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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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는 쿤데라의 책이다. 처음으로 읽은 건 <농담>인데 꽤 인상 깊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왜 작가의 다른 저서를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3년 뒤인 2024년이 되어서야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훗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한 고독한 시인, 그 유약한 남자의 일대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지체없이 앞서 말한 시인 (혹은 유약한 남자) 야로밀을 이야기하겠지만, 이 소설에는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그의 어머니다. 실제로 이 책의 첫 장은 어머니의 심리에 깊숙이 천착하여 전개된다. 물론 신생아의 심리를 묘사할 순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소설의 첫 장을 장식하는 것이 야로밀이 아닌 어머니의 내적 독백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야로밀은 유약하다. 소설 속 모든 유약함은 야로밀과 상관된다. 야로밀과 유약함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이 둘은 긴밀하게 붙어 있다. 그의 유약함은 소설 속에서 두 가지 구체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자신의 (내적, 외적) 어리숙함에 대한 콤플렉스로, 둘째는 고통으로 가득 찬 외부로부터 결국 자신의 내면세계로 도피하는 연약함으로.

야로밀은 언제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전 준비가 없다면 그는 거의 모든 행동을 삐걱댄다. 이는 그가 지나치게 생각하고 계산하고 재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에 잘 적응하고 녹아드는 사람은 야로밀과 같이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당히 생각하고 적당히 계산하며 적당히 넘긴다. 그러나 야로밀의 타고난 기질은 이러한 적당함을 거부하며 언제나 도를 넘어서고 만다.

이러한 그의 섬세한, 아니 섬약한 기질과 시인으로서의 소질은 아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그런 점에서 야로밀의 태도는 다소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야로밀은 자신이 가진 것 중 시적 재능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남자다움을 무엇보다 바라 마지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자다움이란 앞서 말한 적당함, 자연스러움, 사회에 대한 적응성과 연관된다. 즉 자신의 섬약함, 그 지나침과 부자연스러움과 부적응성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그는 자신의 유약함을 혐오하는 동시에 거기서 비롯된 자신의 시적 재능을 사랑한다. 야로밀의 인생은 이러한 두 가지 극단 — 유약함과 남자다움 — 사이의 긴장이다. 물론 그는 거의 언제나 유약함이라는 극단에 머물러 있으며 그가 다른 극단에 머물러 있는 것은 대개 자신의 상상 속에서다 — 이 또한 그의 유약함의 증거이다. 그는 유약하다.

야로밀은 기본적으로 특이한 인물에 해당하지만 문학에 한한다면 그렇게 특이하지만도 않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 <생의 이면>의 박부길처럼 문학 작품에서 유약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 캐릭터는 거의 클리셰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야로밀과 같은 섬약한 소년 캐릭터, 그것도 천재적인 시적 재능을 물고 난 캐릭터는 드물다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야로밀의 어머니와 같은 인물은 현실에서 비교적 찾아보기 쉽다. 자신 삶의 모든 희망과 의미, 의의를 아들에게 전가하는 다소 부담스럽고 안쓰러운 어머니. 이는 문학 작품 바깥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어머니상이다.

표지 뒷면에 적힌 작품 소개엔 그녀가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어머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녀의 사랑을 지나친 집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야로밀의 어머니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그녀와 같은 행동을 하고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과연 그녀의 사랑이 특별히 지나치고 집착적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순수하게 누군가를 위하는 삶이 곧 사랑하는 삶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할 수는 있으나 순수할 수는 없다. 우리의 위함은 우리 자신을 배제하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야로밀이 어머니에게 잠시나마 분노를 느끼고 그녀의 억압에 반발심을 가진 것과 어머니가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야로밀에게 화가 난 것은 그들 사랑의 비-순수성에서 기인한다. 야로밀은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에게 상찬받는) 자신의 시적 재능과 일시적인 남자다움을 자부심 삼아 살았고 그의 어머니는 야로밀에게 투영된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은 채 살았다. 그들의 자부심은 서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나 그것이 서로를 순수히 위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좇은 건 결국 그들 자신의 욕망이다.

이러한 소통 불가능성, 단절의 테마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자기 자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주제는 어머니 대 아들이라는 협소한 범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이라는 광대한 범주로 뻗어나간다. 이러한 확장은 시인의 죽음을 다루는 마지막 장의 바로 전 장인 6장에서 최고조로 두드러진다. 6장은 2장과 같이 야로밀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 장이다. 6장의 화자는 여태껏 등장한 적 없는 40대 남성이며 곧이어 그의 정체가 야로밀의 여자 친구인 빨간 머리의 바람 상대임이 드러난다.

이전까지의 챕터에서 그녀는 철저히 야로밀의 시선과 관점에 의해 한 차례 가공되어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야로밀의 거대한 자의식 탓인지 우리 인간의 보편적 한계 때문인지 소설 속에 묘사되는 그녀는 빨간 머리, 못생기고 투박한 얼굴, 수다스러움과 관능 등 몇 가지 특징으로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는 단순한 캐릭터로 다가왔지, 야로밀처럼 생각하고 갈등하기도 하는 실제적인 인간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6장에선 상황이 역전된다. 이전까지 야로밀이 서 있던 전면에는 빨간 머리 그녀가 서고 야로밀은 빨간 머리가 있던 후면으로 옮겨진다. 이번엔 빨간 머리와 40대 남자의 입장에서 야로밀은 철저한 타자가 된다. 이는 야로밀의 죽음이 알려지는 장면에서, 미미한 애도의 기색조차 없는 두어 마디의 말로 그의 죽음이 건조하게 전달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의 자리에 선 빨간 머리는 놀랍게도 ‘생각’한다. 야로밀이 하자면 하고 하지 말라면 말았던, 의사 표현이라고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가 이번에는 야로밀과 동일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오빠의 이민이 교묘하게 짜인 거짓말이었고 유일한 사랑처럼 이야기하더니 이미 바람을 피우고 있던 그녀의 과오는 잠시 차치하여 두자. 중요한 것은 이 장에서만큼은 그녀가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이 이질적인 장으로부터 작가가 보여주려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생각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따라서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라고.

초반부는 흥미로웠고 중반부는 꺼려졌고 후반부는 몰입했다. 중반부를 꺼린 이유는 아마 야로밀의 유약함과 어수룩함이 너무나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어 공감성 수치(?)로 인해 읽기가 괴로웠던 탓일 거다. 하지만 야로밀의 처지가 조금씩 나아지자 불편함이 다소 사그라들었고 이미 그의 성격에 적응도 했거니와 이야기도 막 재밌어지는 참이라 몰입할 수 있었다. 특유의 끈적끈적한 느낌은 여전히 기분 나쁘지만 어쨌거나 즐거운 독서였다. 그리고 쿤데라가 거장이라 불리는 이유라던가 유력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에 관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비록 야로밀과 그의 어머니를 초점 화자로 두었지만 이 소설의 기본 세팅은 삼인칭이다. 즉 야로밀과 어머니의 목소리 외에도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화자라는 제3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목소리다. 마치 물 흐르듯 사건과 사건 사이를 연결하는 유려한, 다소 능글맞고 끈적하지만 재치와 매력을 부정하기 어려운 그 신들린 말솜씨. 그것은 틀림없는 거장의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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