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 살아요 - 새로 보는 한강 역사 여행 너머학교 역사교실 그림책 11
장지연 지음, 전지 그림 / 너머학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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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수도권 사람들이 늘 마주하는, 그러나 그 의미가 꼭 같지는 않은 강이다. 나처럼 경부고속도로에서 보낸 시간이 20대의 6분의 1은 될 사람에게 한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한남대교를 건널 때마다 보게 되는 배경이다. 수많은 사람한때 넷상에서 유행했던 인생은 한강뷰 아니면 한강물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는 성공한 인생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반면, 주식이나 코인 등에 실패한 이들이 농반진반 찾는 곳 역시 한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쉬거나 운동하러 한강을 찾지만, 동시에 위압적인 도로들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장지연이 글을 쓰고 전지가 그림을 그린 한강에 살아요는 한강이 가진 다양한 면모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한강 주위에 펼쳐진 모래밭과 여기저기 뻗은 샛강, 이들 사이에 놓인 크고 작은 모래섬이었다. 아마도 나 같은 20~30대는 한강을 오늘날과 같은, 잔잔한 호수의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강의 긴 역사에 비추어보면 극히 최근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드넓은 모래밭과 큰비가 올 때마다 줄기가 달라지는 샛강, 생겼다 사라지곤 하는 모래섬이야말로 한강의 오랜 모습에 가깝다.

 

나 역시 남양주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로부터 당신 어린 시절엔 한강에 백사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여름이면 한강과 왕숙천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한강에 살아요는 결코 이를 낭만적으로 그리지만은 않는다. 모래밭과 샛강, 모래섬은 한강이 그만큼 통제하기 어려운 자연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간은 아주 최근까지도 한강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최근인 1984년과 1990년에도 큰비가 내려 망원동과 고양군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인간이 한강을 비로소 다스릴수 있게 된 건 전두환 시절인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강바닥을 파내고, 강줄기를 직선으로 다듬었다. 물속에는 보를, 물위에는 둑을 만들어 큰비에도 강이 넘치지 않게 했다. 지난 총선 최대 승부처로 떠오른 한강 벨트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는 이처럼 한강이 잠잠해지며 지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혼자 소름이 돋았는데, 88올림픽-한강 치수-중산층 육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게, 각각의 사실들은 알고 있었는데 왜 그걸 하나로 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처럼 1980년대 이후 한강은 우리가 아는 그 모습이 되었지만, 결코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있지만은 않았다. 여의도를 만들기 위해 폭파한 밤섬이 되살아났고, 쓰레기매립장이 된 난지도에 다시 수풀이 자라나며 동물들이 살기 시작했다. 글작가 장지연의 말처럼 자연은 정말 놀랍달까? 내가 사는 동네를 가로지르는 탄천도 매년 강바닥을 파내고, 보를 지었다 철거했다 난리지만, 모래톱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비가 오면 강물이 범람한다.

 

물론 자연의 놀라움은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강의 아름다운 모래밭과 무시무시한 대홍수는 어느 한 쪽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모노노케히메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모노노케히메만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한강에 살아요역시 인간과 자연 어느 한 쪽에 치우진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굉장히 담담하게, 글작가 장지연의 말처럼 사람이 사는 곳의 환경을 바꾸고, 환경이 사람들의 삶을 바꿔낸 역사를 보여준다. “자연의 회복력은 강하고 사람들의 힘도 강하니까요.”라는 책의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풀어낸 글작가 장지연의 내공에도 감탄했지만(구체적인 숫자가 많이 나온 점이 특히 좋았다), 그림작가 전지의 디테일한 그림도(특히 간판!) 무척이나 좋았다. 흥미로운 점은 전지가 지역에 무척이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안양을 배경으로 삼은 자전적 만화인 선명한 거리를 그렸고,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의 문제를 알기 쉽게 풀어내 호평을 받은 어디에서 살까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런 전지 작가인 만큼 디테일이 살아난 그림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안양 출신 전지 작가가 생각하는 한강은 어떤 모습일까? 선명한 거리에선 고등학생 시절 갑갑한 일상에 질린 작가와 친구가 서울로 떠나 한강을 보며 꼭 바다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냄새 나는 안양 똥천으로 그려지고 말이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작가의 친구가 나 안양 떠나니까 숨이 쉬어져.”라고 고백하듯 말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선명한 거리는 나이가 든 작가가 동네 풍경을 그린 전시회를 열며 끝이 난다. 10대 때는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안양에 대해 울퉁불퉁 소란스러운 가운데 얻어걸리는 재미라는 게 있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작가는, 이제 한강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안양 똥천이라 불렀던 안양천은? (그 사이 안양천도 많이 달라지긴 했겠지만.) 안양천, 중랑천, 탄천, 왕숙천 같은 한강의 지류들 이야기 역시, 한강에 살아요를 읽으니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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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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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간 가능성들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 북으로 간 언어학자

 

한국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게 될 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로 지명된 문창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왜 총리가 아니라 총리로 지명된사람이냐면, 문창극 씨는 청문회조차 가보지 못하고 낙마했기 때문이다. 총리의 꿈을 좌절시킨 결정적인 트리거는 그가 강남의 한 교회에서 했다는 강연이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하나님이 고비고비마다 주신 시련과 고난이 민족을 단련시키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문창극 씨의 이 발언을 전형적인 식민통치 미화, 혹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보도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최소한 일제 식민지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한국에서 그가 총리가 될 수 없었던 건 따라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한 보수 기독교 인사의 잘못된역사관이 빚은 해프닝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득문득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건, 문창극 씨의 생각이 그리 예외적이거나 이상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어린이용 학습만화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소재로 삼은 거의 모든 콘텐츠는 비극적인 과거가 빛나는 오늘을 위한 시련이었음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좌와 우의 구분이 없다. ‘시련을 통해 얻게 된 성취가 경제발전이냐 민주주의냐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특히 한국이 명실상부 선진국으로 올라선 2010년대 후반부터는 보다 적극적이고, 공공연한 형태로 시련 사관이 유통되었다, 고 생각한다. 당장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연설문집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시련 사관에서, 근현대 한국이 겪은 모든 시련은 오로지 성취와 연결됨으로써만 그 의의를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배도, 분단과 전쟁도, 군사독재와 노동착취도 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위한 밑거름으로 간단히 치환된다. 뒤집어 말해 현재의 성취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과거의 시련은 시련조차 될 수 없다. ‘시련성취라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도식을 비껴나는 인물이나 사건은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말이다. 그렇다면 성취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혹은 그다지 시련처럼 느껴지지 않는 역사를 구태여 발굴하고 배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대중에게 이를 설득할 수 있는가? 나아가 만일 한국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게 될 때, 그러니까 현재가 그리 자랑스럽거나 떳떳하지 않은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닥쳐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타가키 류타의 북으로 간 언어학자는 흥미진진하게, 무엇보다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임화의 월북을 다룬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으로 간 시인을 연상케 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해방 이후 월북해 초창기 북조선 언어정책을 설계하다시피 했던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한 평전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김수경인가? 그가 7개 언어로 된 원서를 동시에 읽어가며 물 흐르듯 수업할 정도의 천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오랫동안 잊혔다 최근에야 알려진 비운의 인물에 가깝다.

 

그렇다고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수많은 평전이 그러하듯, 김수경에게 마땅한자리를 찾아주겠다는 복권(復權) 시도는 아니다.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왜 그에게 주목해야 하는지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이타가키가 주목하는 건 김수경의 실패. 김수경은 오늘날 한국인과 일본인이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패한국가인 북조선을 선택했다. 그가 북조선에서 펼친 언어정책 역시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중의 실패를 한 셈인데, 이타가키는 오히려 이로부터 현재를 상대화할 가능성을 본다. 대한민국과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현재 우리가 쓰는 한국어로 귀결되지 않는 숱한 시도와 가능성들이 김수경의 삶에 응축되어 있다. 일체의 역사를 현재의 성취를 위한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 역사 연구, 이타가키는 이를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 이름 붙인다.

 

식민지의 소쉬르 보이”, 신국가의 언어를 설계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숱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지식청년이었던 김수경 역시 제국 일본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그가 받았다는 영향은,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해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사실상 지도교수였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세계 최초로 번역한 언어학자였고, 김수경은 이러한 고바야시와 면학의 고락을 함께하며(p.89.) 구조언어학을 폭넓게 수용했다. 구조언어학이 식민본국 일본에서도 생소한 최신 학문이었던 만큼, 어쩌면 김수경은 일본이라는 매개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언어학의 세계적 조류와 직결했던 것이다. 인도유럽어를 중심으로 수많은 언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탐구하며,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구조를 발견하려는 구조언어학의 이상은 이후 김수경의 삶과 학문을 틀 지우게 된다.

 

이처럼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을 소쉬르 보이였던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청년 대부분이 그러했듯 마르크스 보이이기도 했던 김수경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두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언어학은 그 추상성과 복잡함 때문에 종종 천재들의 유희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갖는 학문이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틀 지우는, 언어에 대한 규범을 마련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베네딕트 앤더슨이 일찍이 간파했듯 이른바 민족/국민(Nation)의 형성에 언어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연히 국민창출을 목표로 하던 두 나라는 언어학자 김수경의 재능을 탐낼 수밖에 없었고, 남쪽의 경성대학 교수였던 김수경은 이른바 국대안 파동을 계기로 월북하게 된다.

 

그렇게 김수경이 선택한 북조선의 2인자가, 공교롭게도 주시경의 제자였던 김두봉이었다. ‘장군김일성과 대조적으로 선생이라 불렸던 그는, 19472월 서울에서 발행되던 종합잡지 민성民聲의 북조선 특파원이었던 박찬식이 한글과 문자정책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던지자 입에 거품까지 물어가며 문자개혁에 대한 열변을 토할 정도로 열성적인 언어학자였다. 박찬식은 천하의 혁명가를 만나서 겨우 한글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는 건 기자로서 여지없는 낙제라며 한탄했지만(p.159.), 김두봉에게는 정치혁명언어혁명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국가 건설이란 곧 이를 떠받칠 언어체계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김두봉 밑에서, 김수경은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북조선을 막론하고 새로운 언어체계를 마련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과제 중 하나는, ‘한자의 빈자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였다. 특히 북조선은 초기부터 언어생활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격할 것을 선언했는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국한문 혼용에서 벗어나는 순간 종래의 모아쓰기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다. 애당초 훈민정음부터 중국의 소리를 최대한 올바르게 받아 적기 위해, 다시 말해 한자를 전제한 상태에서 탄생한 문자였다. 한자음의 소리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도 골치였다. 국한문 혼용 시절에는 속으로 어떻게 읽든 한자로 써놓으면 그만이었지만 순한글로 표기하는 이상 이를 어떻게 쓸지, 가령 勞動노동으로 쓸지 로동으로 쓸지 결정해야 했다.

 

김수경이 내놓은 답은 풀어쓰기, 그리고 형태주의였다. 풀어쓰기란 한글의 자모음을 알파벳처럼 전부 풀어서, 그러니까 김수경lㅁㅅㅜㄱㅕㅇ으로 적는 방식이다. 형식주의는 실제 발음과는 다를지언정 같은 어()는 같은 철자로 표기한다는 원칙이다. 물론 이 두 방침은 김수경만의 독특한 발상이라기보다는 주시경 이래 조선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경은 특유의 어학 실력과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뒷받침할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변칙적 표기를 줄이기 위한 ㅿ, ㆆ를 비롯한 6자모의 고안, 풀어쓰기를 채택할 때 적절한 끊어읽기를 위한 절음부” '의 도입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외부를 잃은 내부의 귀결, 학문의 주체화

 

앤더슨의 말마따나 한문이나 라틴어처럼 지나치게 표의적이지도, 민중의 입말처럼 지나치게 표음적이지도 않은, ‘국민을 창출하는데 가장 적합한 언어를 고안하려던 김수경의 야심찬 기획은, 그러나 1958년 김두봉이 실각하며 좌절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언어학 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긴 했으나, 1968년 김일성대학 문학부에서 중앙도서관 사서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김수경의 숙청과 함께 북조선의 학술계, 나아가 사회 전체도 크게 달라졌다. ‘자주주체의 구축이 지상과제로 떠오르며 소련을 비롯한 해외의 연구 업적에 대한 참조가 외래 사상의 기계적 적용으로 비판받게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에 대한 규정 변화다. “~”, “~와 같은 조사를 일컫는 말인 토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북조선에서 퍽 오랜 시간 논쟁의 대상이었다. 만일 토를 독립적인 품사로 본다면 굴절어인 인도유럽어족 언어들과 구별되는 교착어로서 조선어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반면 토를 접사로 본다면 조선어와 다른 인도유럽어족 언어들 사이의 보편성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1949년 김수경의 주도로 편찬한 조선어 문법에서는 토를 독립적인 품사로 취급하지 않고, 명사나 형용사 등 각 품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보조적으로 다루었다. 인도유럽어라는 보편의 맥락에서 조선어를 이해코자 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 언어학계를 주도하던 마르학파의 공식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반면 1950620일 스탈린이 프라우다에 마르학파를 비판하며 언어의 전 인민적 성격을 강조하는 논문을 실은 뒤인 1954년 간행한 조선어 문법에서는 토를 보조적 품사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이는 이전에 비해 토, 나아가 조선어의 특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스탈린의 논문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추출해내고자 했던 김수경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물론 이때의 민족적 자주성이란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들과의 폭넓은 비교라는 보편적·국제주의적 시야를 전제한 것이었다. 앤더슨이 간파했듯 내셔널(national)’한 것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혹은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지평에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확립이 중시되는 1960년대 이후에는 인도유럽어의 보편성을 중시하는 토는 접사다”, 인도유럽어의 보편성위에서 조선어의 특수성을 함께 고려하는 토는 접사지만 일부 다르다는 종래의 주장 대신 토는 토다라는, 다른 언어와의 비교를 일체 거부하며 조선어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주장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아가 어음론, 형태론, 문장론의 3부로 구성된 기존의 문법서를 말소리, 품사, , 문장의 4부로 구성하는 등, 아예 토를 중심으로 조선어의 문법체계를 새롭게 짜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론적 권위의 원천을 민족 내부의 지고한 존재(수령)에게 구하고, 일체의 외부를 지워가는 학문의 주체화과정에서(p.366.), 외부와 내부, 특수와 보편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잃지 않았던 다언어 구사자 김수경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열린 것과 닫힌 것, 인물사의 어려움

 

식민지의 지식청년이었던 소쉬르 보이김수경이 해방 이후 신국가의 언어체계 건설에 투신하고, 1960년대 학문의 주체화가 이루어지며 끝내 숙청되는 과정은 무척이나 극적이고 또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마주했던 여러 가능성을 풍성하게 드러냄으로써, 여러 맥락이 얽힌 교차로로서 개인의 삶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낸다(p.14.). “머리말에서 밝히듯 그는 김수경이라는 개인이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때그때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역사 서술에 지배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담론에 대항해 보고 싶다(p.41.) 포부를 가지고 있고, 감히 평가하자면 이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김수경을 통해 현재로 수렴하지 않는 역사 속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복원해내는 이 책이, 막상 김수경 개인을 다룰 때는 그의 삶과 사고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무언가란 다름 아닌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실제로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경성제대 시절 고바야시로부터 구조주의 언어학을 사사한 과정을 적잖이 공들여 서술한다. 이후 김수경의 삶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은 계속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통주저음(通奏低音)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이타가키는 김수경의 한국전쟁 수기 역시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 개념에 따라 분석을 시도한다(p.228.).

 

요컨대, 이타가키가 그려낸 김수경은 소쉬르와 구조주의 언어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쩌면 김수경의 삶이란 청년 시절 받아들인 구조주의 언어학을 조금씩 변주시켜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배움에서 일본이라는 매개가 갖는 영향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다시 말해 그가 유럽에서 유학한 조선인 혹은 일본에서 공부한 일본인처럼 보인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준 고바야시의 존재를 잊게 될 만큼, 북으로 간 언어학자에서 김수경과 소쉬르의 거리는 가깝게 묘사된다. (책 속에서 고바야시는 김수경의 언어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해주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김수경을 그리워하는 고마운 은사로 그려진다.)

 

김수경과 소쉬르의 이러한 밀접함, 인물의 삶을 다룰 때 우리가 무엇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끈다. 인물사 혹은 평전을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곤 한다. 이는 사실 불가피한 것이기도 한데, 무언가가 없다면 애당초 인물사나 평전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절치 않은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실험을 할 때 어떤 변수는 꼭 통제되어야 하듯이, 한 인물을 통해 역사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결국 인물의 삶은 어느 정도 일관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결과론적 역사 서술에 맞서 수많은 가능성의 조각들을 발굴해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열린역사를 그려내기 위해 무언가는 닫혀야한다.

 

이 역설을 어떻게 돌파하거나 극복할 수 있을지, 하다못해 우회라도 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필이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당장 써야 하는 글 역시 넓은 의미의 인물사기 때문에 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아마 나 역시 내가 다룰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글을 쓸 것이고, 앞으로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비단 남의 이야기를 읽거나 쓸 때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지어낼 때도 그것이 최대한 완전하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삶을 일관하는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고 한 인물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지,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선의가 모여 빚어낸 감동적인 이야기

 

구태여 이런 어렵고 답답한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북으로 간 언어학자는 그 자체로 무척이나 재밌고 또 감동적인 이야기다. 단언컨대, 학술서와 교양서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어로 쓰였거나 번역된 역사서 중에서 북으로 간 언어학자이상으로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만큼 재밌게 읽었던 인물사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셰익스피어 평전 세계를 향한 의지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남쪽에 남은 김수경의 가족들 이야기는 눈물 없인 읽기 어렵다. 김수경이 도쿄제대에서 유학할 때 만난 아내 이남재는 해방 후 남편을 따라 얼떨결에 38선을 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치강습을 위해 점령 지역으로 파견된 남편을 기다리다 아이들과 시어머니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왔고, 그렇게 북으로 다시 올라온 남편과 생이별했다. 이후 이남재는 홀로 네 아이를 기르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부산에 자리를 잡았고, 맏딸 김혜자가 졸업할 무렵 남편의 호적을 정리했으며, 나중에는 둘째 아들을 제외한 온 가족이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갔다. 이남재가 김수경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건 1986년에 이르러서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일찌감치 재혼했단 소식이었다.

 

물론 김수경의 재혼은 온 가족이 남으로 내려간 상황에서 간첩이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남편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으로 살아왔던 이남재에게 남편의 재혼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김수경이 1988년 둘째 딸 김혜영과 재회하고, 1996년 첫째 아들 김태정이 평양을 찾았음에도 정작 아내 이남재와의 상봉은 1998년에야 이뤄진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남재에게 재회를 요구하는 김수경의 모습은 어딘가 이기적이고, 철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장남 김태정이 평양에 살던 시절 거주했던 건국의 집4를 재현한 평면도에도 아버지가 부엌 선반을 만든 것이 부엌일의 전부라 쓰여 있다(p.415). 그는 가족과 함께 살 때나 떨어져 살 때나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서투른, 전형적인 학자형인물이었던 것 같다. 반면 그것이 선천적인 성격이든, 타지에서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며 후천적으로 기른 성격이든 이남재는 훨씬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내가 책을 읽다 끝내 울게 된 대목도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던 1971년 설에 일직을 하는 이남재의 사진이 실린 페이지였다(p.425.). 사진 속 그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해보이면서도, 어딘가 회한에 잠긴 모습이었다.

 

토론토로 건너간 이남재 가족은 이타가키가 북으로 간 언어학자를 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20103월 이타가키가 북미에 거주하는 한반도(조선반도) 북부 출신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토론토를 찾았을 때, 그를 자동차로 숙소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다름 아닌 김수경의 둘째 딸 김혜영이었던 것이다. (그땐 이미 남편의 성인 임(Im)을 쓰고 있어서, 이타가키가 아버지 역시 임 씨 성을 쓰겠거니 하고 넘겨짚기도 했다.) 이후 이타가키는 김혜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선의로 김수경에 대한 자료를 모아갔고, 결국 이 책을 완성했다.

 

그 점에서 몇 페이지에 걸친 맺음말의 감사인사는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다. 보통 감사의 말은 책의 가장 재미없고 형식적인 챕터이기 마련이지만, 이타가키는 누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누가 읽어도 그가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끔 상세히 밝혔다. 본인의 말마따나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숱한 만남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p.17.), 애초에 그가 선한 마음을 갖고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시작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타가키의 선의에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가 공명한 셈이다. 뭔 일을 해도 누군가의 숨은 의도부터 의심하게 되는 시대에, 결국 좋은 이야기란 좋은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여주기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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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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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와 더불어,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 세상을 감각하고, 인지하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다른 두 지성체가 상대방을 어떻게 '길들이는지'에 대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잔혹한 보고서. 알라딘 독자평이나 네이버 블로그를 보니 작가가 이전까지의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이 적지 않은데, 난 오히려 뚜렷한 '도약'을 느꼈다. 특히 '길들임'의 방향이 일방향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얘기하면 스포가 될 테니 여기까지만.)

훌륭한 소설책인 동시에, 훌륭한 교양 철학서다. 내가 선생이라면 학부 교양수업 커리큘럼에 꼭 집어넣었을 것. 역시 김초엽은 성실한 연구자이자 훌륭한 대학원생의 마인드셋이 장착된 사람. 요즘같은 시대에 매우 귀한 자세다. 나는 그의 첫 에세이 《책과 우연들》을 대학원생 혹은 연구자 지망생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로 읽었는데, (절대 망치를 들었다고 죄다 못으로 보이는 착시가 아니다!) 조만간 그 책의 서평을 쓰며 《파견자들》이야기도 조금 곁들여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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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P 2024-01-0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대급 호들갑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금요일엔 역사책 1
장지연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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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올해 그나마 잘한 일이 있다면, 사료를 퍽 열심히 읽었다는 것이다. 1890년대 독립신문부터 1920년대 개벽, 1950년대 사상계1960년대 제6대 국회회의록에 이르기까지 약 7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사료를 찾고, 읽고, 정리했다. 좋아하는 선생님께선 역사가는 언제든 지금 무슨 사료를 읽고 있나요?”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적어도 지금 뭘 읽고 있고 앞으로 뭘 읽을 거란 얘기는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올해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혹시 나는 사료를 읽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하는 게 아닌가, 사료보다는 재밌는 학술서를 더 읽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에도 확실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재밌었던 점은 189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길다면 긴 시대를 오가며 사료를 읽어가다 보니 비단 내용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한자가 조금 섞였을지언정 한글이 주가 된 한국어 사료만 읽었는데도 결이 다 달랐다. 가령 독립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리듬감이다. 종결어미 “~의 빈번한 사용부터 해서 마치 판소리계 소설처럼 누구라도 소리 내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듬감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오죽하면 도서관에서 독립신문》 〈논셜을 조용히 몇 번 읊조렸을 정도다. 이광수의 무정이 나오기 20년도 더 전이니 구어체 한국어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았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립신문이 여러 사람에게 널리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치 팜플렛의 성격이 강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리듬감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면 1920년대 개벽으로 넘어오면, 간간이 종결어미 “~가 쓰이긴 해도 리듬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진다. 대신 일본식 표현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단순히 “~하지 않을 수 없다처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는 번역투 이야기가 아니다. “社會할 수 업는과 같이 일본에서 가나와 한자를 섞어 쓰는 것과 유사한 표현이 대부분이란 이야기다. 덕분에 사료를 정리하며 꽤나 애를 먹었다. 가령 저 위 표현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회의 권을 탈할 수 없는인가, 아니면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인가? “하야진하야인가, “나아가인가? “하는급하는으로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르는이나 미치는으로 읽어야 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현대 한국어에 일본어와 비슷한 훈독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한문 혼용이라 해서 지금의 한국어에 한자만 갖다 붙인 게 아니다.

 

그러던 게 1950년대 사상계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훈독이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글을 읽기는 훨씬 어렵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이 급격히 증가했고, 이걸 다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사상계가 초기부터 최현배의 글을 실으며 한글전용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한자 사랑은 퍽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상계에서 한자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드는 건, 체감 상 1957년 정도다. 아마 요즘 청소년에게 독립신문을 읽히면 와 쌤, 라임 오지네요!”하면서 신나서 따라 읽겠지만 사상계는 손도 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10대에게 더 가까운과거는 1890년대 독립신문인가, 아니면 1950년대 사상계인가? 선뜻 답하기 어려워진다.

 

서론이 길었다. 망설임 없이 올해의 교양서로 꼽고 싶은 장지연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이처럼 한국사를 이루는 언어의 다양한 을 살핀다. 한국사의 언어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지극히 이분법적이며, 또한 단절적이다. 횡으로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로 그 이전은 한문, 그 이후는 한글로 나뉜다. 종으로는 양반/남성/엘리트가 애용한 한문과, 백성/여성/민중이 애용한 한글로 나뉜다. 하지만 한문과 한글은 과연 단수일까? 앞서 살펴보았듯 독립신문의 한글과 개벽의 한글, 사상계의 한글은 전부 다르다. 한문도 마찬가지다. 범어(산스크리트어)보편언어였던 고려시대의 한문과, 유교 경전이 정치는 물론 개인의 내면까지 수양하는 표준으로 올라선 조선시대의 한문은 명백히 다르다. 장지연이 보고자 하는 것은 복수의 한글과 한문’, 그리고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6월 말에 나온 책인 만큼 그 내용을 다룬 서평은 적지 않다. 나 역시 한겨레21에 짧게나마 서평을 실었고, 무엇보다 지은이 장지연이 대학지성 In&Out에 책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내용에 대한 소개는 과감히 생략하겠지만, 딱 하나 다루고픈 이야기가 있다. 지금껏 대부분의 서평에서 주목하지 않은, 심지어 지은이 자신도 넘어간 도구. 지은이의 말마따나 문자는 이를 쓰는 도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p.120.) 가령 윤치호가 구태여 한글이 아닌 영어로 일기를 쓰겠다고 선언까지 한 이유는 필묵을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영어는 펜에, 한문과 한자는 붓에 적합한 언어였던 셈이다. 물론 갈대 펜을 여러 번 덧칠해가며 붓으로 쓴 것과 거의 동일한 글씨체를 구현해낸 8세기 돈황의 한인(漢人), 멋들어진 로마자 서예를 하는 베트남인을 통해 알 수 있듯 문자와 도구의 관계 역시 일방적이지 않다.

 

서체와 활자, 도구에 대한 지은이의 관심은 한국사의 뜨거운 감자인 금속활자로까지 뻗어나간다. 그간 금속활자를 둘러싼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서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낸 선진성에 대한 찬탄과, 그런 금속활자를 갖고도 조선말까지 인쇄혁명은커녕 서울에 변변한 서점 하나 없었던 낙후성에 대한 멸시가 그것이다. 지은이는 이 두 입장 모두 근대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며,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12세기 고려의 무신집정 최우는 왜 어떤 책은 금속활자로, 어떤 책은 목판 번각으로 찍어냈는가? 1403년 조선 조정은 하루에 서너 장밖에 찍어내지 못하는 지지부진함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금속활자 인쇄를 선택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느니, 그것이 정작 별다른 쓸모가 없었느니 하는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활자에 담긴 복합적인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 지은이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이러할 것이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비단 그 내용이나 문제의식뿐 아니라, 소비와 유통의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지난 6월 말 책이 나온 이후, 3개월 가까이 책에 대한 감상이 꾸준히 올라왔다. 평범한 독서 애호가에서 기자, 전문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퍽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령 간단한 한줄평을 남기든 내용을 요약하든 자신의 공부 경험을 덧대든 다양하게 책을 읽어간 경험을 공유했다. 주요 언론사에서 큼지막하게 소개하지 않은(이건 전적으로 언론사 잘못이다!) 책으로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 책을 매개로 (그것이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지만) 거의 와해된 줄 알았던 서평공동체혹은 문예공화국이 잠시나마 복구되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가 이토록 꾸준하고도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지은이 장지연이 탁월한 역사 글쟁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탁월하다는 건 단순히 글을 잘 쓴다는 의미가 아니다. 장지연은 아마도 소설을 제외한다면 역사를 소재 삼아 쓸 수 있는 모든 글을 써본 거의 유일한 역사가일 것이다. 논문과 학술서, 해제는 물론 교양서(경복궁, 시대를 세우다, 너머북스, 2018.), 청소년을 위한 역사서(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5: 새 나라 조선을 세우다, 웅진주니어, 2010질문하는 한국사 3: 조선, 나무를심는사람들, 2020.), 일간지 칼럼(경향신문》 「역사와 현실), 심지어는 그림책(세종로 1번지 경복궁 역사 여행, 너머학교, 202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독자를 겨냥한 글을 썼다. 그는 글의 성격과 목적, 독자에 따라 스타일을 달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역사가다.

 

하지만 단순히 장지연이 탁월한 역사 글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이 책의 인기를 설명할 수 없다. 추측컨대,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었던 건, 이 책이 역사가의 연구노트를 엿보는 기분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연구자가 그렇겠지만, 특히 역사가에게 연구노트란 무척이나 중요하다. 역사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료를 통해 말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료를 모으고, 읽고, 정리하고, 그때그때 감상과 생각을 메모 형식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은퇴를 앞둔 존경하는 교수님께서는 당신은 아직도 연구노트를 쓴다며, 박사과정생이라면 연구노트를 1000페이지는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문제는 연구노트의 상당 부분은 논문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교수님께선 1000페이지의 연구노트 중 90%는 버릴 수밖에 없다고 일갈하셨더랬다. 나만 해도 올해 노트 두 권 분량의 연구노트를 만들었지만(그렇다, 난 아직도 영인본으로 사료를 읽고 일일이 손으로 메모를 해가며 연구노트를 만든다), 그 중 대부분은 레포트에 넣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버려진연구노트는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일단 연구노트는 논문보다 재밌다. , 쭈쭈바도 꼬다리가 더 맛있지 않은가. 논문에 담지 않았다는, 혹은 못했다는 건 학술장에서 인정받기엔 (아직은) 어려운 얘기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딱딱한학술장이 감히 담아낼 수 없는 발랄하고 참신한 얘기라는 의미기도 하니 말이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말하자면 역사가 장지연이 논문에는 싣지 않거나 못한 연구노트처럼 읽힌다. 연구노트라 해서 산만하다거나, 허무맹랑하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탁월한 역사 글쟁이답게, 장지연은 유려한 문장과 매끈한 서사로 연구노트를 한 편의 이야기로 묶어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이 책이 역사가가 사료를 읽고, 분석하고, 고민하며 논리와 얼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독자에게 생생히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양서는 주어진 사실이나 서사를 독자에게 쉽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독자 역시 역사 교양서를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거나, 복잡한 맥락을 보다 잘 이해하는 것 정도를 독서의 목표로 삼고 말이다.

 

반면 이 책은 (장지연의 선별을 거치긴 했지만) 사료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지은이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각을 펼쳐가는 모습을 독자에게 거의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장지연이 사료를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요새 역사교육의 화두이기도 한 역사하기(Doing History)”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게 된다. 역사가의 연구노트를 엿보는 기분을 선사했다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이 책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일종의 문예공화국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흔히 요즘 독자는 지적으로 게으르기에, 지은이가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주지않으면 책이 팔릴 수 없다고들 한다. 내가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의 꾸준한 인기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정 반대다. 독자는 주어진 사실과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사료를 읽고 판단하고 싶어 하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다만 지금까지는 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서가 없었을 뿐이다. 장지연은 자신의 연구노트를 선뜻 독자에게 공개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역사 글쟁이답게 이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끔 풀어냈다. 그랬기에 다양한 독자가 책을 읽으며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감도 잡아보고, 감상과 서평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도 만들어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단순히 좋은 교양서의 모범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나아가 대학에서의 역사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 학생이나 독자에게 단순히 주어진 사실과 서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이들을 역사하기에 참여케 하려면 어떤 방법과 전략을 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나 공공역사가 화두인, 정확히 말해 역사에 구태여 공공을 붙이지 않고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책은 역사가 기존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설민석화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접촉면을 넓혀갈 수 있는 탁월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이 책을 매개 삼아, 그간 애매하게 퉁쳐왔던 역사와 대중의 소통에 대한 보다 많은 논의가 이뤄지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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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유교걸 - 어느 페미니스트의 동양 고전 덕질기 오봄문고 8
김고은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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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쩌다 유교걸》

이미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유교맨이다. 리추얼을 중히 여기고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내가 정말로 공맹의 가르침을 인생의 신념이나 철칙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교는 내게 일종의 생존술, 그러니까 내가 이만큼 하면 남도 최소한 날 막 대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자구책에 가깝다. 물론 그 기대는 종종, 아니 자주 배반당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한문을 모른다. 유교 경전을 '각 잡고' 읽어본 적도 없다. 유교를 하나도 모르면서 맹자로부터 민주주의와 양심의 기원을 찾았던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내게 유교란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이롱 유교맨인 나와 달리, 김고은은 정말로 진지한 유교걸이다. 꽤 오랜 시간 유교 경전을 공부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진지하게 유교의 가르침을 믿는 동시에, 꽤나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래 여성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가는 현실에 분개하고, 돼지 새벽이와 잔디의 생추어리 활동에 꼬박꼬박 참여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기만을 바라는, 일제시대 태어났다면 소학교 선생으로 조용히 살다 도둑같이 해방을 맞이했을 나 같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고루한' 유교와 어울리는 사람은 김고은보다는 내 쪽이겠지만, 정작 유교에 훨씬 진심인건 내가 아닌 김고은이다.

김고은의 첫 단독 저서(그는 이미 여러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고,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훌륭한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다)인 《어쩌다 유교걸》은 김고은이 페미니스트-비건이자 유교걸이라는, 얼핏 모순되는 두 정체성을 끌어안기까지의 좌충우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유교맨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던, 그러니까 피식자에 가까웠던 나와 달리 김고은은 구태여 유교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총명하고,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냈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을 자퇴했다. 아마 그가 조금만 덜 정의롭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중학생 시절 꿈인 변호사가 되어 억대연봉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교는 그런 '알파걸' 김고은에게 (아마도) 처음으로 당혹감과 난감함을 알려준 존재였다. 그는 제도권 바깥의 인문학 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와 길드다에서 처음으로 동양 고전 공부에 도전하지만, 꽤 오랜 시간 '열등생'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가 유교를 다시 보게 된 청소나 식사처럼, 일상을 꾸리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다. 그때부터 김고은에게 유교란 이해할 수 없는 골동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텍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김고은이 유교의 가치와 쓸모를 증명하는 방식은 어쩌면 지극히 고전적이다. 그는 유교를 둘러싼 후대의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자고, 공자가 《논어》를 처음 썼을 때의 역사적 맥락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공자께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 OOO(여기엔 주로 주자학이 들어간다)이 오염시킨 유교를 원래의 '올바른' 모습으로 복원해야 해!!"는 정약용, 오규 소라이, 캉유웨이 등 유교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들이 즐겨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유교의 역사란 곧 주석의 역사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김고은은 의식했건 그렇지 않건 선배들의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유교걸》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져왔고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진짜' 유교란 이런 것이라 주장하는 주석서일 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고은이 유교에 단 주석이 퍽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의 충(忠)으로부터 자기 배려를, 서(恕)로부터 관계성을, 예(禮)로부터 리추얼을 이끌어낸다. 가부장적, 억압적, 봉건적 등 온갖 나쁜 수식어는 다 붙는 우교를 가장 급진적으로 전유코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유교를 구원하려는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 김고은이 발딛고 선 또 하나의 지반인 페미니즘을, 거꾸로 유교를 통해 구원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기실 김고은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온 사람이다. 비단 또래 여성이나 비인간동물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썩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기성세대와도 대화를 거듭하며 이해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고민과 노력을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들 너무나도 손쉽게 손절과 혐오를 말하고, 어느 진영에 서있든 내가 낸 돈만큼 무언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소비자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김고은은 유교를 통해 관계와 연대의 가치를 복원하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의 연속에 가깝다. 《어쩌다 유교걸》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불협화음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김고은은 유교와 페미니즘을 함께 가져가는 길이,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의례를 통해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를 통해 가장 '앞선'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으며, 이를 위한 고군분투를 이 얇은 책에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김고은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왜 '굳이' 유교여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뚜렷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오늘날 우리의 의식세계는 명료한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그가 책에서 인용한《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나 《숲은 생각한다》를 구태여 유교라는 필터를 거쳐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이미 서양철학에도 있는 이야기를 왜 유교에서 끌어와야 하는지 질문할 수도 있다.

김고은은 이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유교는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잠들어 있다는, 빤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는 주장을 끌어오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는 유교의 '낯설음'이 재밌다고, 이를 통해 자신의 현장에서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고 싶다고 말이다. 유교맨을 자부하면서도, 나는 유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김고은도 이런 거창한 목표를 꿈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교의 '낯설음'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 바꾸고자 하는 그의 도전은 존경과 애정의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유교에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라는 새로운 주석을 달고자 하는 김고은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앞으로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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