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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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와 더불어,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 세상을 감각하고, 인지하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다른 두 지성체가 상대방을 어떻게 '길들이는지'에 대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잔혹한 보고서. 알라딘 독자평이나 네이버 블로그를 보니 작가가 이전까지의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이 적지 않은데, 난 오히려 뚜렷한 '도약'을 느꼈다. 특히 '길들임'의 방향이 일방향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얘기하면 스포가 될 테니 여기까지만.)

훌륭한 소설책인 동시에, 훌륭한 교양 철학서다. 내가 선생이라면 학부 교양수업 커리큘럼에 꼭 집어넣었을 것. 역시 김초엽은 성실한 연구자이자 훌륭한 대학원생의 마인드셋이 장착된 사람. 요즘같은 시대에 매우 귀한 자세다. 나는 그의 첫 에세이 《책과 우연들》을 대학원생 혹은 연구자 지망생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로 읽었는데, (절대 망치를 들었다고 죄다 못으로 보이는 착시가 아니다!) 조만간 그 책의 서평을 쓰며 《파견자들》이야기도 조금 곁들여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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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P 2024-01-0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대급 호들갑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금요일엔 역사책 1
장지연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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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올해 그나마 잘한 일이 있다면, 사료를 퍽 열심히 읽었다는 것이다. 1890년대 독립신문부터 1920년대 개벽, 1950년대 사상계1960년대 제6대 국회회의록에 이르기까지 약 7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사료를 찾고, 읽고, 정리했다. 좋아하는 선생님께선 역사가는 언제든 지금 무슨 사료를 읽고 있나요?”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적어도 지금 뭘 읽고 있고 앞으로 뭘 읽을 거란 얘기는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올해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혹시 나는 사료를 읽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하는 게 아닌가, 사료보다는 재밌는 학술서를 더 읽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에도 확실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재밌었던 점은 189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길다면 긴 시대를 오가며 사료를 읽어가다 보니 비단 내용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한자가 조금 섞였을지언정 한글이 주가 된 한국어 사료만 읽었는데도 결이 다 달랐다. 가령 독립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리듬감이다. 종결어미 “~의 빈번한 사용부터 해서 마치 판소리계 소설처럼 누구라도 소리 내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듬감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오죽하면 도서관에서 독립신문》 〈논셜을 조용히 몇 번 읊조렸을 정도다. 이광수의 무정이 나오기 20년도 더 전이니 구어체 한국어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았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립신문이 여러 사람에게 널리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치 팜플렛의 성격이 강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리듬감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면 1920년대 개벽으로 넘어오면, 간간이 종결어미 “~가 쓰이긴 해도 리듬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진다. 대신 일본식 표현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단순히 “~하지 않을 수 없다처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는 번역투 이야기가 아니다. “社會할 수 업는과 같이 일본에서 가나와 한자를 섞어 쓰는 것과 유사한 표현이 대부분이란 이야기다. 덕분에 사료를 정리하며 꽤나 애를 먹었다. 가령 저 위 표현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회의 권을 탈할 수 없는인가, 아니면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인가? “하야진하야인가, “나아가인가? “하는급하는으로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르는이나 미치는으로 읽어야 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현대 한국어에 일본어와 비슷한 훈독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한문 혼용이라 해서 지금의 한국어에 한자만 갖다 붙인 게 아니다.

 

그러던 게 1950년대 사상계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훈독이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글을 읽기는 훨씬 어렵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이 급격히 증가했고, 이걸 다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사상계가 초기부터 최현배의 글을 실으며 한글전용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한자 사랑은 퍽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상계에서 한자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드는 건, 체감 상 1957년 정도다. 아마 요즘 청소년에게 독립신문을 읽히면 와 쌤, 라임 오지네요!”하면서 신나서 따라 읽겠지만 사상계는 손도 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10대에게 더 가까운과거는 1890년대 독립신문인가, 아니면 1950년대 사상계인가? 선뜻 답하기 어려워진다.

 

서론이 길었다. 망설임 없이 올해의 교양서로 꼽고 싶은 장지연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이처럼 한국사를 이루는 언어의 다양한 을 살핀다. 한국사의 언어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지극히 이분법적이며, 또한 단절적이다. 횡으로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로 그 이전은 한문, 그 이후는 한글로 나뉜다. 종으로는 양반/남성/엘리트가 애용한 한문과, 백성/여성/민중이 애용한 한글로 나뉜다. 하지만 한문과 한글은 과연 단수일까? 앞서 살펴보았듯 독립신문의 한글과 개벽의 한글, 사상계의 한글은 전부 다르다. 한문도 마찬가지다. 범어(산스크리트어)보편언어였던 고려시대의 한문과, 유교 경전이 정치는 물론 개인의 내면까지 수양하는 표준으로 올라선 조선시대의 한문은 명백히 다르다. 장지연이 보고자 하는 것은 복수의 한글과 한문’, 그리고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6월 말에 나온 책인 만큼 그 내용을 다룬 서평은 적지 않다. 나 역시 한겨레21에 짧게나마 서평을 실었고, 무엇보다 지은이 장지연이 대학지성 In&Out에 책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내용에 대한 소개는 과감히 생략하겠지만, 딱 하나 다루고픈 이야기가 있다. 지금껏 대부분의 서평에서 주목하지 않은, 심지어 지은이 자신도 넘어간 도구. 지은이의 말마따나 문자는 이를 쓰는 도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p.120.) 가령 윤치호가 구태여 한글이 아닌 영어로 일기를 쓰겠다고 선언까지 한 이유는 필묵을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영어는 펜에, 한문과 한자는 붓에 적합한 언어였던 셈이다. 물론 갈대 펜을 여러 번 덧칠해가며 붓으로 쓴 것과 거의 동일한 글씨체를 구현해낸 8세기 돈황의 한인(漢人), 멋들어진 로마자 서예를 하는 베트남인을 통해 알 수 있듯 문자와 도구의 관계 역시 일방적이지 않다.

 

서체와 활자, 도구에 대한 지은이의 관심은 한국사의 뜨거운 감자인 금속활자로까지 뻗어나간다. 그간 금속활자를 둘러싼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서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낸 선진성에 대한 찬탄과, 그런 금속활자를 갖고도 조선말까지 인쇄혁명은커녕 서울에 변변한 서점 하나 없었던 낙후성에 대한 멸시가 그것이다. 지은이는 이 두 입장 모두 근대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며,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12세기 고려의 무신집정 최우는 왜 어떤 책은 금속활자로, 어떤 책은 목판 번각으로 찍어냈는가? 1403년 조선 조정은 하루에 서너 장밖에 찍어내지 못하는 지지부진함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금속활자 인쇄를 선택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느니, 그것이 정작 별다른 쓸모가 없었느니 하는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활자에 담긴 복합적인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 지은이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이러할 것이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비단 그 내용이나 문제의식뿐 아니라, 소비와 유통의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지난 6월 말 책이 나온 이후, 3개월 가까이 책에 대한 감상이 꾸준히 올라왔다. 평범한 독서 애호가에서 기자, 전문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퍽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령 간단한 한줄평을 남기든 내용을 요약하든 자신의 공부 경험을 덧대든 다양하게 책을 읽어간 경험을 공유했다. 주요 언론사에서 큼지막하게 소개하지 않은(이건 전적으로 언론사 잘못이다!) 책으로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 책을 매개로 (그것이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지만) 거의 와해된 줄 알았던 서평공동체혹은 문예공화국이 잠시나마 복구되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가 이토록 꾸준하고도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지은이 장지연이 탁월한 역사 글쟁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탁월하다는 건 단순히 글을 잘 쓴다는 의미가 아니다. 장지연은 아마도 소설을 제외한다면 역사를 소재 삼아 쓸 수 있는 모든 글을 써본 거의 유일한 역사가일 것이다. 논문과 학술서, 해제는 물론 교양서(경복궁, 시대를 세우다, 너머북스, 2018.), 청소년을 위한 역사서(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5: 새 나라 조선을 세우다, 웅진주니어, 2010질문하는 한국사 3: 조선, 나무를심는사람들, 2020.), 일간지 칼럼(경향신문》 「역사와 현실), 심지어는 그림책(세종로 1번지 경복궁 역사 여행, 너머학교, 202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독자를 겨냥한 글을 썼다. 그는 글의 성격과 목적, 독자에 따라 스타일을 달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역사가다.

 

하지만 단순히 장지연이 탁월한 역사 글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이 책의 인기를 설명할 수 없다. 추측컨대,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었던 건, 이 책이 역사가의 연구노트를 엿보는 기분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연구자가 그렇겠지만, 특히 역사가에게 연구노트란 무척이나 중요하다. 역사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료를 통해 말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료를 모으고, 읽고, 정리하고, 그때그때 감상과 생각을 메모 형식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은퇴를 앞둔 존경하는 교수님께서는 당신은 아직도 연구노트를 쓴다며, 박사과정생이라면 연구노트를 1000페이지는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문제는 연구노트의 상당 부분은 논문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교수님께선 1000페이지의 연구노트 중 90%는 버릴 수밖에 없다고 일갈하셨더랬다. 나만 해도 올해 노트 두 권 분량의 연구노트를 만들었지만(그렇다, 난 아직도 영인본으로 사료를 읽고 일일이 손으로 메모를 해가며 연구노트를 만든다), 그 중 대부분은 레포트에 넣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버려진연구노트는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일단 연구노트는 논문보다 재밌다. , 쭈쭈바도 꼬다리가 더 맛있지 않은가. 논문에 담지 않았다는, 혹은 못했다는 건 학술장에서 인정받기엔 (아직은) 어려운 얘기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딱딱한학술장이 감히 담아낼 수 없는 발랄하고 참신한 얘기라는 의미기도 하니 말이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말하자면 역사가 장지연이 논문에는 싣지 않거나 못한 연구노트처럼 읽힌다. 연구노트라 해서 산만하다거나, 허무맹랑하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탁월한 역사 글쟁이답게, 장지연은 유려한 문장과 매끈한 서사로 연구노트를 한 편의 이야기로 묶어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이 책이 역사가가 사료를 읽고, 분석하고, 고민하며 논리와 얼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독자에게 생생히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양서는 주어진 사실이나 서사를 독자에게 쉽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독자 역시 역사 교양서를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거나, 복잡한 맥락을 보다 잘 이해하는 것 정도를 독서의 목표로 삼고 말이다.

 

반면 이 책은 (장지연의 선별을 거치긴 했지만) 사료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지은이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각을 펼쳐가는 모습을 독자에게 거의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장지연이 사료를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요새 역사교육의 화두이기도 한 역사하기(Doing History)”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게 된다. 역사가의 연구노트를 엿보는 기분을 선사했다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이 책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일종의 문예공화국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흔히 요즘 독자는 지적으로 게으르기에, 지은이가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주지않으면 책이 팔릴 수 없다고들 한다. 내가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의 꾸준한 인기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정 반대다. 독자는 주어진 사실과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사료를 읽고 판단하고 싶어 하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다만 지금까지는 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서가 없었을 뿐이다. 장지연은 자신의 연구노트를 선뜻 독자에게 공개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역사 글쟁이답게 이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끔 풀어냈다. 그랬기에 다양한 독자가 책을 읽으며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감도 잡아보고, 감상과 서평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도 만들어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단순히 좋은 교양서의 모범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나아가 대학에서의 역사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 학생이나 독자에게 단순히 주어진 사실과 서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이들을 역사하기에 참여케 하려면 어떤 방법과 전략을 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나 공공역사가 화두인, 정확히 말해 역사에 구태여 공공을 붙이지 않고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책은 역사가 기존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설민석화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접촉면을 넓혀갈 수 있는 탁월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이 책을 매개 삼아, 그간 애매하게 퉁쳐왔던 역사와 대중의 소통에 대한 보다 많은 논의가 이뤄지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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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유교걸 - 어느 페미니스트의 동양 고전 덕질기 오봄문고 8
김고은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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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쩌다 유교걸》

이미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유교맨이다. 리추얼을 중히 여기고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내가 정말로 공맹의 가르침을 인생의 신념이나 철칙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교는 내게 일종의 생존술, 그러니까 내가 이만큼 하면 남도 최소한 날 막 대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자구책에 가깝다. 물론 그 기대는 종종, 아니 자주 배반당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한문을 모른다. 유교 경전을 '각 잡고' 읽어본 적도 없다. 유교를 하나도 모르면서 맹자로부터 민주주의와 양심의 기원을 찾았던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내게 유교란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이롱 유교맨인 나와 달리, 김고은은 정말로 진지한 유교걸이다. 꽤 오랜 시간 유교 경전을 공부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진지하게 유교의 가르침을 믿는 동시에, 꽤나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래 여성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가는 현실에 분개하고, 돼지 새벽이와 잔디의 생추어리 활동에 꼬박꼬박 참여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기만을 바라는, 일제시대 태어났다면 소학교 선생으로 조용히 살다 도둑같이 해방을 맞이했을 나 같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고루한' 유교와 어울리는 사람은 김고은보다는 내 쪽이겠지만, 정작 유교에 훨씬 진심인건 내가 아닌 김고은이다.

김고은의 첫 단독 저서(그는 이미 여러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고,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훌륭한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다)인 《어쩌다 유교걸》은 김고은이 페미니스트-비건이자 유교걸이라는, 얼핏 모순되는 두 정체성을 끌어안기까지의 좌충우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유교맨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던, 그러니까 피식자에 가까웠던 나와 달리 김고은은 구태여 유교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총명하고,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냈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을 자퇴했다. 아마 그가 조금만 덜 정의롭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중학생 시절 꿈인 변호사가 되어 억대연봉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교는 그런 '알파걸' 김고은에게 (아마도) 처음으로 당혹감과 난감함을 알려준 존재였다. 그는 제도권 바깥의 인문학 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와 길드다에서 처음으로 동양 고전 공부에 도전하지만, 꽤 오랜 시간 '열등생'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가 유교를 다시 보게 된 청소나 식사처럼, 일상을 꾸리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다. 그때부터 김고은에게 유교란 이해할 수 없는 골동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텍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김고은이 유교의 가치와 쓸모를 증명하는 방식은 어쩌면 지극히 고전적이다. 그는 유교를 둘러싼 후대의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자고, 공자가 《논어》를 처음 썼을 때의 역사적 맥락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공자께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 OOO(여기엔 주로 주자학이 들어간다)이 오염시킨 유교를 원래의 '올바른' 모습으로 복원해야 해!!"는 정약용, 오규 소라이, 캉유웨이 등 유교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들이 즐겨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유교의 역사란 곧 주석의 역사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김고은은 의식했건 그렇지 않건 선배들의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유교걸》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져왔고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진짜' 유교란 이런 것이라 주장하는 주석서일 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고은이 유교에 단 주석이 퍽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의 충(忠)으로부터 자기 배려를, 서(恕)로부터 관계성을, 예(禮)로부터 리추얼을 이끌어낸다. 가부장적, 억압적, 봉건적 등 온갖 나쁜 수식어는 다 붙는 우교를 가장 급진적으로 전유코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유교를 구원하려는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 김고은이 발딛고 선 또 하나의 지반인 페미니즘을, 거꾸로 유교를 통해 구원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기실 김고은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온 사람이다. 비단 또래 여성이나 비인간동물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썩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기성세대와도 대화를 거듭하며 이해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고민과 노력을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들 너무나도 손쉽게 손절과 혐오를 말하고, 어느 진영에 서있든 내가 낸 돈만큼 무언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소비자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김고은은 유교를 통해 관계와 연대의 가치를 복원하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의 연속에 가깝다. 《어쩌다 유교걸》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불협화음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김고은은 유교와 페미니즘을 함께 가져가는 길이,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의례를 통해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를 통해 가장 '앞선'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으며, 이를 위한 고군분투를 이 얇은 책에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김고은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왜 '굳이' 유교여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뚜렷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오늘날 우리의 의식세계는 명료한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그가 책에서 인용한《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나 《숲은 생각한다》를 구태여 유교라는 필터를 거쳐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이미 서양철학에도 있는 이야기를 왜 유교에서 끌어와야 하는지 질문할 수도 있다.

김고은은 이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유교는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잠들어 있다는, 빤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는 주장을 끌어오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는 유교의 '낯설음'이 재밌다고, 이를 통해 자신의 현장에서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고 싶다고 말이다. 유교맨을 자부하면서도, 나는 유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김고은도 이런 거창한 목표를 꿈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교의 '낯설음'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 바꾸고자 하는 그의 도전은 존경과 애정의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유교에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라는 새로운 주석을 달고자 하는 김고은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앞으로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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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간 -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
김종철 지음 / 진실의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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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세계 사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 야만의 시간


최근 한국사 연구의 트렌드는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역사학이다. 국민국가를 당연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방법론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네이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흐름이다. 현대사는 아마도 고대사와 더불어 트랜스내셔널한접근이 가장 활발한 시대일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현대란 어떤 나라도 외따로 존재할 수는 없는,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나 국제기구, 기업 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니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사 연구에서 민족이란 더 이상 유의미한 변수가 아니게 된 걸까? 그렇진 않다. 방법론, 다시 말해 역사를 이해하는 틀로서 의미가 없어졌을 뿐 트랜스내셔널한현대사회에서도 네이션은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이젠 “2민족 2국가란 얘기도 나오지만)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민국가와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나뉜 코리아라면 더더욱. 한국 현대사는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굉장히 글로벌하게이뤄졌다는 점에서, ‘네이션트랜스내셔널은 상충하기보다는 오히려 함께 간다고 봐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김종철의 야만의 시간역시 민단계 재일코리안 사회단체인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50년사를 통해 네이션트랜스내셔널이 복잡하게 얽힌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지은이는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혀 무고한 사람들이 숱하게 고통 받고 오늘날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아픈 현실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의식을 보다 잘 나타내는 말은, 제목보다는 뒤표지에 적힌 대한민국 국민은 한통련에 큰 빚을 지고 있다에 가깝다. 한통련은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그로 인해 말 못할 고초를 겪었으나, 아직까지 대한민국 국민은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한통련은 그 탄생부터 한국 현대 정치사와 밀접히 얽혀있다. 한통련의 기원 중 하나인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부터가 4·19혁명에 큰 자극을 받아 “4월혁명의 이념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아 그 이념을 실천해가는 조직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또 다른 기원인 유지간담회역시 5·16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며 민단의 여당화를 꾀한 단장 권일에 맞서 김재화와 배동호가 주축이 돼 결성한 민단 내 개혁파였다. 이들은 한국 내 학생운동 세력 및 야당과 연대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이는 등 민단과 한국의 민주화를 나눠서 생각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찬반과 맞물린 민단 내 대립은 1967년 한국 총선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공화당이 권일을 전국구 의원으로 공천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민당의 유진산은 김재화를 공천하겠다 약속했는데, 유지간담회가 신민당에 보낸 4,000만 엔을 정보부가 총련의 공작 자금으로 몰고 간 것이다. 급기야 1971년 민단 정기대회에서 정보부는 사실상 조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녹음테이프를 근거로 유지간담회 측이 조총련과 함께 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단장 선거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결국 197277일 민단 중앙은 유지간담회의 거점인 민단 도쿄본부와 한청, 한학동을 민단 와해를 기도하는 불순분자로 규정하며 산하단체에서 제외했다.

 

갈 곳을 잃은 ()민단 개혁파는, 역시 박정희 정부에 의해 해외를 떠도는 망명객이 된 김대중을 만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73321일 김대중의 하코네 연설을 계기로 이들은 민단과 한국의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의기투합했다. 당시 7·4남북공동성명의 여파로 재일코리안 사회에서도 민단과 총련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민단 개혁파는 총련과 선을 긋고 선민주 후통일을 분명히 해달라는 김대중의 요구를 수용하면서까지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한통련의 전신) 일본지부 결성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이 납치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민단 개혁파는 일본 시민사회에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나 자작극이 아닌 박정희 정부에 의해 벌어졌다고 호소하며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한민통은 김대중 구출운동의 중심이 됨으로써 일본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을 한국 민주화운동의 얼굴로 부각시킬 수 있었다.

 

김대중과의 만남은, 그러나 한민통에겐 크나큰 시련이기도 했다. 김대중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군사정권은 그가 의장을 맡았던 한민통에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을 찍었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의 차별에 낙담해 고국을 찾은 재일코리안 청년들을 간첩으로 몰아갔고, 이들과 별다른 접점도 없던 한민통은 보안사에 의해 총련의 지령을 받고 한국에 간첩을 파견한 반국가단체로 탈바꿈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김대중을 사형시키기 위해 그의 한민통 의장 경력을 국가보안법에 따른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로 둔갑시켰다.

 

이는 김대중 개인에게도 큰 불행이었지만, 한민통에게도 그만큼의 비극이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규정됨으로써 한민통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도 여러 차별과 제약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입국도, 투표도 할 수 없는 한통련 의장 손형근, 한국전쟁 당시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출전했음에도 한민통 활동 경력 탓에 보훈보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된 곽동의, 한통련 회원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이어오던 거래처마저 빼앗긴 허경민은 한통련(한민통은 1989년 한통련으로 개편)에 새겨진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이처럼 한통련(한민통)50년 역사는 한국의 국가폭력,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 한통련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물론 한통련의 목표가 오로지 한국의 민주화였던 것만은 아니다. 야만의 시간에서 가장 가슴 벅찬 대목 중 하나인, “보통의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오사카의 재일코리안 고등학생 김창오가 의식화되는 순간은 이를 잘 보여준다. 평범한 고등학생답게 멋 내기에만 관심이 있던 그는 도쿄 우에노공원의 판다를 보여준다는 형의 꼬임에 따라간 한청 집회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김종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제가 아는 조선 사람은 가난한 집에 살면서 육체노동을 하고 술 취해서 집에 오면 부인과 아이들을 때리는 그런 가난하고 야만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 인상밖에 없었는데, 거기 모인 동포들이 당당하게 자기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걸 보고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는 한청에 가입했죠.”(p.209.)

 

김창오에게 한청이란 단순히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그동안 부끄럽게 여기던 조선/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나아가 조선/한국인으로서 일본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목소리를 내며 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지원이라는 대의와 일본사회 내 마이너리티로서 재일코리안의 존엄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서로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재일조선인(그는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3세 역사학자인 정영환이 재일코리안을 의도적으로 민족과 떨어뜨려 서술하려는 최근의 연구경향과 거리를 두며, 이들에게 조국에 대한 공헌과 외국인으로서 권리 획득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지적한 것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한통련(한민통)50년 역사가 전적으로 민족이란 틀 안에 갇히는 것은 아니다. 기실 한통련(한민통)눈부신 성과는 국제사회의 연대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민통은 윤이상의 소개로 1977년 도쿄에서 열리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 정상회담에 참석한 빌리 브란트를 만났고, 그에게 한국 민주화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듬해 6월 본과 런던에서 열린 한국 민주화에 대한 국제회의는 그 결실이었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 19806월 오슬로에서 열린 간사회에 한민통을 공식 옵서버로 초청한 것 역시 그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한민통이 주최하지는 않았지만,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일본연락회의가 주도한 집회에 일본 시민 17000여 명이 참가해 김대중의 석방을 외치기도 했다. 김대중의 1심 선고가 있던 날 전일본국철노동조합은 일본의 모든 기차역에서 항의의 기적을 울렸으며, 전일본항만노동조합도 일본의 모든 항구에서 한국 선박의 선적과 짐 내리기를 거부했다. 김종철의 말마따나 이웃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한 나라의 시민이 이처럼 깊이 연대투쟁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p.235.)

 

요컨대 한통련(한민통), 나아가 한국 현대사는 전적으로 내셔널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트랜스내셔널하지도않다. 같은 민족을 뿌리로 삼는 두 개의 국민국가, 그리고 해외의 여러 디아스포라 공동체에게 민족이란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이었으며, 이를 둘러싼 협력과 경쟁이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앞서 이야기했듯 애초에 한국 현대사의 트랜스내셔널한교류 대부분이 네이션을 매개로 이뤄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정말로 다른네이션들이 미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만큼 한국 현대사를 이해할 때는 민족과 세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진부한 얘기지만) 양자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문제의식과 시선이 필요하다. 지은이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야만의 시간은 내게 그런 한국 현대사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한 책처럼 읽힌다. 나 같은 얼치기 역사학도의 기를 죽이는, 기자의 취재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촘촘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선생님께선 늘 역사학도가 기자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더랬다.) 재일코리안 연구는 물론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연구할 때도 중요하게 언급될 이 책을, 역사문제연구역사학연구, 역사비평같은 훌륭한 학술지에서 다뤄주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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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총서 142
이상록 지음 /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대의제, 근대화, 국민주권, 그 너머의 민주주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

지금은 아닌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87년 이후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자 거스를 수 없는 당위로 자리 잡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간단하다, 교과서를 보면 된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만 펼쳐도 1960년 4.19를 거쳐 1980년 5.18에서 좌절했다 1987년 6.29로 '완성되는' 민주주의의 승리서사를 찾을 수 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도식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역사가 경전(canon)화 되었다는 증거다.

흥미로운 점은, 교과서에서 민주화(운동)의 단초를 언제나 선거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사실이다. 4.19는 '역사적인' 3.15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6.29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고 말이다. 교과서의 도식에 따르면 한국 민주화운동사는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제대로 된 선거 하나를 위해 고군분투해온 납작한 역사로 쪼그라들고 만다.

물론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나 대의제만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촛불시위마다 등장하는 구호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알 수 있듯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국민의 뜻을 무시할 때 이에 저항하는 명분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때의 민주주의란 국민의 "총의" 혹은 "주권"이다. 그런가 하면 민주주의는 산업화와 더불어 한국(만)이 이뤄낸 자랑스런 성과이자, 나머지 아시아(여기엔 때때로 일본까지 포함된다!)보다 '앞서' 있다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요컨대, 한국의 민주주의란 기능적으로는 대의제요, 실질적으로는 국민주권이며, 수사적으로는 선진 혹은 근대인 셈이다.

이상록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이하 《자유민주주의》)는 이처럼 대의제, 국민주권, 근대(화)로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기원을 찾아나선다.《사상계》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이를 매개로 삼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비평"처럼 느껴지는 이 책은, 지은이 이상록의 조금은 재밌는 이력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고전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퍽 독특한 지성사 연구서로 거듭났다.

우선 이상록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중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마지막 학술적 논쟁인 2000년대 중반 "대중독재 논쟁"의 메인 플레이어였다. 나는 갓 박사를 수료한 30대 초반의 연구자였던 그가 논쟁의 다른 쪽 당사자인 조희연을 조목조목 매섭게 몰아붙인 글을 잊지 못한다. (정작 나중에 만나본 이상록은, 적어도 내가 이야기를 나눈 역사가 중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인품의 소유자여서 적잖이 놀랐지만.) 또한 이상록은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책과함께, 2006)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창비, 2016)에 공저자로 참여한, 한국사에 일상사와 생활문화사의 시각을 선구적으로 도입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개성이 맞물려 《자유민주주의》의 텍스트 비평은 도발적이면서도 깊이가 있으며, 지성사 연구가 자칫 빠지기 쉬운 공허한 관념론에 머물지 않고 사상과 현실의 낙차를 민감하게 의식한다. 고전적이면서도 독특한 지성사란 이런 의미다.

이 책에 대한 호의 가득한 서평을 쓴 한봉석의 말마따나 이상록은 얼핏 "백과전서"라 느껴질 정도로 풍부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사상계》지식인의 자유민주주의론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첫째, "대의제"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최근에는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창비, 2023.) 대의제란 명백히 귀족정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그렇기에 김민철은 현대 자유민주주의란 기실 "선거자유주의"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사상계》지식인들은 대의제를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한국 국민의 낮은 "민도"에 대한 이들의 한탄이나 4.19를 학생과 지식인이 주도한 시민혁명으로 포장하려는 노력 역시 인민에겐 대표가 필요하다는 신념, 즉 대의제에 대한 믿음의 소산이었다.

둘째, "국민주권"이다. 이상록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정치사상사 연구자 문지영이 《지배와 저항》(후마니타스, 2011.)에서 이야기했듯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누리는 주체를 "국민"이나 "민족"처럼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했다.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이 들어설 자리는, 적어도 《사상계》 지식인의 민주주의론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무척 좁았다. 물론 "국민주권"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론은 6.3항쟁에서처럼 박정희 정부가 국민의 뜻을 무시했을 경우 강력한 투쟁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박정희 정부가 "국민주권"을 내세워 유신을 단행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는 다분히 양가적인 것이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대중독재" 연구자로서 이상록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셋째, "근대화"다. 봉건과 정체, 낙후로부터의 탈피는 (그것이 정당했는가와는 별개로)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만큼, 《사상계》 지식인들은 근대(화)라는 문제를 민감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화가 민주화에 선행한다고 여기든, 산업화와 민주화를 병행할 수 있다고 여기든 이들은 결코 산업이나 발전, 근대를 의식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를 상상하지 못했다. 《사상계》지식인 사이에서도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여기는 입장과 목적으로 여기는 입장이 공존했지만, 결국 근대라는 최종심급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상계》 지식인"이면서도 이러한 흐름에서 빗겨난 인물이 있다. 바로 함석헌이다. 역시《사상계》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고 이 책에 대한 애정어린 서평을 쓴 김건우가 예리하게 지적했듯, 함석헌에 대한 이상록의 관심은 어딘가 독특한 구석이 있다. 책의 저본이 된 박사논문에서는 따로 하나의 장을 마련했고 이 책에서는 본문 곳곳에 흩뿌렸다는 차이는 있지만, 김건우의 말마따나 "무리를 무릅쓰고서라도 함석헌의 비중을 도드라지게 서술"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김건우, <《사상계》를 연구하려는 이들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문>, 《역사비평》132, 2020, p.402.)

아닌 게 아니라 함석헌에 대한 이상록의 시선은 굉장히 따뜻하면도, 동시에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다. 함석헌은 장준하를 비롯한 다른 《사상계》 지식인들과 달리 개발/발전/근대로 수렴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 사상가지만, 그의 "민중"이란 실제 역사에 기반하지 않은 다분히 종교적인 개념이었다. 그런 만큼 현실의 민중이 함석헌의 기대와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 자칫 (다른 《사상계》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민도"나 탓하며 이들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돌아설 위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신체제보다 더 강력한 "대중독재"의 가능성도 열어 놓고 있었다.

함석헌이라는 여러 모로 '튀는' 인물이 가진 빛과 그림자를 이상록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글의 통일성을 깨뜨리면서까지 함석헌을 조명하는 이유는, 추측컨대 《사상계》바깥의, "자유"가 붙지 않는 "민주주의"로 나아갈 연결고리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김건우는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저자와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지 궁금하다.)

한봉석과 김건우 모두 이아기했듯 《자유민주주의》는 2011년에 나온 이상록의 박사논문을 저본으로 한다. 박사논문을 내고 이를 토대로 책을 내기까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이상록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의제, 국민주권, 근대화로 수렴하지 않는 또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왔다. 선출된 대표 없이 인민이 스스로를 통치하고,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집합적 주체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며, 근대의 개발주의와 발전주의를 문제시하는 민주주의란, 곧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이상록의 "일상사 연구자"로서의 면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인, 4.19 직후 인민이 학생과 지식인의 '지도'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간 과정은 그 점에서 퍽 의미심장하다. 이상록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어쩌면 이 작은 저항과 전유의 조각들이 아니었을까.

이상록은 시종일관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선이 아니며,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자행된 부조리와 폭력 역시 직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민주주의를 대의제, 국민주권, 근대화라는 속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젖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옛날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민주주의 일병 구하기"랄까. 그리고 그는 이미 또 한 권의 두툼한 단독 저서를 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연구를 숱하게 쌓아놓았다. 한국 현대 지성사 연구자에게는 든든한 밑천이자, 두려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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