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 1792년 만인소운동 조선사의 현장으로 2
이상호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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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정치의 붕괴와 사회의 탄생: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정조의 눈물, 그 안에 담긴 복잡한 셈법

 

1792년 윤 427,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영남 유생 만 명이 언명한, 길이 100미터에 무게 10kg 전후의 상소를 읽고 난 뒤였다. 영남 유생을 대표해 상소를 올린 류이좌는 감히 용안을 보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박식했고 이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으며, 철두철미한 논리와 음흉한 뒷공작으로 노회한 대신들도 주머니 속 떡처럼 주무르던 희대의 마키아벨리스트, 조선의 지존이 시골 선비 앞에서 울고 있었다.

 

영남 유생 만 명이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청하며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고, 정조가 이에 눈물로 화답한 1792년 만인소운동은 분명 대단한 사건이었다. 비록 이후 대단한 변화는 없었을지언정 시골 선비들이 합세해 중앙에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어느 정도 먹혔다는 사실은 당대에도, 오늘날에도 세간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다. 다만 이는 보잘 것 없는 촌부들의 요구에 왕이 따뜻하게 화답한,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움직인 사건은 결코 선한 마음과 올곧은 의지만으로 가능하진 않으니 말이다.

 

이상호의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1792년 만인소운동의 전말을 꼼꼼하게 추적함으로써 정조의 눈물에 담긴 복잡한 내막을 읽어낸다. 산골짜기 영남의 선비들은 어떻게 뜻을 모아 공동행동에 나설 수 있었는가? 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으며, 누가 뒷배가 되어주었는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똑똑했으며 자존심도 강했던 정조는 왜 눈물을 보였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었나? 이 모든 질문들을 종합하면, 어렴풋하게나마 하나의 답이 나온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조선 특유의 공론정치가 가장 원숙한 단계에 이른 그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경향분기와 붕당정치, ‘모두모두가 아니게 될 때

 

지은이인 이상호를 비롯해 책을 소개한 여러 기사들은 조선시대 공론정치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공론이란 여러 사람들이 토론과 심의를 거쳐 만들어낸 하나의 주장인 만큼, 그 성격이 민주주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과연 절차적 정당성에 근거해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체제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확실히 해둘 게 있다. 공론이란 모두의 의견이 아니라 옳은 의견이다. 김경래나 김인걸 등이 지적하듯이, 공론은 천리를 구현하는 의론으로 일종의 공공선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만일 공론정치와 유사성을 논할 수 있는 서구 정치체제 혹은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그랬기에 공공선인 공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다수의 동의는 필요치 않았다. 물론 모두의 의견옳은 의견이 언제나 상충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옳은 의견을 공유하면 되니 말이다. 꿈같은 얘기처럼 들리지만 조선 역사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림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고 대간이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른 16세기가 되면 양반 엘리트 사이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이게 공론이란 인식이 자리 잡는다.

 

모두의 의견옳은 의견이 될 수 있었던 건 이때의 모두가 신분적, 경제적으로 일정한 동질성을 가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니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고, 먹고사는 문제는 괄호 안에 둔 채 우아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일부 남성만이 동등한 시민으로 나랏일을 논했던 고대 아테네처럼, 16세기 조선의 양반 엘리트 역시 대충 공론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세련된 문치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정치가 우아하고 품격을 갖췄다는 얘기는, 어쩌면 정치가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모두의 의견옳은 의견사이의 행복한 동행은, 그러나 오래 갈 수 없었다. 양란의 혼란을 거치고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모두모두가 아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도 않았던 모두를 갈라놓은 첫 번째 요인은 서울과 지방의 현격한 격차, 곧 경향분기다. 수도 한성은 온갖 재화가 쏠리며 번영을 구가하고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반면, 지방은 점차 소외되고 고립되어갔다. 양반 엘리트가 나라를 나라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였던 과거조차 서울과 경기에 대대로 거주하는 명문가인 경화거족의 독점이 두드러졌다.

 

서울과 지방의 차이는 심지어 당색마저 봉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같은 남인이라 해도 근기남인인 정약용은 과감하게 이황이 아닌 이이가 옳다고 주장하는가하면 먼 옛날 원시유학에 흥미를 보이고, (논란이 있지만) 한때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반면 영남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컬트 집단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오늘날의 수도권 집중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서울과 지방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약용은 말할 것도 없고, 영남 남인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실상 장본인인 채제공조차 이들을 자신의 동류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모두가 아니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은 극에 달한 붕당 간의 대립이었다. 본래 성리학은 복수 당파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미 자유주의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간파한 칼 슈미트가 이죽거렸듯,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여러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 의회정치에서도 무척이나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단 하나의 옳은 의견이 존재한다고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했듯 당파마다 자신만이 옳은 의견이라 주장하며 상대 당파를 향해 잘못된 의견’, 심지어는 나쁜 의견이라 낙인찍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렇게 숙종과 경종의 치세를 거치며 극에 달한 당쟁은 상대 당파를 (물리적으로) 절멸시키려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모든 갈등의 중재자이자 지고의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었던 왕조차 붕당의 대립을 중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아예 당파별로 지지하는 왕위 계승 후보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른바 탕평의 시대라 여겨지는 영조와 정조의 치세에도 붕당 간의 갈등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붕당의 입장에 따라 역사를 다르게 기술하는 당론서가 조선이 망하는 19세기 말까지 널리 쓰이고 읽혔다는 사실은 분열된 모두가 저마다 옳은 의견을 내세울 때 갈등의 골이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마다의 동상이몽’, 실패한 약속대련

 

18세기의 두 위대한 군주였던 영조와 정조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 사실상 왕밖에 없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민하고 노회했을, 그리고 그만큼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두 왕이 택한 건 일종의 투 트랙전략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단순히 서로 싸우지 말고 좋게 좋게 가자는 얘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탕평이란 붕당의 논리와 의리보다 한 차원 높은 논리와 의리를 제시하는, 다시 말해 왕이 나서 ‘옳은 의견의 표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조선 역사에서 손꼽히는 공부벌레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물론 논리와 의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다면 더더욱. 그랬기에 영조와 정조는 이성에 호소하는 첫 번째 전략만큼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두 번째 전략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영조는 조선 역사상 눈물을 가장 정치적으로 활용한 임금이었다. 그는 대신들 앞에서 뻑하면 시위를 벌였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 언제든 눈물 밸브를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누가 왕의 땡깡을 이길 수 있겠는가?) 동시에 영조는 백성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자신이야말로 조선의 유일한 지존이요, 갈등의 조정자임을 과시하곤 했다. 속된 말로 말 안 듣는 너희 신하들 제끼고 언제든 백성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이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 역시 정치에서 퍼포먼스가 갖는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화성 행차를 통해 눈물과 백성과의 직접 접촉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합했다. 화성에 가는 정조의 행차는 웅장하고 화려해 왕의 위엄을 만백성에게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화성에 도착하면 그는 친부 사도세자의 묘 앞에서 눈물을 쏟고는 했다. 조선에서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인 를 과시한 것이다. 정순왕후가 결사반대했고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병가(兵家)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한다며 비판했던, 강화도에 유배된 이복동생 은언군과의 은밀한 상봉 역시 감성을 공략한 퍼포먼스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정조는 서학과 더불어 강화도에 관한 일은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이처럼 서울과 지방이 갈라지고, 붕당의 대립이 극심해지며, 이를 봉합하려는 왕의 근심이 깊어가는 가운데 공교롭게발생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우연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듯 만인소운동은 어느 정도 기획된, 구체적으로 정조와 채제공의 의중이 반영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만인소운동이란 사실상 정조의 사주를 받은 관제동원에 가까웠다고까지 말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도 최소한 약속대련의 성격을 적잖이 갖고 있었다고는 봐야할 것 같다.

 

문제는 약속대련에 임한 당사자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까지 올라온 영남 남인이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 정조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을 터다. 임금이 더 이상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공맹이 나고 자란 추로지향(鄒魯之鄕)을 자부하는 영남 선비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천거의 형태로 영남 남인들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반면 조정을 이끄는 정승이자 서울 남인들의 영수였던 채제공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실 자신과 동류라 여기지도 않았을) 영남 남인을 지렛대 삼아 중앙 정계의 판을 뒤집고, 궁극적으로는 노론의 단죄와 남인의 집권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인만이 아닌, 노론을 포함한 사대부 전체와 만백성의 임금이 되고자 했다. 궁극적인 목표였던 친부의 신원 역시 당색을 초월해 모두의 동의 아래 이뤄져야 했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이를 위한 중요한 포석이요, 요즘 말로 하면 빌드업이었다. 정조가 상소에 감읍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영남 남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시골 선비들이 나라를 생각해 들고 일어나다니, 나 감동받았다!”를 어필하면서 사도세자 신원의 명분을 쌓는 동시에, 만인소운동이 조정을 뒤흔들거나 환국을 초래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요컨대, 1792년 만인소운동이란 영남 남인과 채제공, 정조 모두 약속대련인 줄 알고 임했으나 한 합씩 겨뤄보곤 , 이게 아니네?”하며 물러난 사건이었다. 영남 남인은 왕이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라며 립서비스를 날려줄지언정 지역차별 해소, 구체적으로 영남 선비 등용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채제공은 (이후 보다 확실히 깨닫게 되지만) 숙종 이래 유구한 환국의 방식으로 남인의 집권을 실현할 수는 없음을 직감했다. 정조 역시 임금이 나서 노론과 소론, 남인의 당론을 조정하고, 이성과 감성을 내세워 모두의 동의 아래 사도세자의 신원을 이루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만인소운동은 누구에게도 만족스런 성과를 안기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영남 남인은 사실상 빈손으로 고향에 내려갔고, 채제공은 죽을 때까지 자신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노론과 불안한 동거를 이어갔으며, 정조는 퇴위 후 화성에서 선왕으로서 신원을 이루겠다는 염원을 실현할 새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 18세기 말의 조선은 옳은 의견모두의 의견으로 끌어올리기엔 지나치게 분열된 상황이었다. ‘약속대련에 임한 영남 남인과 채제공, 정조가 이랬을진대 노론이나 소론, 당시 급속히 늘어나던 천주교 신자들은 어땠겠는가. 만인소운동의 실패는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왜 사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1792년 만인소운동은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던, 이미 모두모두가 아니게 된 시대에 모두가 인정하는 옳은 의견을 만들어보겠다던 돈키호테적 망상에 불과할까? 그렇지는 않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들여다보면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만인소운동의 새로운 면모, 나아가 당시 조선사회의 성취가 드러난다. 그것이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의 진가이기도 하다.

 

이미 책에 대한 흥미로운 서평을 쓴 장지연의 말마따나, 1792년 만인소운동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조직을 만들고 유지·관리하는 영남 남인들의 힘이다. 이들은 사간원 정언이자 노론이었던 류성한이 임금께서 사도세자를 생각하느라 목이 메어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상소를 올려 조정이 벌집이 되기가 무섭게 삼계서원을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했다. 410일 열린 도회에서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영남의 주요 서원에서 명첩과 경비를 보내왔고, 대표단은 윤 418~19일에 영남을 떠나 닷새 만에 한성에 도착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1792년 만인소운동은 당시까지 금기시되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던 만큼 남인으로서는 자칫 노론에 의해 역적으로 몰릴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류성한을 처벌하라는 중앙의 여론이 식기 전에 한성에 도착해야 했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이름을 올려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최대한 신속하게 상소를 올려야만 했다. 이를 감안해도 영남 남인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 이렇게나 빠르게 한성까지 갈 수 있었다는 건 이들이 그만큼 탄탄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거다.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이 주먹구구, 얼렁뚱땅 이뤄진 게 아니라 영남의 여러 서원들은 물론 한성에 거주하던 영남 출신 선비들과의 지속적인 토론과 합의를 거쳐 절차적으로 완벽하게진행되었다.

 

1792년 만인소운동이 보여준 영남 남인의 신속함과 조직력, 그리고 (절차적) 합리성은 조선시대 사회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간 조선의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상상은 어딘가 미진하고 낙후했으며, 심하게 말하면 사회랄 게 없었다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추상적인 화폐에 의해 매개되는 전국시장도 존재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인쇄문화는 형편없었으며,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으며 공론장을 형성할 무대인 도시 역시 한성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요컨대, 18세기 조선은 서구식 시민사회와 비슷하기라도 한 요소를 찾아보려야 찾아보기 힘들었던 곳이었다. 그간 중국과 달리 조선을 대상으로 시민사회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1792년 만인소운동은, 비록 그 형태는 서구와 상당히 달랐을지언정 조선에도 사회가 존재했으며, 심지어 꽤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남 선비들은 서원과 문중을 매개로 촘촘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고, 중앙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에 기민하게 반응해 하나의 입장을 정해 대표자를 한성까지 올려 보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되긴 했지만, 임금이 상소에 감읍해 눈물을 흘리는 등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왜 사회가 아니란 말인가?”

 

지금까지 조선, 나아가 한국사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대부분 강한 국가, 약한 사회로 설명되곤 했다. (정치사상사 연구자 김영민처럼 약한 국가, 약한 사회로 여기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1792년 만인소운동은 조선의 사회가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비록 최종적으로는 국가의 승인을 요구했을지언정 적어도 국가를 상대로 무언가를 요구할 역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19세기에 접어들면 사회는 파편화되어 개인과 문중, 마을만이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소용돌이상태에 놓이지만, 20세기 이후 사회는 다시금 그 힘을 회복해 국가와의 지난한 드잡이에 나서지 않았을까? 특히 식민지배와 군사독재라는, 강한 물리력을 갖췄으나 정당성 부재에 시달리는 국가의 시대에는 더더욱. ‘사회사는 많지만 사회의 역사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에서, 한국식 사회의 기원으로서 만인소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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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선생님의 장인과 닥나무는 생각할수록 훌륭한 책이다. 펼쳐볼 때마다 정말 다양한 각도에서 오밀조밀 뜯어볼 여지가 많다며 감탄하게 되는데, 요새는 우리가 위대한발명과 혁신만큼이나 일상적인유지·보수·관리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대목을 곱씹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내가 조교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다음 학기부터는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조교는 가르침을 보조한다는 뜻에서 알 수 있듯 정말 유지·보수·관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다. 비유하자면, 교수와 학부생, 대학원생, 대학() 행정팀 사이에 적절하게 파이프를 뚫어주는 배관공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사실 조교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난 예나 지금이나 돈 내고 하는 일보다는 돈 받고 하는 일이 훨씬 힘들고, 그런 만큼 대학원생은 직장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조교가 중요한 일이 아니냐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비록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니지만,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가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게끔 여러 방면에서 신경을 쓰며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다른 원생들과도 하는 이야긴데, 조교 일이란 집안일과 비슷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만큼 돌봄노동의 성격도 강하고.

 


생각해보면 내 군생활도 전형적인 유지·보수·관리의 영역에 있었다. 나는 유치원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돌보는 일을 했는데, 비단 돌봄노동뿐 아니라 유치원이라는 조직의 성격상 거의 모든 일을 다 했다. 사실상 유치원 소사 아저씨...같은 존재였는데, 이 역시 적성에 꽤 맞았다. 한 번 쓴 종이를 버리지 않고 북방의 추위를 견디는 겨울 외투로, 가벼운 밥그릇으로, 튼튼한 신발로,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재활용한 조선 사람들처럼 나도 유치원에서 끊임없이 심고, 뽑고, 고치고, 만들고, 붙이고, 쓸고, 돌봤다. 물론 열심히 해도 크게 티가 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조교 일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돌아가게 하는재미가 있었다.

 


오늘 (아주 늦게) 유레카에 서평 원고를 넘긴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역시 일상적 유지·보수·관리의 기예로서 돌봄의 가치에 새롭게 주목한다. 돌봄이란 서로 관계를 맺고, 상대방의 다름을 헤아리며 부족함을 채워주는 일이다. 돌봄이 곧 관계인만큼, 정확히 관계를 맺는 이상 돌봄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돌봄은 곧 삶이나 다름없다. 물론 돌봄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돌봄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두 지은이는 말한다, 지금까지는 돌봄 때문에 일을 못해!”라 말해왔다면 이제는 일 때문에 돌봄을 못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돌봄 때문에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일 때문에 돌봄을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를 연결해주며, 무언가를 돌아가게 하는능력이 지금보다는 훨씬 값지게 여겨지는 사회일 것이다. 대단한 발명이나 혁신만큼이나 일상의 소소한 유지·보수·관리 역시 중요할 테고 말이다. 요새 고민하는 게 바로 이런 시민의 덕목, 혹은 기예로서 돌봄이다. 우리는 인간이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란 말을 너무 자명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러한 사회성/정치성이 마치 자연스레 주어지는 양 착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돌봄, 혹은 유지·보수·관리 역시 적잖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어느 정도는 재능의 영역이기도 하고.

 

기예로서 돌봄을 생각할 때마다 턱턱 걸리는 책이 양승훈 선생님의 울산 디스토피아. (언젠간 꼭 긴 서평을...) 이 책은,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인 것 같지만, 결국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울산 디스토피아는 자기계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간 자기계발의 방식과 대상이 아주 한정적이었다는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간 한국에서 자기계발이 가능했던 집단은 수도권/남성/인서울/화이트칼라뿐이었고, 나머지(비수도권/여성/지방대/블루칼라)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간 자기계발이 일부 집단에게나 겨우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자기계발을 할 수 없었던 나머지 집단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도 큰 비극이다. 이제는 이들 역시 치열하게 자기계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한국의 성장과 번영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산 디스토피아는 수도권/남성/인서울/화이트칼라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기계발을 할 수 있게끔, 다양한 자기계발의 루트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수도권/남성/인서울/화이트칼라가 아닌 나머지의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울산 디스토피아를 읽는 내내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감정은 이대로는 망한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양승훈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간 내버려둔 “6~25의 아이들도 치열하게 자기계발, 혹은 자기착취를 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한국은 곧 중국에게 뒤처지고, 끝내 주저앉고 만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1~5의 아이들만 달달 볶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이는 비단 대한민국뿐 아니라 “6~25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부터 교육은 그들에게 적절한 목표를 준 적이 없고 부족한 점을 채워준 적이 없다.”(양승훈, 6~25등 이야기, 경향신문, 2017. 07. 02.) 자기계발과 자기착취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울산 디스토피아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대로는 망한다!”를 외치고 있으며, 파국에 맞서기 위한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는 돌봄 위기, 나아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돌봄 인프라가 되어 시민의 의무로서 돌봄을 나눠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경제적 생산성이나 효율성은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하고 말이다. 반면 울산 디스토피아는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지속가능한 자기계발 혹은 자기착취의 프로세스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새 비관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어쩌면 한국의 비극은 상충하는 듯 보이는 두 주장 모두 무척이나 맞는 말이라는 데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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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수도권 사람들이 늘 마주하는, 그러나 그 의미가 꼭 같지는 않은 강이다. 나처럼 경부고속도로에서 보낸 시간이 20대의 6분의 1은 될 사람에게 한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한남대교를 건널 때마다 보게 되는 배경이다. 수많은 사람한때 넷상에서 유행했던 인생은 한강뷰 아니면 한강물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는 성공한 인생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반면, 주식이나 코인 등에 실패한 이들이 농반진반 찾는 곳 역시 한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쉬거나 운동하러 한강을 찾지만, 동시에 위압적인 도로들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장지연이 글을 쓰고 전지가 그림을 그린 한강에 살아요는 한강이 가진 다양한 면모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한강 주위에 펼쳐진 모래밭과 여기저기 뻗은 샛강, 이들 사이에 놓인 크고 작은 모래섬이었다. 아마도 나 같은 20~30대는 한강을 오늘날과 같은, 잔잔한 호수의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강의 긴 역사에 비추어보면 극히 최근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드넓은 모래밭과 큰비가 올 때마다 줄기가 달라지는 샛강, 생겼다 사라지곤 하는 모래섬이야말로 한강의 오랜 모습에 가깝다.

 

나 역시 남양주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로부터 당신 어린 시절엔 한강에 백사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여름이면 한강과 왕숙천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한강에 살아요는 결코 이를 낭만적으로 그리지만은 않는다. 모래밭과 샛강, 모래섬은 한강이 그만큼 통제하기 어려운 자연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간은 아주 최근까지도 한강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최근인 1984년과 1990년에도 큰비가 내려 망원동과 고양군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인간이 한강을 비로소 다스릴수 있게 된 건 전두환 시절인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강바닥을 파내고, 강줄기를 직선으로 다듬었다. 물속에는 보를, 물위에는 둑을 만들어 큰비에도 강이 넘치지 않게 했다. 지난 총선 최대 승부처로 떠오른 한강 벨트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는 이처럼 한강이 잠잠해지며 지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혼자 소름이 돋았는데, 88올림픽-한강 치수-중산층 육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게, 각각의 사실들은 알고 있었는데 왜 그걸 하나로 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처럼 1980년대 이후 한강은 우리가 아는 그 모습이 되었지만, 결코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있지만은 않았다. 여의도를 만들기 위해 폭파한 밤섬이 되살아났고, 쓰레기매립장이 된 난지도에 다시 수풀이 자라나며 동물들이 살기 시작했다. 글작가 장지연의 말처럼 자연은 정말 놀랍달까? 내가 사는 동네를 가로지르는 탄천도 매년 강바닥을 파내고, 보를 지었다 철거했다 난리지만, 모래톱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비가 오면 강물이 범람한다.

 

물론 자연의 놀라움은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강의 아름다운 모래밭과 무시무시한 대홍수는 어느 한 쪽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모노노케히메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모노노케히메만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한강에 살아요역시 인간과 자연 어느 한 쪽에 치우진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굉장히 담담하게, 글작가 장지연의 말처럼 사람이 사는 곳의 환경을 바꾸고, 환경이 사람들의 삶을 바꿔낸 역사를 보여준다. “자연의 회복력은 강하고 사람들의 힘도 강하니까요.”라는 책의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풀어낸 글작가 장지연의 내공에도 감탄했지만(구체적인 숫자가 많이 나온 점이 특히 좋았다), 그림작가 전지의 디테일한 그림도(특히 간판!) 무척이나 좋았다. 흥미로운 점은 전지가 지역에 무척이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안양을 배경으로 삼은 자전적 만화인 선명한 거리를 그렸고,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의 문제를 알기 쉽게 풀어내 호평을 받은 어디에서 살까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런 전지 작가인 만큼 디테일이 살아난 그림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안양 출신 전지 작가가 생각하는 한강은 어떤 모습일까? 선명한 거리에선 고등학생 시절 갑갑한 일상에 질린 작가와 친구가 서울로 떠나 한강을 보며 꼭 바다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냄새 나는 안양 똥천으로 그려지고 말이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작가의 친구가 나 안양 떠나니까 숨이 쉬어져.”라고 고백하듯 말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선명한 거리는 나이가 든 작가가 동네 풍경을 그린 전시회를 열며 끝이 난다. 10대 때는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안양에 대해 울퉁불퉁 소란스러운 가운데 얻어걸리는 재미라는 게 있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작가는, 이제 한강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안양 똥천이라 불렀던 안양천은? (그 사이 안양천도 많이 달라지긴 했겠지만.) 안양천, 중랑천, 탄천, 왕숙천 같은 한강의 지류들 이야기 역시, 한강에 살아요를 읽으니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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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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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간 가능성들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 북으로 간 언어학자

 

한국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게 될 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로 지명된 문창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왜 총리가 아니라 총리로 지명된사람이냐면, 문창극 씨는 청문회조차 가보지 못하고 낙마했기 때문이다. 총리의 꿈을 좌절시킨 결정적인 트리거는 그가 강남의 한 교회에서 했다는 강연이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하나님이 고비고비마다 주신 시련과 고난이 민족을 단련시키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문창극 씨의 이 발언을 전형적인 식민통치 미화, 혹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보도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최소한 일제 식민지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한국에서 그가 총리가 될 수 없었던 건 따라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한 보수 기독교 인사의 잘못된역사관이 빚은 해프닝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득문득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건, 문창극 씨의 생각이 그리 예외적이거나 이상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어린이용 학습만화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소재로 삼은 거의 모든 콘텐츠는 비극적인 과거가 빛나는 오늘을 위한 시련이었음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좌와 우의 구분이 없다. ‘시련을 통해 얻게 된 성취가 경제발전이냐 민주주의냐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특히 한국이 명실상부 선진국으로 올라선 2010년대 후반부터는 보다 적극적이고, 공공연한 형태로 시련 사관이 유통되었다, 고 생각한다. 당장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연설문집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시련 사관에서, 근현대 한국이 겪은 모든 시련은 오로지 성취와 연결됨으로써만 그 의의를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배도, 분단과 전쟁도, 군사독재와 노동착취도 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위한 밑거름으로 간단히 치환된다. 뒤집어 말해 현재의 성취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과거의 시련은 시련조차 될 수 없다. ‘시련성취라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도식을 비껴나는 인물이나 사건은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말이다. 그렇다면 성취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혹은 그다지 시련처럼 느껴지지 않는 역사를 구태여 발굴하고 배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대중에게 이를 설득할 수 있는가? 나아가 만일 한국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게 될 때, 그러니까 현재가 그리 자랑스럽거나 떳떳하지 않은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닥쳐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타가키 류타의 북으로 간 언어학자는 흥미진진하게, 무엇보다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임화의 월북을 다룬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으로 간 시인을 연상케 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해방 이후 월북해 초창기 북조선 언어정책을 설계하다시피 했던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한 평전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김수경인가? 그가 7개 언어로 된 원서를 동시에 읽어가며 물 흐르듯 수업할 정도의 천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오랫동안 잊혔다 최근에야 알려진 비운의 인물에 가깝다.

 

그렇다고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수많은 평전이 그러하듯, 김수경에게 마땅한자리를 찾아주겠다는 복권(復權) 시도는 아니다.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왜 그에게 주목해야 하는지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이타가키가 주목하는 건 김수경의 실패. 김수경은 오늘날 한국인과 일본인이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패한국가인 북조선을 선택했다. 그가 북조선에서 펼친 언어정책 역시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중의 실패를 한 셈인데, 이타가키는 오히려 이로부터 현재를 상대화할 가능성을 본다. 대한민국과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현재 우리가 쓰는 한국어로 귀결되지 않는 숱한 시도와 가능성들이 김수경의 삶에 응축되어 있다. 일체의 역사를 현재의 성취를 위한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 역사 연구, 이타가키는 이를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 이름 붙인다.

 

식민지의 소쉬르 보이”, 신국가의 언어를 설계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숱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지식청년이었던 김수경 역시 제국 일본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그가 받았다는 영향은,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해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사실상 지도교수였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세계 최초로 번역한 언어학자였고, 김수경은 이러한 고바야시와 면학의 고락을 함께하며(p.89.) 구조언어학을 폭넓게 수용했다. 구조언어학이 식민본국 일본에서도 생소한 최신 학문이었던 만큼, 어쩌면 김수경은 일본이라는 매개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언어학의 세계적 조류와 직결했던 것이다. 인도유럽어를 중심으로 수많은 언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탐구하며,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구조를 발견하려는 구조언어학의 이상은 이후 김수경의 삶과 학문을 틀 지우게 된다.

 

이처럼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을 소쉬르 보이였던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청년 대부분이 그러했듯 마르크스 보이이기도 했던 김수경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두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언어학은 그 추상성과 복잡함 때문에 종종 천재들의 유희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갖는 학문이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틀 지우는, 언어에 대한 규범을 마련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베네딕트 앤더슨이 일찍이 간파했듯 이른바 민족/국민(Nation)의 형성에 언어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연히 국민창출을 목표로 하던 두 나라는 언어학자 김수경의 재능을 탐낼 수밖에 없었고, 남쪽의 경성대학 교수였던 김수경은 이른바 국대안 파동을 계기로 월북하게 된다.

 

그렇게 김수경이 선택한 북조선의 2인자가, 공교롭게도 주시경의 제자였던 김두봉이었다. ‘장군김일성과 대조적으로 선생이라 불렸던 그는, 19472월 서울에서 발행되던 종합잡지 민성民聲의 북조선 특파원이었던 박찬식이 한글과 문자정책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던지자 입에 거품까지 물어가며 문자개혁에 대한 열변을 토할 정도로 열성적인 언어학자였다. 박찬식은 천하의 혁명가를 만나서 겨우 한글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는 건 기자로서 여지없는 낙제라며 한탄했지만(p.159.), 김두봉에게는 정치혁명언어혁명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국가 건설이란 곧 이를 떠받칠 언어체계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김두봉 밑에서, 김수경은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북조선을 막론하고 새로운 언어체계를 마련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과제 중 하나는, ‘한자의 빈자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였다. 특히 북조선은 초기부터 언어생활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격할 것을 선언했는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국한문 혼용에서 벗어나는 순간 종래의 모아쓰기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다. 애당초 훈민정음부터 중국의 소리를 최대한 올바르게 받아 적기 위해, 다시 말해 한자를 전제한 상태에서 탄생한 문자였다. 한자음의 소리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도 골치였다. 국한문 혼용 시절에는 속으로 어떻게 읽든 한자로 써놓으면 그만이었지만 순한글로 표기하는 이상 이를 어떻게 쓸지, 가령 勞動노동으로 쓸지 로동으로 쓸지 결정해야 했다.

 

김수경이 내놓은 답은 풀어쓰기, 그리고 형태주의였다. 풀어쓰기란 한글의 자모음을 알파벳처럼 전부 풀어서, 그러니까 김수경lㅁㅅㅜㄱㅕㅇ으로 적는 방식이다. 형식주의는 실제 발음과는 다를지언정 같은 어()는 같은 철자로 표기한다는 원칙이다. 물론 이 두 방침은 김수경만의 독특한 발상이라기보다는 주시경 이래 조선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경은 특유의 어학 실력과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뒷받침할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변칙적 표기를 줄이기 위한 ㅿ, ㆆ를 비롯한 6자모의 고안, 풀어쓰기를 채택할 때 적절한 끊어읽기를 위한 절음부” '의 도입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외부를 잃은 내부의 귀결, 학문의 주체화

 

앤더슨의 말마따나 한문이나 라틴어처럼 지나치게 표의적이지도, 민중의 입말처럼 지나치게 표음적이지도 않은, ‘국민을 창출하는데 가장 적합한 언어를 고안하려던 김수경의 야심찬 기획은, 그러나 1958년 김두봉이 실각하며 좌절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언어학 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긴 했으나, 1968년 김일성대학 문학부에서 중앙도서관 사서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김수경의 숙청과 함께 북조선의 학술계, 나아가 사회 전체도 크게 달라졌다. ‘자주주체의 구축이 지상과제로 떠오르며 소련을 비롯한 해외의 연구 업적에 대한 참조가 외래 사상의 기계적 적용으로 비판받게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에 대한 규정 변화다. “~”, “~와 같은 조사를 일컫는 말인 토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북조선에서 퍽 오랜 시간 논쟁의 대상이었다. 만일 토를 독립적인 품사로 본다면 굴절어인 인도유럽어족 언어들과 구별되는 교착어로서 조선어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반면 토를 접사로 본다면 조선어와 다른 인도유럽어족 언어들 사이의 보편성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1949년 김수경의 주도로 편찬한 조선어 문법에서는 토를 독립적인 품사로 취급하지 않고, 명사나 형용사 등 각 품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보조적으로 다루었다. 인도유럽어라는 보편의 맥락에서 조선어를 이해코자 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 언어학계를 주도하던 마르학파의 공식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반면 1950620일 스탈린이 프라우다에 마르학파를 비판하며 언어의 전 인민적 성격을 강조하는 논문을 실은 뒤인 1954년 간행한 조선어 문법에서는 토를 보조적 품사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이는 이전에 비해 토, 나아가 조선어의 특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스탈린의 논문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추출해내고자 했던 김수경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물론 이때의 민족적 자주성이란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들과의 폭넓은 비교라는 보편적·국제주의적 시야를 전제한 것이었다. 앤더슨이 간파했듯 내셔널(national)’한 것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혹은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지평에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확립이 중시되는 1960년대 이후에는 인도유럽어의 보편성을 중시하는 토는 접사다”, 인도유럽어의 보편성위에서 조선어의 특수성을 함께 고려하는 토는 접사지만 일부 다르다는 종래의 주장 대신 토는 토다라는, 다른 언어와의 비교를 일체 거부하며 조선어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주장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아가 어음론, 형태론, 문장론의 3부로 구성된 기존의 문법서를 말소리, 품사, , 문장의 4부로 구성하는 등, 아예 토를 중심으로 조선어의 문법체계를 새롭게 짜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론적 권위의 원천을 민족 내부의 지고한 존재(수령)에게 구하고, 일체의 외부를 지워가는 학문의 주체화과정에서(p.366.), 외부와 내부, 특수와 보편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잃지 않았던 다언어 구사자 김수경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열린 것과 닫힌 것, 인물사의 어려움

 

식민지의 지식청년이었던 소쉬르 보이김수경이 해방 이후 신국가의 언어체계 건설에 투신하고, 1960년대 학문의 주체화가 이루어지며 끝내 숙청되는 과정은 무척이나 극적이고 또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마주했던 여러 가능성을 풍성하게 드러냄으로써, 여러 맥락이 얽힌 교차로로서 개인의 삶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낸다(p.14.). “머리말에서 밝히듯 그는 김수경이라는 개인이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때그때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역사 서술에 지배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담론에 대항해 보고 싶다(p.41.) 포부를 가지고 있고, 감히 평가하자면 이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김수경을 통해 현재로 수렴하지 않는 역사 속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복원해내는 이 책이, 막상 김수경 개인을 다룰 때는 그의 삶과 사고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무언가란 다름 아닌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실제로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경성제대 시절 고바야시로부터 구조주의 언어학을 사사한 과정을 적잖이 공들여 서술한다. 이후 김수경의 삶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은 계속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통주저음(通奏低音)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이타가키는 김수경의 한국전쟁 수기 역시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 개념에 따라 분석을 시도한다(p.228.).

 

요컨대, 이타가키가 그려낸 김수경은 소쉬르와 구조주의 언어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쩌면 김수경의 삶이란 청년 시절 받아들인 구조주의 언어학을 조금씩 변주시켜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배움에서 일본이라는 매개가 갖는 영향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다시 말해 그가 유럽에서 유학한 조선인 혹은 일본에서 공부한 일본인처럼 보인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준 고바야시의 존재를 잊게 될 만큼, 북으로 간 언어학자에서 김수경과 소쉬르의 거리는 가깝게 묘사된다. (책 속에서 고바야시는 김수경의 언어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해주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김수경을 그리워하는 고마운 은사로 그려진다.)

 

김수경과 소쉬르의 이러한 밀접함, 인물의 삶을 다룰 때 우리가 무엇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끈다. 인물사 혹은 평전을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곤 한다. 이는 사실 불가피한 것이기도 한데, 무언가가 없다면 애당초 인물사나 평전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절치 않은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실험을 할 때 어떤 변수는 꼭 통제되어야 하듯이, 한 인물을 통해 역사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결국 인물의 삶은 어느 정도 일관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결과론적 역사 서술에 맞서 수많은 가능성의 조각들을 발굴해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열린역사를 그려내기 위해 무언가는 닫혀야한다.

 

이 역설을 어떻게 돌파하거나 극복할 수 있을지, 하다못해 우회라도 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필이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당장 써야 하는 글 역시 넓은 의미의 인물사기 때문에 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아마 나 역시 내가 다룰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글을 쓸 것이고, 앞으로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비단 남의 이야기를 읽거나 쓸 때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지어낼 때도 그것이 최대한 완전하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삶을 일관하는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고 한 인물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지,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선의가 모여 빚어낸 감동적인 이야기

 

구태여 이런 어렵고 답답한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북으로 간 언어학자는 그 자체로 무척이나 재밌고 또 감동적인 이야기다. 단언컨대, 학술서와 교양서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어로 쓰였거나 번역된 역사서 중에서 북으로 간 언어학자이상으로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만큼 재밌게 읽었던 인물사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셰익스피어 평전 세계를 향한 의지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남쪽에 남은 김수경의 가족들 이야기는 눈물 없인 읽기 어렵다. 김수경이 도쿄제대에서 유학할 때 만난 아내 이남재는 해방 후 남편을 따라 얼떨결에 38선을 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치강습을 위해 점령 지역으로 파견된 남편을 기다리다 아이들과 시어머니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왔고, 그렇게 북으로 다시 올라온 남편과 생이별했다. 이후 이남재는 홀로 네 아이를 기르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부산에 자리를 잡았고, 맏딸 김혜자가 졸업할 무렵 남편의 호적을 정리했으며, 나중에는 둘째 아들을 제외한 온 가족이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갔다. 이남재가 김수경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건 1986년에 이르러서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일찌감치 재혼했단 소식이었다.

 

물론 김수경의 재혼은 온 가족이 남으로 내려간 상황에서 간첩이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남편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으로 살아왔던 이남재에게 남편의 재혼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김수경이 1988년 둘째 딸 김혜영과 재회하고, 1996년 첫째 아들 김태정이 평양을 찾았음에도 정작 아내 이남재와의 상봉은 1998년에야 이뤄진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남재에게 재회를 요구하는 김수경의 모습은 어딘가 이기적이고, 철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장남 김태정이 평양에 살던 시절 거주했던 건국의 집4를 재현한 평면도에도 아버지가 부엌 선반을 만든 것이 부엌일의 전부라 쓰여 있다(p.415). 그는 가족과 함께 살 때나 떨어져 살 때나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서투른, 전형적인 학자형인물이었던 것 같다. 반면 그것이 선천적인 성격이든, 타지에서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며 후천적으로 기른 성격이든 이남재는 훨씬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내가 책을 읽다 끝내 울게 된 대목도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던 1971년 설에 일직을 하는 이남재의 사진이 실린 페이지였다(p.425.). 사진 속 그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해보이면서도, 어딘가 회한에 잠긴 모습이었다.

 

토론토로 건너간 이남재 가족은 이타가키가 북으로 간 언어학자를 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20103월 이타가키가 북미에 거주하는 한반도(조선반도) 북부 출신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토론토를 찾았을 때, 그를 자동차로 숙소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다름 아닌 김수경의 둘째 딸 김혜영이었던 것이다. (그땐 이미 남편의 성인 임(Im)을 쓰고 있어서, 이타가키가 아버지 역시 임 씨 성을 쓰겠거니 하고 넘겨짚기도 했다.) 이후 이타가키는 김혜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선의로 김수경에 대한 자료를 모아갔고, 결국 이 책을 완성했다.

 

그 점에서 몇 페이지에 걸친 맺음말의 감사인사는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다. 보통 감사의 말은 책의 가장 재미없고 형식적인 챕터이기 마련이지만, 이타가키는 누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누가 읽어도 그가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끔 상세히 밝혔다. 본인의 말마따나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숱한 만남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p.17.), 애초에 그가 선한 마음을 갖고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시작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타가키의 선의에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가 공명한 셈이다. 뭔 일을 해도 누군가의 숨은 의도부터 의심하게 되는 시대에, 결국 좋은 이야기란 좋은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여주기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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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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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와 더불어,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 세상을 감각하고, 인지하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다른 두 지성체가 상대방을 어떻게 '길들이는지'에 대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잔혹한 보고서. 알라딘 독자평이나 네이버 블로그를 보니 작가가 이전까지의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이 적지 않은데, 난 오히려 뚜렷한 '도약'을 느꼈다. 특히 '길들임'의 방향이 일방향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얘기하면 스포가 될 테니 여기까지만.)

훌륭한 소설책인 동시에, 훌륭한 교양 철학서다. 내가 선생이라면 학부 교양수업 커리큘럼에 꼭 집어넣었을 것. 역시 김초엽은 성실한 연구자이자 훌륭한 대학원생의 마인드셋이 장착된 사람. 요즘같은 시대에 매우 귀한 자세다. 나는 그의 첫 에세이 《책과 우연들》을 대학원생 혹은 연구자 지망생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로 읽었는데, (절대 망치를 들었다고 죄다 못으로 보이는 착시가 아니다!) 조만간 그 책의 서평을 쓰며 《파견자들》이야기도 조금 곁들여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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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P 2024-01-0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대급 호들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