초등 도덕 교과서 같이 그저 옳고 좋은 말들이 꽤 있어서 이걸 과연 읽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부분들마저 모두 너무 뼈때리는 교훈으로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공간의 만남, 그 사이에 우리의 인생이 끼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조화 속에서만 원만히 진행될 수 있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때가 맞지 않으면 일이 성사될 수 없고, 아무리 좋은 때가 되었어도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일은 역시 어그러지게 마련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공허한 옛 말이 아니니, <주역>이 그 첫머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도 역시 이러한 시간의 절대성, 공간의 상대성, 그리고 그 둘의 조화에 관한 내용이다.

"-46p, 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내가 주역을 읽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약 10년 전, 큰 아이가 5살, 둘째가 2살일 때였다. 아이를 보면 책을 보며, 알라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그때 나를 사무치게 했던 부분은 '박' 괘였다. 꽉 막힌 시절을 견디는 지혜다. 주역에서는 꽉 막힌 시절을 어떻게 견디라고 이야기했을까? "종자를 남겨둔 군자는 수레를 얻지만, 소인은 오두막마저 깨뜨린다." 



유치하지만 나는 당시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다이어리에 틈만 나면 써놓고 이 문장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꽉 막힌 시절이라 해도 나는 종자를 품을 수 있다. 종자를 남겨야한다. 가슴속의 씨를 결코 버리지 말아야한다고 주문을 걸듯 나에게 말했었다. 



그 씨앗이 10년 동안 많이 자랐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흔들리고 심난해하며 주역을 다시 읽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마디 말을 찾아서, 나의 맥락에 꽂히는 그 하나의 괘를 찾아서 주역을 샅샅이 읽었다. 그리고 찾았다. 나에게 필요한 괘. 바로 수, 어떻게 때를 기다릴 것인가에 관한 괘이다. 



"수는 때를 기다림이다. 유부는 믿음 또는 확신이 있음을 의미한다.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왜 기다리는지, 기다리면 무엇을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믿음과 확신,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기다림을 견디기 위한 첫 번재 요건이다. 목표와 기약이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주역>은 이처럼 기다림에는 반드시 믿음과 확신,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가 도래하였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청하지 않은 세 사람의 객이 있어 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인재의 출현이 가장 가시적이고 즉자적인 타이밍의 판별 기준이 된다. 그런 귀인이 나타나는 순간을 놓치지 말고, 그를 공경해 맞이하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면 끝내는 길하다는 것이다. 


_105 수, 어떻게 때를 기다릴 것인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10년을 사업을 했지만 갈수록 확신이 없고, 잘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틈만 나면 딴 곳을 보고 방황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알량하게 다른 것을 보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믿음일것이다. 내가 00를 할 거라는 믿음, 이제 시작한지 10년, 나는 갑자기 잘 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천천히 조금씩 더디더라도 노력한만큼은 확실히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목표가 잘 보이지 않아 이런저런 헛짓거리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잘 될리가 없지. 



그러니까 사실 지금은 추락기가 아니라 추후 10년을 위한 목표를 짜야 할 때였던 거다. 그런데 지치고 힘든 나는 그것을 하기 싫어서 뻘짓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그러다보니 목표가 없어지고 그러다보니 더 내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렇지만 아직 나의 때는 오지 않았다, 처음 창업할 때 10년짜리 계획을 짰던 것처럼 이젠 앞으로의 10년짜리 계획을 짜야 할 때인 것이다. 나는 나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10년이든 20년이든, 나는 더디더라도 확실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주역에 관한 주석서를 쓰다가 계속 포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또 포기하고 산책삼아 갔던 절에서 깜빡 잠이 든 그에게 미래 혹은 전생의 그가 꿈에 나와 호통을 친다. "현세에서 주석을 끝내지 못한다면 다음 세상에서 다시 역경을 공부하고 써야 한다."고, 이후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 감동이다. 



"그러자 욕심이 사라졌다. 완벽한 주석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나 최소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거라는 판단도 생겼다. 잘못 쓴다 해도 스승이 없었으니 나 외의 다른 누군가에게 오점을 남길 일도 없었다.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어차피 애초부터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주역>의 주석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내 안에 끓어 넘치는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162



나 또한 그렇다. 완벽한 무언가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 정말이지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지. 내안에 피가 끓어서, 그것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 중요한 건 그것밖에는 없다. 그러기 이 끓는 피를, 목표로 환원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 어렵더라도. 어려울 때면 <수, 어떻게 때를 기다릴 것인가> 를 다시 읽자. 그리고 <부, 막힌 운을 뚫는 법>을 다시 읽자. 기신기신하면서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군자로서의 일을 어떻게든 계속해야 한다.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고 실을 자아내듯이, 다 나왔을 것 같은데 그 작은 누에에서 다시 실이 뽑아져 나오듯이 그렇게 끊임없이 할 일을 해야 한다. 뒷짐만 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에가 기신기신하면서도 끝까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어 가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 계우포상이다. "

 188p, 부- 막힌 운을 뚫는 두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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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녀가 있다. 16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본 적도 없고, 예방접종을 맞아본 적도, 병원을 가본적도 없다. 심지어 출생등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후출생신고를 하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버지는 사이비 광신도에 고철폐기물장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위험천만한 폐기물 작업에 동원한다. 엄마는 산파이자 약초전문가로 신비하지만 효능은 잘 모르는 오일을 만든다. 


그곳에서 태어난 8남매. 자식들은 너무 쉽게 많이 다친다. 고철폐기 작업을 하다가 고철에 찔리고, 손가락이 절단되고 산등성이에서 떨어지고 온몸에 불이 붙는다. 아버지의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시시때때로 사회와 병원과 교회가 음모를 지닌 일루미니티라고 규정하고 폭언하고 조정한다. 


어머니는 유약하고 힘이 없다. 오빠 숀은 모든 여성을 창녀로 보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곳의 막내아이 이 책의 저자 타라는 17살에 대학에 합격해 게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하버드에서 방문연구,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박사가 된다. 이 책은 이 기적같은 배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바로 <배움의 발견>이다.



여러 의미에서 끝내주는 책이다. 나는 최근에 이와 같이 훌륭한 책을 읽어본적이 없다. 스토리 자체가 매혹적이지만 그 상세한 디테일은 작가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처럼 감각적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스토리 그 자체다. 16살까지 학교도 가본적이 없는 여자아이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된다. 게다가 이 아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집안 7명 중 3명의 아이가 결국 박사과정까지 공부한다. (물론 나머지 4명은 대학 문턱도 가지 못한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역시 될놈될..'이라고 썼던 한줄평도 생각난다. 그렇다. 역시 될놈될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될놈될'과 '안될놈안될'을 판가름짓는 단 하나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일기)쓰기'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일기를 계속 써왔고 일기에 상당부분 기억을 빚지고 있으며 최대한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는 순간 현실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써오는 사람, 끊임없이 경험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다시 재조직해서 재해석해서 다시 쓰기를 하는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첫번째는 사고였다면 두번째는?"


리처드의 운전한 교통사고는 '사고'였다.그렇지만 두번째 교통사고는? 숀오빠의 떨어져서 머리를 부딪힌 것은 '사고'였다. 그렇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치료하려고 15분간 방치하고 그후에 발악하다 또 머리를 부딪힌 것은? 리처드의 화재사고는? 아빠의 화재는? 그 모든 사건사고들이 모두 하느님의 의도라고 아빠는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는 사고였다. 그렇다면 두번째는?" 그 질문은 계속해서 써온 사람만이 해올 수 있는 질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두번째 놀라운 것은 저자의 디테일이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사고속에서 그 디테일의 감각을 되살려낸다. 그 디테일 속에서 나는 비로소 저자에게 배움이라는 것이 '진정'무엇을 의미하는지 감각으로서 깨닫게 되는 거다. 처음 저자에게 배움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내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것이 내 배움이요 교육이었다. 빌려 쓴 책상에 앉아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 109


그리고 그것은 연이어 자각의 길로 그녀를 안내한다. 자각은 남들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들이 잔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진실이 상대적일수 있다는 불안, 그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과정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었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 



그런 자각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사람은 결국 어떤 존재가 될까? 자기 의견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것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어떤 상황을 각각의 다른 안경으로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고, 결국 자기만의 안경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저자는 이것을 '특권'이라 부른다. 


"나는 언니가 한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471


나또한 공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언어 속에서 나에게 맞는 언어를 찾고 활용하며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어서라고. 그 능력이야말로 모든 배움의 목적이고, 그렇기에 모든 배움은 불온하다고. 모든 배움은 전복의 기운을 담고 있다. 아니 전복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다. 



그렇기에 저자가 지금까지 행복과 안락이라 느껴왔던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하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출간할 때까지 저자는 결코 가정에서 용서받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매년 고향에 내려가지만 부모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는다. 그녀는 어린시절과 괴팍하지만 사랑하던 사람들과, 끝내 믿을 수 없지만 한때 삶이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년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아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507)



나는 이렇게 완벽한 교육에 대한 정의를 본 적이 없다. 



......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던 부분이 있다. 저자가 숀 오빠의 폭력성에 대해 엄마한테 말하자 엄마가 공감해주는 부분이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딸인데, 내가 너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저자는 그 말이 평생 찾고 있던 말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저자의 수치심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반쯤 정신나간 사람이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목을 눌리고 잇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피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423~424) 


하지만 엄마가 채팅창에 써놓은 그 말을 읽는 순간 그녀는 한평생을 다시 살았다.  어린 시절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했고, 다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새로 쓰기를 결심할 정도로 감사했던 엄마의 그 말은 허위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묻어두었다. 엄마는 그저 딸의 바람을 충실히 반영해준 것 뿐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무지는 어떻게 악이 되는가. 약함이 어떻게 악이 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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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을 읽기만 했지 글을 쓰진 않았다. 할말이 없었고, 글을 쓰고 싶을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책도 많지 않았다. 책의 가치를 매길수는 없지만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책들을 5년 정도 읽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 눈앞에 현실이 보였다. 



나는 일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를 돌보고 사업을 하는 워킹맘사업가. 내 할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사회정의니 옳고 그름이니 공정이니 정의니 하는 말들만 하는 것이 공허해졌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이 더 중요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잘 하고 제대로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전에 쉽게 휘리릭 읽었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허투루 읽히지 않았다. 통렬한 자기 반성의 시간이 다가왔다고나 할까. 




<부자의 그릇>은 그 와중에 읽은 책이다. 뻔한 자기계발서라 생각했었는데, 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책이 아닌가! 책에서는 돈은 그만한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 모인다고 이야기한다. 10억원의 그릇에는 10억원, 1억원의 그릇에는 1억원이 모이게 되는 거다. 



이 부분을 읽고 과거의 나의 사업 패턴을 반추해보았다. 나는 사업을 키울 기회가 2번 있었는데 그 2번 모두 사업을 키우지 않았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두번째는 주변에서 반대했다. 나는 그 기회를 잃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주변 사람들이 다 미웠다. 



그들이 나를 괴롭히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면 왜 성장의 과실은 맘껏 누리면서 내가 혼자서 미친듯이 일하는 것을 도와줄 사람을 뽑지 않게 하겠는가. 그렇게 주변 사람이 싫은 걸 정당화하고 싶어서 또 미칠듯이 정당화의 논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그냥 사람이 싫은 거였을지도. 



그런데 이제 알겠다. 그때 나는 아직 그 정도의 그릇이 되지 않았었다는 걸. 그리고 그 그릇은 저절로 커지지도 않는다는 걸. 그릇은 갑자기 어느 순간 짜잔 하고 커지지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닌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내가  다룰 수 있는 그릇의 범위를 가늠하고 조금씩 다지면서 조금씩 키워갈 수 있을 뿐인거다. 그때 내가 갑자기 사업을 키웠으면 지금 겪는 이 고통을 조금 더 일찍 겪었겠지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이제라도 내가 나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게 중요할거다. 



부자가 두려워하는 건 돈을 잃는 것이 아니라 '돈이 늘지 않는 리스크'라고 말한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그리고 인생에서 행운이란 건 손에 꼽힐 정도로만 온다. 따라서 한정된 기회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면 배트를 많이 휘둘러야 한다. 물론 때로는 크게 헛스위응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바로 이 헛스윙이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은 배트를 많이 휘둘러야 볼을 맞힐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 73~74




돈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서 온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룰 수 있는 돈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릇이 크지 않으면 어쩌다 돈이 들어와도 모두 나가버린다. 무엇보다 돈의 지배를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돈에 지배당하지 말고, 돈과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그동안 돈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돈을 번다는 건 단순히 돈'만' 번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과 세상에 돈과 환산한 다른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가치를 많이 주고 싶다.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이. 


사람들이 아주 큰 가치, 큰 도움을 주고 '돈으로 셀 수 없는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가치가 아니라 너무 커서 돈으로 셀수 없는 가치라는 뜻이다. 나는 그런 가치와 필요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을 또 몇년 후에 보고 어떤 식으로 생각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에게 지금은 이것이 중요하니까 꼭 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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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한다는 것> 이 책은 맥도널드의 창업주 레이 크룩이 쓴 자전적 이야기이다.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원형을 만들고 전 세계에 퍼트렸다. 




52세에 패스트푸드 사업에 도전해 시작한 맥도널드는 현재 전 세계 120여 개 나라 3만 5000여 매장에서 1800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매일 6900만 명의 사람들을 맞고 있고, '빅맥'이 세계 물가를 측정하는 지수로 사용된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레이 크룩의 대담함과 야심, 실천력에 놀랐다면, 그 다음에는 레이 크룩과 맥도널드의 탄생 비화를 다룬 영화 <파운더>를 함께 보면 더 좋겠다. 책이 자전적 이야기로서 갖게 되는 흥미진진한 매력이 있다면, 영화는 레이 크룩의 성공담을 좀더 입체적으로 파헤친다. 

사업가로서의 그의 야심은 맥도널드 형제의 상표권을 빼앗고 뒷통수를 치며 조강지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지점장의 아내를 빼앗는 성공한 개새끼로서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결과적으로 그를 까는(?) 영화가 되었지만, 어쨌든 레이크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정말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 


그의 휴식법. 


"그때 나는 문제에 압도되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한번에 한 가지 이상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가 있어도 불필요하게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그 때문에 수면을 방해받는 일은 없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디테일. 그는 지저분하고 직원들이 나태하며 엉망인 매장이 엉망인 것을 보고 말한다. "엉성한 사고방식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세부사항을 중요시해야 한다. 사업이 잘 수행되기를 바란다면 그 일의 모든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에 낱낱이 완벽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배운 것은 단 하나. 계약서는 구두로 작성하지 말 것. 그는 맥도널드 형제에게 이름에 대한 로열티를 주기로 구두로 약속하고 결국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이같은 실수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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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창업을 하고, 남들은 나를 사장님이라고 하는데, 나는 내가 사장님 같지가 않고,





사업을 해야 하는데 뭐가 사업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벌써 창업한지 9년차, 법인을 차린지 4년차가 되었다.



그 동안의 나의 창업은 3개의 기간으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1기. 개인사업자 시절, 내 노동력과 시간과 자본을 갈아넣어 회사를 운영하는 시절



2기. 법인사업자 시절~지금까지.



사실 법인 사업이라고 하지만 개인사업자와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직원을 5명까지 고용해도 매출은 변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직원들은 툭하면 나갔고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최근에서야 비로소 나는 사업이 아니라 자영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사업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당인은 사업가입니까> 이 책은 내가 4년전에 읽었어야 하는 책이었다. 왜 나는 이토록 좋은 책들이 있는데도 이걸 깨닫지 못하고 헤매이고 있었을까?





그건 게을렀기 때문이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당장의 일에 급급하고 나의 방어기제를 충족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정성과 노력과 에너지를 써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전에 물어보았어야 했다. 나는 왜 사업가가 되려고 하는가?





<당신은 사업가입니까> 이 책에서는 사업가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사업가가 '되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숙고하라고 충고한다. 누구나 사업가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가? 나는 사업가가 되어야 하는가?





저자는 그 이유로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업상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은 알고보면 사실상 개인의 문제들이다. 개인 문제를 다루는 능력이 향상되면 사업 문제를 더욱 잘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점.





- 사업인 듯 보이지만 사업이 아닌 것은 죠비와 잡-비즈니스로 나눌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던 부분. 나는 이제까지 사업이 아니라 잡-비즈니스를 해왔다는 현실 인식. 그렇다면 사업은 무엇인가?





사업가의 일은, 사업체를 경영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업은 자본 가치를 가지며 특정 개인에 의존하지 않는 사업이다. 자본가치를 창출하고 확장할 기회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사업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사업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만들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모걱을 이룰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가가 되기 위해 첫번째로 생각할 점은 교육과 시스템인 것이다.





직원으로 있을 때나 사업을 시작할 때나 자신의 직업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다. 사업을 시작한다면 나의 직업은 이제 '사업체를 경영하는 것'이 된다. 사업체를 경영한다는 것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고객을 찾기 위해 마케팅하고, 불만에 가득 찬 의뢰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직원들을 관리하고, 인건비를 감독하며, 전문 서비스 제공자들을 관리하고, 판매자 및 공급자와 협상하는 등이 많은 일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업가가 되면 대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예전보다 적게 할 수 밖에 없다.





사업 아이디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가치는 실행하는 데 있다. 동일한 사업 아이디어가 멋지게 실현될 수 있느냐, 아니면 형편없이 실행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6개월 동안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아이디어를 다듬고 또 다듬는다 해도, 그 노력은 사업을 시작하고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일의 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경영하기 위해 만족시켜야 할 여러 요소들은 실행해내기가 그리 녹록지 않다. 많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문엇보다 훌륭히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매일같이 매우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엄청나게 많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나는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이제 나에게 선택의 시간은 없다. 이미 지나갔다. 나에게는 12명의 직원과 그들이 받는 한달에 6천만원 정도의 월급과 이것저것 부대비용 한달에 1억 5천, 재투자 감안하면 한 달에 2억을 넘게 벌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왜 그것을 하느냐, 그것으로 인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만들어가는데 나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소득이라면, 직원들이 어이없는 이야기를 할 때 대응할 말을 찾았다.





누군가 내게 뭔가를 이야기한 다음 내 의견을 물을때면, 나는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진짜 답을 원하나요, 아니면 내가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길 원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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