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세밑마다 올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정리해보곤 합니다. 이런 걸 읽었나싶어 눈이 휘둥그레지는 책도, 참 좋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책도 있습니다. 그렇게 올해를 함께한 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열권을 추리면, 그제야 제대로 일 년을 마무리한 느낌입니다.

올해는 총 143권의 책을 읽었고, 30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예년과 달리 올해의 책 Best 10은 가급적 2019년에 나온 책들로 꼽아보았습니다. 언론사에서 꼽은 2019년의 책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언론사끼리 겹치는 책들도 많았고요. 그래서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나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처럼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음에도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책들도 있습니다.

내년에도 열심히 읽고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는 일주일에 한 편 이상 서평 쓰기입니다. 좀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저자를 기다리게 하는 서평가가 되고 싶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1. 아빠의 아빠가 됐다

돌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돌봄이 드물게나마 세간의 관심을 끄는 건 그것이 일단락되었을 때, 그러니까 돌봄노동자가 고통 끝에 목숨을 끊거나 효자/효녀라며 정부나 시민단체로부터 표창장을 받았을 때뿐이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의 돌봄은 이런 극적인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돌봄은 삶이 흘러가는 한, 계속 이어진다. 그렇기에 그는 흘러가는 삶을 어떻게든 주체적으로 이어보려 노력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돌봄을 사회적 문제로 끌어올리고자 고민한다. 자신의 글이 어떻게 읽힐지를 고민하는 사려 깊은 저자, 영웅서사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서사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https://brunch.co.kr/@msg2012/38)

    

 

 

2. 종이 동물원

이른바 전통은 발목을 붙잡는 구닥다리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특히나 가장 보편적이며,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SF를 쓸 때는 더더욱. 하지만 켄 리우는 중국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민감하게 의식하며, 그 전통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SF를 쓴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현대적작품들보다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결코 보편을 자임할 수 없는 비서구 출신으로서, 전통을 어떻게 이 아닌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단편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가장 제국주의적인 장르인 스팀펑크를 식민지 홍콩을 무대로 통쾌하게 전유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이 책으로 유영번역상을 받은 장성주의 맛깔나는 번역 역시 독서의 즐거움을 돋운다.

    

 

3. 금융과 회사의 본질

왜 기업인과 국회의원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합법적으로책임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까? 김종철의 금융과 회사의 본질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영미 정치사상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한국인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운 역작이다. 로마시대 확립된 배타적인 재산권이 기독교의 위세에 눌려 중세 내내 잠들어 있다가, 근대 초 잉글랜드에서 가면과 같은 텅 빈 인격과 합체해 마침내 개인과 국가를 불멸의 채무자로 전락시키는 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저자가 미래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내세운 기본자산 역시 자칫 사회복지의 대대적인 축소를 초래할 수 있는 기본소득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제목과 표지를 좀만 더 기깔나게 뽑았어도 여러 언론사에서 이 책을 올해의 베스트로 꼽았으리라는 아쉬움이 크다.

(https://brunch.co.kr/@msg2012/10)

 

    

 

4. 31일의 밤

주변부의 근대는 어딘가 어설프고 조잡하다. 지배담론이든 저항담론이든 죄다 중심부의 그것을, 한 단계 떨어지는 수준으로 베껴온 게 대부분이다. 그런 근대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주변부라는 위치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권보드래는 이야기한다. 비록 그 원산지가 중심부일지언정, 주변부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전혀 다른 에너지와 벡터를 갖고 끝내는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변부의 근대가 빚어낸 가능성의 최대치이자, 한반도의 오늘을 이루는 풍요로운 수원으로서 3.1을 새로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너비와 깊이를 부여받은 3.1이라는 호수로부터 무엇을 길어다 쓸 수 있을지, 저자는 3.1을 살아간 수많은 무명씨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고 있다.

(https://brunch.co.kr/@msg2012/11)

    

 

5. R. H. 토니-, 사상 기독교

오늘날 바람직한 종교인이란 모름지기 사적으론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이를 공적인자리에까지 끌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종교의 본령에 부합할까? 종교란 본디 세속과 신성을 아우르며 개인의 삶에 리듬과 안정감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는데 말이다.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것도 바로 개인의 내면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종교의 소심함이었다. ‘과학을 표방한 맑스주의나 페이비언 협회와 달리, 그는 서구인의 삶에 깊게 뿌리박은 기독교의 전통을 쇄신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을 조명한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의 문제는 세상을 아우르고 북돋을 도덕이 없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https://brunch.co.kr/@msg2012/39)

    

 

6. 바이마르의 세기

군부독재시기, 아니 지금까지도 한국인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지나친 자유로 끝내 자유를 파괴한 반면교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바이마르의 세기는 그러한 바이마르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독일 망명자들이 펼쳐내는 흥미로운 지성사다. 나치즘의 광풍에 나라를 내주었다는 개인적 회한과, 이들을 받아준 미국 정보기관의 의도가 맞물리며 독일 망명자들이 생산한 담론은 1950년대 자유세계의 이념적 나침반 역할을 했다. 비단 냉전 지성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후발국 지식인들이 이른바 영미 근대성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를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아울러 현대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같은 시기에 독립한 비서구 국가들보다는 오히려 일본과 독일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통찰 역시 던져준다.

    

 

7.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역사란 곧 해석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하는 사례는, 한국 전근대사에선 아마도 병자호란이 아닐까싶다.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이 신생국 청에게 무력하게 패배한 이 사건을 두고, 그간 수많은 해석과 평가가 갑론을박을 벌였다. 구범진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이 지리한 개싸움을 끝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책으로, 아주 오래 전 역사연구에서 폐기된 줄 알았던 진실 탐구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병자호란이 조선의 오만과 게으름이 아닌, 홍타이지의 야심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라고 일갈한다. 홍타이지는 황제의 꿈을 이뤄줄 마지막 인피니티 스톤인 조선을 손에 넣고자 심혈을 기울였고, 실력에 천운이 겹치며 끝내 목표를 이뤘다. 한문과 만주어는 물론, 첨단 과학기술까지 동원해 이중삼중으로 그물을 쳐 진실을 포획하는 저자의 치밀함을 보노라면, “서울대 동양사학과란 이런 것인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8.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18세기 조선 양반들은 왜 천주교를 받아들였을까?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성리학이라는 든든한 이념적 무기까지 갖춘 그들이 구태여 믿음을 갖고, 끝내 그 믿음 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경이와 의문을 동시에 안긴다. 윤춘호의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는 이 복잡함을 풀어가는 열쇠로 최초의 영세자였으나 배교자로 생을 마감한 이승훈 베드로에 주목한다. 책의 백미는 단연 이승훈이 여러 사람들과 나눈 가상의 편지글이다. 천주교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미묘한 심경, 그리고 각자의 의도가 묘하게 어긋나고 부딪히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보노라면, 당시 조선에서 믿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나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https://brunch.co.kr/@msg2012/36)

    

 

9. 아편과 깡통의 궁전

의외의 사실일 수도 있지만, 서평 쓰기 어려운 건 너무 못 쓴 책보다는 외려 너무 잘 쓴 책 쪽이다. 저자가 다 해버려서 서평가가 도무지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말라카 반도 페낭 화인(華人) 사회의 흥망사를 다룬 강희정의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 딱 그런 책이다. 완성도면에선 올해 최고의 책으로,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걸 넘어 얄미울 지경이다. 세계를 재패한 대영제국은 편법을 동원해 페낭을 사들이고는, 정작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해골정부의 살과 근육을 채워간 건, 복건과 광동에서 온 중국계 이주민들이었다. 아시아의 바다를 주름잡은 중국계 네트워크의 화려한 역사로도, 중국과 영국, 말레이시아라는 삼중의 정체성 사이를 오고간 화인들의 트랜스내셔널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무척이나 흥미롭다. 혹 책을 읽고 한반도에는 이들 화인의 입김이 닿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면, 강진아의 이주와 유통으로 본 근대 동아시아 경제사를 엮어 읽기를 권한다.

    

 

10. 열세 살의 여름

다 큰 어른들이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때는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순수하고 행복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고픈 마음에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그때도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하고, 다투고, 설레여도 하며 지냈다. 이윤희의 만화 열세 살의 여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선하지만 소심한 여자 주인공, 조용하고 비밀스런 남자 주인공, 깨방정이어도 속은 깊은 주인공의 단짝, 딱 축구 좋아하는 남자애지만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는 서브남주까지, 등장인물들은 연애만화의 클리셰 그 자체다. 하지만 그렇게 빚어낸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따뜻한 선과 색으로 아이들의 미묘한 감정을 탁월하게 그려내기에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된다. 1998년 여름이 배경이지만 응답하다 시리즈처럼 추억팔이에 치중하지 않고, 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에 집중한 점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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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 2020-02-18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덕분에 10권 모두 읽어보고 싶어요

유찬근 2020-02-29 13:03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
정진희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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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31, 오키나와의 슈리성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비록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한 번 전소된 것을 1992년에 복원한 모조품일지언정, 독립적인 해상왕국이었던 류큐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이었던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의 상실감은 컸다.

과거 바다 건너 한반도와도 활발히 교류했던 류큐 왕국의 궁궐이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에 많은 한국인들 역시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흔히 사람들이 일본하면 떠올리는 높게 솟은 천수각이 아닌, 조선의 경복궁과 유사한 정전(正殿)의 모습도 한국인들의 안타까움을 더했으리라. 실제로 슈리성의 주인인 류큐 왕국은 당시의 글로벌 스탠다드인 조공-책봉 체계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열도 한구석에 처박혀 자족적으로 살아온 왕따일본과는 달랐다.

하지만 류큐 왕국은 조선처럼 전형적인유교국가는 아니었다. (사실 페어뱅크 등에 의해 전근대 동아시아 조공국의 전형으로 취급되어 온 조선은, 외려 매우 특수한케이스였다)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슈리성은 동쪽을 등지고 서면(西面)하고 있다. 대체로 북쪽을 등지고 남면하고 있는, 경복궁을 비롯한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정전과는 다르다. 게다가 슈리성 정전의 2층에는 국왕을 제외한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 사제들만의 비밀스런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앞바다에 봉긋이 솟아오른 이 작은 섬나라에는, ‘유교조공-책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정진희의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이 주목하는 건 바로 이러한 특별함이다. 동아시아 여타 지역에 비해 국가의 성립이 늦었던 류큐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무속과 신화를 적극 활용했다. 기코에오기미(聞得大君)를 정점으로 한 여성 사제 조직이 각종 의례를 주관했고, 국왕은 성지(聖地)에서 매년 영험한 힘을 부여받았다.

신화 역시 나라를 떠받치는 중요한 대들보였다.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류큐의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책을 읽다 보면 류큐 왕국은 신화라는 이야기를 엮어 바다에 띄운 나룻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류큐 왕국의 본섬인 오키나와에 국가라 불릴만한 정치체가 들어선 건 14세기 무렵이다. 그 이전까진 여러 아시(按司)들이 각지에 구스쿠라는 성채를 쌓고 경쟁하는, 일종의 춘추전국시대가 계속되었다. 여러 아시들은 스스로를 태양이라는 뜻의 데다로 일컬었는데, 이는 군사적 용맹성의 표상이었다. 일단 구스쿠를 쌓고 아시의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데다를 자임할 수 있었으니, 당시 류큐의 하늘엔 태양이 여러 개 떠있었던 셈이다.

상황이 달라진 건 영조왕(재위 1260~1299) 때부터다. 류큐 개벽신화에 등장하는 천손씨의 후손이자 선양에 의해 중산왕(中山王)의 자리에 오른 영조왕은 데다가 아닌 데다코(日子)’로 불리었다. 겨우 아들 자하나 더 붙은 게 무어 그리 대수냐 생각할 수 있지만, 아들이란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독점적으로물려받은 존재다. 이제 너도나도 데다를 칭하는 시대는 지나고, 초월적인 태양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릴 능력을 부여받은 단 한명의 지배자만 남은 것이다.

 

중국의 천자에 상응하는 데다코의 등장과 함께, 각종 의례도 재편되기 시작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영험한 마나인 세지, 본래 각 구스쿠의 아시들이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힘이었다. 허나 영조왕 이후 바다 저편의 초월적 타계인 니라이 카나이로부터 세지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데다코 한 명 뿐이었다. 세지를 충전하는 성지(聖地)데다가아나(태양의 굴)’ 역시 동쪽 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인 구다카지마(久高島) 한 곳으로 굳어졌다.

류큐의 국왕은 매년 2월 험한 바다를 건너 구다카지마에서 세지를 충전하고 돌아옴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 한편 해상왕국의 정체성을 되새겼다. 서문에서 언급했던, 서쪽을 바라보는 슈리성의 정전 역시 동쪽으로부터 세지를 부여받는 태양왕의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노로(祝女)라는 여성 사제로 이루어진 전국적 무녀조직도 태양왕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상진왕(재위 1477~1526)이 임명한 최초의 기코에오기미부터가 본디 왕의 누이였던 사람이다. 국왕과의 혈연관계가 오라비를 지켜주는 누이 신인 오나리 가미에 대한 류큐의 전통적인 신앙과 포개지며, 기코에오기미는 오라비 국왕을 서포트해주는 누이 사제로 자리매김했다.

기코에오기미의 즉위식은 구타가지마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섬인 세화 우타키(齊場御嶽)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슈리성 정전의 2층은 국왕을 제외한 남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국왕은 매일 아침 이곳에서 여성 사제들과 함께 동쪽을 향해 의례를 지냈다. 이 모든 게 성()과 속()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국왕의 세지는 누이 사제를 통해 날마다 새로이 차올랐고, 갱신된 세지는 국왕이 나랏일을 보는데 매우 요긴하게 쓰였다. 다마키 마사미의 말을 빌리자면, 기코에오기미는 최대의 왕권 이데올로그였다.(p.117.)

 

성과 속이 한데 얽혀 서로를 북돋으며 나라살림을 꾸려가던 류큐의 풍경은, 그러나 1609년 이후 크게 뒤바뀌기 시작한다. 시마즈 가문이 이끄는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이 류큐를 침략해 수도인 슈리(首里)를 초토화하고 국왕인 상녕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이후 류큐는 전통적인 종주국인 중국과 더불어 사쓰마번과 에도 막부 역시 상전으로 섬기는, 이른바 양속(兩屬)체제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메이지 신정부에 의한 오키나와현 설치(1879)까지의 시기를, 사쓰마번 침략 이전 시기인 고류큐와 구분해 근세 류큐라 부른다.

수도가 불타고 국왕이 잡혀간 초유의 사태 앞에서, 류큐의 지도층은 무엇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국가기록이 전소되기도 했거니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의 역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는곧 미래를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작은 한자와 가타카나를 표기문자 삼아 일본어로 쓴 중산세감이었다. 편찬자 향상현(向象賢, 일본식 이름은 하네지 초슈)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적 교양을 익혔을 뿐 아니라 류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시마즈 가문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 일본에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는 류큐의 창세신화를 일본의 기기신화(고사기일본서기에 수록된 일본신화)와 비슷하게 재구성한다. 일본에 예속되고자하는 식민지 근성이 아닌, 류큐 역시 일본과 같은 신국(神國)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실제로 향상현을 지배한 감정은 일본에 대한 동경보다는, 일본에 무력하게 무너진 고류큐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섭정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녀조직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노력했고, 국왕의 구다카지마 행행(行幸)을 끝내 폐지시켰다. 류큐 창세신화의 재구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향상현은 고류큐의 각종 의례와 관습을 태초의 것으로 봉인해버림으로써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여지를 만들었다.

 

향상현의 뒤를 이은 학자관료 채탁과 그의 아들 채온이 편찬한 중산세보에 이르러, 신화라는 이야기는 다시금 재구성된다. 부자 모두 유학자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외려 중국에 대한 동경이 강해지고 있었기에, 창세신화에 유학적 색채가 짙게 녹아든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문자로, 중산세감과 달리 중산세보는 가나문자 없이 순수하게 한문으로 쓰였다.

문자만 달라진 게 아니다. 중국의 복건성을 기준으로 류큐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음양론에 기반한 유교적 합리주의가 태양왕 데다코를 몰아냈다. 데다코라는 왕가의 신화는 류큐라는 국가의 신화로부터 분리되었고, 창세신화의 자리를 꿰찬 건 후자 쪽이었다. 그간 왕권을 지탱해오던, 기코에오기미를 정점으로 한 무녀조직의 위상 역시 꾸준히 약해져갔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농경의 수호자라는, 유교의 이상적인 군주에게 어울리는 민본주의적인상징이었다.

 

이처럼 류큐의 지도층이 난관을 극복할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몇 가지 의문과 아쉬움 역시 남긴다. 가장 큰 궁금증은 역시, 엄연한 해상왕국인 류큐의 신화 속에서 유달리 두드러지는 농경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16세기부터 서구 세력이 아시아로 진출하고 명나라가 해금을 철폐하여 류큐의 해상무역 경쟁력이 약화된 데다, 1609년 사쓰마의 침략 이후 각종 수탈이 횡행했기에 왕조가 불가피하게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창세신화에서 농경을 강조한 것 역시 변화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류큐의 창세신화에서 바다가 갖는 중요성은 농경의 그것에 비해 확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다는 기껏해야 흰 항아리에 담긴 보리와 조, 콩을 운반하는 매개(유로설전에 남아 있는 구다카지마 행행의 기원)거나 중산왕 찰도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아 끝내 왕으로 추대되게끔 도와주는 수단에 불과하다.(채온본 중산세보) 그나마도 찰도가 바다를 오가며 사고팔았던 건 농기구를 만들기 위한 철괴였다.

애초에 사쓰마의 침략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왕조가 찾은 해법이 농경이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류큐의 본진인 오키나와섬(1206.99)은 제주도(1833.2)보다도 좁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에서 이야기했듯 류큐는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아무리 농경에 올인한들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산다고, 몇 세기에 걸쳐 구축해온 무역 네트워크도 남아있었을 텐데 말이다.

 

 최근 학계에선 해상세력의 움직임을 육상 정치권력(왕조)종속변수가 아닌, 역동적인 독립변수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작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바다에서 본 역사역시 해상세력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동아시아사 연구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트렌드에 비추어보았을 때, 류큐의 창세신화에서 드러나는 농경의 엄청난 존재감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온 바다를 누비고 다닌들, 국가가 자리한 곳은 배가 아닌 육지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저자가 (필연적으로 농경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공식적인 창세신화에 집중한 나머지, 바다의 존재를 미처 살피지 못했던 걸까? 원래 쓰기로 마음먹었다던 류큐에 대한 교양서를 혹 다시 내게 된다면, 저자가 류큐에게 바다란 무엇이었는가를 예의 그 고운 문장으로 조곤조곤 알려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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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H. 토니 - 삶, 사상, 기독교 대우학술총서 신간 - 사회과학(번역) 622
고세훈 지음 / 아카넷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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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14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끝내 병원으로 실려간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이낙연 총리와 자웅을 겨루는 그이지만, 열성 지지자만큼이나 안티도 많아 지지층 확장에 애를 먹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애매한 태도, 강한 반공주의, 리더십 부재, 권위의식까지, 아직까진 그를 지지해야 할 이유보단 그렇지 않은 이유가 많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황 대표에 대한 지지를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다름 아닌 그의 신앙심이다.

황 대표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다. 사법연수원 시절 신학대학원을 졸업해 전도사가 되었고, 개신교 계열의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해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절을 찾고도 합장을 하지 않아 이슈의 중심에 섰다. 엄연한 세속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황 대표의 행보는 사적인 신앙을 공적인 자리에 끌고 들어온, 비판받아 마땅한 언동이리라.

하지만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가둬두는게 가능할까?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에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에 안정감과 리듬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다. 신성은 고고한 성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에 깃들었고, 일상은 신성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양자는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속정부가 무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간 교회와의 싸움 역시, 본질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할 권한을 누가 갖느냐에 있었다. 어쩌면 황 대표는 그 누구보다 종교의 본령에 충실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는 기껏해야 믿을 자유 따위에 만족할 수 없다. 세속주의에 떠밀려 무력하게 사라지거나, 세상을 북돋을 새로운 도덕을 마련해야 한다. 20세기 전반 영국 노동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는 후자의 입장에 섰다. 그 역시 황 대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문제는 종교가 개인의 내면에 안분지족한데 따른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다다른 결론은 완전히 달랐다. 고세훈의 R. H. 토니- , 사상, 기독교는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에 대해 탐구한 훌륭한 책이다.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한국인이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1880년 인도 캘커타에서 엘리트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1962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토니의 삶에는 항상 기독교가 함께했다. 명문 사립고인 럭비(Rugby School)에선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윌리엄 템플과 우정을 쌓았고, 옥스퍼드 베일렬 칼리지에선 성공회 사제 찰스 고어를 통해 사회적 도덕주의에 눈 떴다. 특히 찰스 고어는 토니 평생의 스승으로, 앵글로-가톨릭주의를 혁신하여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 것을 주문한 그의 신념은 토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토니는 그리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하진 않았고, 주변으로부터 나이롱 신자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토니의 마지막 제자인 에일머의 말마따나, 그는 가장 먼저 크리스천이었고, 그 다음에 민주주의자였으며, 그 다음에 사회주의자였다.(p.16.)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영국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토니는 우선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소환하여 당대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기 위해(p.253.)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유럽의 역사를 훑었고, 그 결과가 바로 세기의 명저인 16세기 농업혁명(1912)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1926)이다. 특히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하 발흥)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1540년에서 1640년까지의 잉글랜드를 토니의 세기로 불리게 할 만큼 역사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토니는 학부 졸업을 끝으로 제도권 교육을 마무리했으니, 그야말로 척척석사인 셈이다.

 

토니는 발흥에서 세간의 통념과 달리, 자본주의는 이미 중세에 그 싹을 틔웠다고 이야기한다. 수도원이 운영한 대농장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로 부를 일궈갔고, 이탈리아의 가톨릭 은행가들은 전 유럽에 지점을 세우고 광대한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초 유럽 최대의 도시는 저지대의 안트베르펜으로, 당연히 가톨릭을 믿었다.

종교개혁의 사도 루터가 공격한 것도 당대 만연했던 물질주의였다. 그는 로마에 또아리를 튼 탐욕스런 적그리스도가 독일의 부를 쪽쪽 빨아들이는 현실에 크게 분개했고, 사제를 거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 개개인이 주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창했다. 그 유명한 이신칭의론과 만인사제론이다.

하지만 루터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으니, 교회조직의 타락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일체 부정해버린 것이다. 비록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가톨릭은 절제되지 않은 부를 규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법에 의거해 이자를 통제할 정교한 방안을 고민했고, 청지기사상(stewardship)의 전통에 따라 재산권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안타깝게도, 루터는 기성교회를 격렬히 비판했을 뿐 그간 교회가 맡아온 역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개개인의 양심이었지, 생활고에 찌든 독일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가 아니었다. 루터로 인해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조직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반면, 믿음은 사람들의 내면으로 퇴각해버렸다. 그 결과,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말았다. 루터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만 것이다.

 

루터와 달리 칼뱅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었으며, 쥬네브에서 이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그는 이익추구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를 신의 뜻에 종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고안된 개념이 바로 소명으로, 본디 일상의 노동마저 수도승처럼 경건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실제로 칼뱅이 컨시스토리(consistory, 일종의 자문회의 겸 감찰기관) 의장으로 평생 시민들을 단속했던 쥬네브에서, 상행위는 철저히 종교에 종속되었다.

반면 청교도가 박해받는 소수파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발생했다. 종교가 상행위를 붙잡아두기는커녕 상행위가 종교를 방패삼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분명 칼뱅주의의 소프트웨어는 반자본주의적이었다. 허나 그 하드웨어, 예컨대 예정설이나 소명의식, 엄격한 기율 등은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졌고, 잉글랜드에서 살아남은 건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쪽이었다. 토니 자신의 우아한 비유처럼, 영적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에 떨어질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p.298.)

 

1660년의 왕정복고를 기점으로, 잉글랜드에서 교회는 사회제도들을 길들이는 독자적인 가치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빈곤은 사회문제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전락했다. 로크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재산의 보존이라 천명했다. 이 신성불가침한 재산권을 행사하는 데 뒤따르는 책무는, 물론 전혀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면 경제는 윤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기규제 메커니즘이며, 그 언어는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았다.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나, 이제 사람들은 특별히 윤리적인 행위를 할 필요 없이 그저 성실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될 터였다. 개개인의 이기심도 보이지 않는 손을 거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를 거치며 탈취사회가 도래한다. 탈취사회란 첫째로 권리와 기능이 분리되고, 둘째로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며, 셋째로 경제이익의 무한한 추구를 긍정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탈취사회를 특징짓는 소유방식은 이른바 무기능자산으로, 사회적 이윤을 다하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데만 쓰이는 자산을 일컫는다. 무기능자산은 탐욕스럽게 제 몸집을 불려가고 사회의 분열은 점점 더 심해져가는 가운데 맞이한 20세기를, 토니는 깊이 우려했다.

 

그렇다면 탈취사회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토니는 페이비언 협회의 개량적 사회주의는 답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공리주의적인 마인드로 생활수준의 개선에만 치중한다면 사람들은 서비스의 혜택을 입는 소비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주의 극복 역시 요원하다는 게 토니의 입장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방을 청소하면서 영혼의 창은 닫아두는 우를 범했다. 토니가 보기에 개개인의 도덕적 각성이 없는 물질적 진보는 오히려 탈취사회의 폐단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토니에게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다름 아닌 도덕,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정신의 회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위계가 뚜렷한 중세 가톨릭의 영적 유기체 사회로 돌아가길 바랐던 건 아니다. 토니는 무한하고 전능한 신 앞에서 모두가 똑같이 작아짐으로써 평등을 이루는 사회, 동료애로 연대하며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회, 자산이 더 이상 이윤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통의 도덕에 이바지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국가와 시장이 아닌, 도덕의 지도아래 모두가 연대하여 나름의 쓸모를 담당하는 사회, 토니는 이를 기능사회라 명명한다.

 

토니는 자신이 살았던 20세기를 위한 도덕을 구태여 새로이 창안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오랜 세월 서구가 공동의 자산으로 가꿔온 기독교라는 샘에서 지혜를 길어 올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아마도 시민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지반을 갖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해온 성리학은 19세기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소멸해버렸다. 무력한 황실을 뒷방으로 밀어내고 조선을 접수한 일본의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일체의 정치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문인 아니면 테크노크라트인 사회에서 사회를 통합할 도덕을 마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도덕을 갖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분단과 친일이라는 과오를 안고 출발한 정부가 강요하는 도덕은 사람들 사이로 쉽사리 녹아들지 못했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도덕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도덕이 계속 경합했으나, 그 어느 쪽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2019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그간 사회를 아우르는 도덕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산업화 서사민주화 서사는 각각 박근혜 탄핵과 조국 사태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형편이다.

 

다시 황교안 대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황 대표, 그리고 그의 행보를 지지하는 적잖은 기독교인들은 최소한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도덕을 향한 갈망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러한 갈망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애매한 다원주의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화 서사민주화 서사를 대신할 새로운 도덕을 제시할 것인가? 어쩌면 성리학이 저지른 최악의 잘못은 조선을 끝내 멸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게 아니라 너무 빨리, 그리고 추하게 무너짐으로써 이 땅에 다시는 세상을 북돋을 도덕을 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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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이매진의 시선 6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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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경기도의 한 공립 유치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특수반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돌본다. 유치원의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간다. 아이가 등원해 옷을 정리하고, 우유를 마시고, 놀이를 하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방과 후 수업을 듣고 하원할 때까지, 아이 곁에서 그의 하루를 함께한다. 힘든 날은 아이고 되다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고되지만, 그만큼 배우고 느끼는 것도 많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만큼, 나도 그들에게 받는다.

하지만 나는 고작해야 6시간, 하루의 4분의 1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할 뿐이다. 내 몫의 돌봄노동은 늦어도 오후 4시면 끝나지만, 아이들은 계속해서 돌봄을 필요로 한다. 유치원을 졸업한들 돌봄으로부터 졸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특수학교로 자리를 바꿔 보다 전문적인 돌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한 돌봄이란 아주 짧고, 피상적인 셈이다. 마지막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면, 자리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난 과연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돌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돌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돌봄에 대한 글을 썼다. 조기현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은 건 글을 쓴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페이지를 넘겨가며, 후회와 부끄러움에 귓바퀴가 빨개졌다. 이 책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결코 돌봄을 논하는 글 따윈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얇은 핑크빛 책은 그만큼 깊고 너른 시야로, 담담하고 따뜻하게 돌봄을 성찰한다. 감히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되는, 갑자기 죽을병에 걸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청년의 모습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장기가 적출되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고난 끝에 수술비를 마련해 부모를 살리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짧고, 굵게 마무리된다.(p.165.)

현실 속 조기현이 마주한 돌봄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2011년 양옥집을 수리하던 아빠가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로 실려 온 뒤부터 그의 돌봄자가 된 조기현의 삶은, 그럼에도 계속 흘러간다. 아들의 아들이 된 아빠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이나 중환자실에 실려가도, 당뇨와 고혈압, 갑상선 약을 달고 살아도, 발에 라면국물을 쏟아 심각한 화상을 입어도, 아빠는 꾸역꾸역 살아나간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p.81.)

 

계속해서 흘러가는 삶 속에서 조기현은 영웅서사에 도취할 수도, 자기연민에 파묻힐 수도 없다. 돌봄이라는 고난을 극복했다며 뿌듯해하거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며 절망하기엔 남은 삶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기현은 섣불리 돌봄자로서의 삶을 끝내기보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고자 한다. ‘흐름이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닥쳐오는 운명이라면, ‘이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서사를 만들어가려는 주체적인 노력이다. 그는 돌봄을 거부하지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는 새로운 삶을 이어가보려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조기현이 이어간 삶의 궤적은 견고하고, 또 아름답다. 그는 충북 음성의 공장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면서도 취침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공장에서 나온 뒤에는 시민단체에서 서정성과 사회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오랜 꿈이었던 영화 역시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빠는 그런 조기현에게 짐인 동시에 버팀목이다. 아빠의 존재는 그를 지독히도 힘들게 만든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쫓아온다며 뛰쳐나가 애를 먹이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아빠를 돌보며 조기현은 적금 깨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오랫동안 못할 수도 있다고 담담히 체념한다.(p.78.)

하지만 돌봄을 통해 조기현은 비로소 아빠를 이해하고, 그와 더 친밀해진다. 돌봄이 안겨준 고민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더욱 치열하게 성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돌봐야 하는 아빠의 존재는 세상의 파고에 홀로 휩쓸리지 않게끔 그를 단단히 붙잡아준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인간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처럼, 조기현과 아빠는 서로 의지하고 또 갈등하며 망망대해를 해쳐나간다.

 

이러한 조기현의 이음, 세상은 쉽사리 긍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자신의 서사를 써나가려는 건강한 시민이 아니라, 기특하고 불쌍한 효자로 취급될 뿐이었다. 가난한 흙수저가 사회변혁이나 예술 같은 숭고한꿈을 꾸는 일 역시 허용되지 않았다.

맘대로 불행의 낙인을 찍었으면 지원이라도 제대로 해줬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아빠가 처음 쓰러졌을 때는 8년 전에 이혼한 엄마가 아빠 앞으로 들어놓은 실비보험과 빈번히 이루어진 금전거래 탓에 긴급 복지 지원을 받지 못했다. 3년 뒤 기초생활수급자 지정을 위해 찾은 주민센터에서는 복지 담당자의 정교한 논리에 가로막혀 끝내 삶을 볼모로 말의 칼을 휘둘러야 했다.

돌봄을 받는 입장인 조기현의 아빠 역시 삶을 이어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일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던 그는 중환자실에 실려간 뒤로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뒤에도 아빠는 여전히 움직거리고싶어하지만(p.157.),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화분에 물을 주거나 청소하는 것밖에 없다.

 

조기현은 이야기한다. 돌봄이 낙인이나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돌봄을 주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간 짙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돌봄을 전 사회의 문제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누구든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소 한 번 이상은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아야만 한다는 점에서, 돌봄은 그 무엇보다 공적이다. 그런 만큼 돌봄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가정여성의 울타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

물론, 돌봄이 공적인 문제라 해서 모두가 의무적으로 돌봄에 참여해야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기현은 상황에 따라 돌봄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8년간 아빠를 돌보며 숱하게 미래를 단념해야만했던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으리라.

그의 아빠처럼 돌봄을 받는 사람들 역시 무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만 남아있을 수 없다. 돌봄 받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거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하며, 이를 위해선 생산성을 기준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던 종래의 합의를 재고해야 한다. 어쩌면 돌봄을 중심으로 세상을 생각한다는 건 근대 이후 이어져온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뒤엎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조기현은 가난과 돌봄을 모르는 사람들을 미워한 게 미안해서 더 열심히 글을 썼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보다 당당해도 될 때에 오히려 미안해하는 저자는, 내게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경험을 특권하기보다는 이를 딛고 더 넓은 세상을 보는 저자, 적을 상정하고 사정없이 몰아붙이기보다는 차분히 대안을 고민하는 건강한 서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조기현 본인이 이야기했듯, 사회복지사가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을 사회적으로 승화하는 유일한 길은 아닐 것이다.(p.168.) 이미 그는 서사와 이미지를 통해 얼마든지 사회적 이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의 첫 책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기를, 삶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가장 강연해보고 싶은 장소로 꼽은 공공도서관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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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 교회가 500년간 외면해온 종교개혁의 진실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 헤르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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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어 도우시옵소서. 아멘.

 

1521,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라는 압력에 정면으로 맞선다. 상대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주인이자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 그 앞에서, 루터는 저잣거리의 입말인 작센 독일어로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양심에 기대어 호소한다. 분노와 당혹감으로 뒤틀린 수많은 얼굴을 뒤로 한 채, 루터는 문을 박차고 걸어 나간다.

그리고, 모든 게 달라졌다. 개인은 사제를, 라틴어를 거치지 않고도 신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탐욕스러운 로마의 지배에 맞서 독일과 저지대, 스칸디나비아가 들고 일어났고,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은 정직한 노동과 치부(致富)를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길을 텄다. 바야흐로 자유와 이성의 새 시대가 열렸다. 유럽을 휘감았던 암흑의 베일은 산산이 찢겨 다시는 이어붙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가 볼 때, 갈가리 찢겨 마땅한 암흑의 베일은 오히려 이러한 낭만적인 환상 쪽이다. 희대의 이가리 파이터이자 자기PR의 귀재 루터, 사회학의 황제로 떠받들어지는 베버에 의해 종교개혁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퍼져나가, 종교개혁 500주년(2017)을 넘긴 지금까지도 대다수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타크의 책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는 종교개혁을 둘러싼 환상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확실하게 깨부순다.

이정도면 컨셉인가 싶을 정도로 꿋꿋하게 유럽의 각종 지명·인명을 영어식으로 바꾼 게 신경 쓰이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1500~1558)를 프랑스의 샤를 5(1338~1380)로 잘못 적는 등 치명적인 실수도 있지만(p.30.), 번역 역시 무난하다.

 

저자는 우선 종교개혁의 동기부터 와장창 뒤엎어버린다. 세간의 이해와 달리, 종교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민중의 영적인 갈망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어디까지나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하던 세속군주들이 주도한 정치적 사건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루터의 후원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잉글랜드 국교회를 창시한 헨리 8세는 모두 열렬한 성유물 덕후였지만, 교회의 막대한 재산과 성직자 임면권을 노리고 종교개혁의 파도에 올라탔다.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루터 역시 로마에 대한 증오와 독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의 글에 우리독일이 어찌나 자주 나오는지, 마치 민족(nation)의 탄생이 종교개혁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끝내 사그라지고 만 것도 똑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선 일찍부터 군주가 교회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1305년의 아비뇽 유수 이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착실히 키워갔고, 마침내 1516년의 볼로냐 협정을 통해 성직자 임면권을 확보했다. 오늘날 바티칸과 마찰을 빚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부러워 마지않을, 오래된 갈리카니즘(Gallicanism)의 전통이다. 에스파냐 역시 통일왕국을 이룬 뒤 프랑스의 전례를 충실히 따랐다.

 

철저히 정치적인 이벤트였던 만큼, 종교개혁의 결말 역시 정치적이었다.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독일, 저지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돌아온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었다. 신앙의 국유화였다. 독일 종교개혁을 일단락지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의 결과는 Cuius regio, eius religio, 즉 지배자의 종교가 그 지방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독일과 스웨덴, 덴마크의 군주들은 저 위풍당당한 프랑스 국왕과 마찬가지로 성직자 임면권과 교회 재산을 집어삼켰다.

네덜란드 정도를 제외하면, 이제 사람들에겐 군주의 종교를 믿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같은 개신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칼뱅파가 루터파를, 루터파가 재세례파를 공격하고 추방하는 일이 빈번했다. (애초에 저자는 개신교란 가톨릭의 여집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모호하고 실체 없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던가. 신앙의 국유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근대적유산을 남겼으니, 바로 세속화다. 사람들은 원래 남이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한다. 그 남이 국가라면 더더욱! 예배 출석과 세례는 물론이고 사소한 옷차림마저 단속받는 등, 경건이 국가가 강제하는 의무가 되자 사람들은 신앙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철밥통 공무원 신분인 사제들 역시 적극적으로 신도들을 끌어 모으려 들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고백한 사제가 아무렇지 않게 강대상에 서고, 국가가 여성 사제를 허용해도 누구하나 반대하지 않는다. 사실 다들 관심이 없다는 게 보다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반면 미국처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국가에서는 오히려 종교가 맹렬해지고, 타 종교에 배타적으로 변해갔다.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쓰는 기업들처럼, 각 종교가 열성적으로 신도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미사 한번 나가지 않던 19세기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막상 미국에서 청교도들을 접하고는 열성적인 가톨릭교도로 변했다.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선교에 나선 미국인 목사들은 가톨릭의 권태로운 독점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다시금 사람들의 믿음에 불을 붙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의 역사학자 하인츠 실링은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의는 다름 아닌 교파화(Confessionalization)’라고 이야기한다. 종교를 의식조차 못하던 절대다수의 유럽인들이, 개신교의 등장과 함께 자신은 어느 한 쪽에 속한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 구성원에게 끊임없이 고백을 강요한 남한과 북조선처럼, 가톨릭과 수많은 개신교역시 교파화를 거치며 비로소 종교로 거듭났다. 안팎으로 치열한 투쟁을 거듭하며 정체성을 확립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험은 이후 근대 국민/민족국가 건설의 밑바탕이 되었고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는 단순히 종교개혁을 둘러싼 환상과 오해를 까발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진정한 의의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데, 크게 세 가지만 꼽아보도록 한다.

 

우선 저자는 종교개혁이 순전히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과연 타당한가 싶다. 종교개혁을 순전한 영적 각성으로만 받아들였던 기존의 이해에도 분명 문제는 있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180도 틀어버릴 필요가 있을까? 선행연구가 세속군주의 이해관계가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도외시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저자가 숱하게 인용하는 R. H. 토니의 말마따나, 역사는 관념과 물질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물론 최대한 콤팩트하게 주장을 전개해야하는 교양서에서 그렇게 쓰면 재미야 좀 떨어지겠지만.

 

저자가 자기 입맛에 맞게 학자들의 주장을 끌어다 쓰는 모습도 보기 좋진 않다. 가령 자본주의를 만든 건 칼뱅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이라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R. H. 토니는,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칼뱅주의가 맡은 역할까지 부정한 건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칼뱅 이전에 이미 태동했고 칼뱅 자신이 자본주의를 긍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칼뱅주의의 엄격한 규율과 소명의식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배양하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저자가 눈에 불을 켜고 비판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영어판 서문을 쓴 사람이 다름 아닌 토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근대개신교를 비판하고 중세가톨릭을 옹호하며 사용하는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안긴다. 요컨대, ‘전근대근대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긍정할 수 없는가? 오늘날 우리가 바람직하며 보편적이라 여기는 근대적 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전근대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개혁을 거치며 서구가 근대를 맞이했다는 통설을 비판하기 위해, 종교개혁 이전에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과학적 탐구정신이 존재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이에 따라 중세의 수도원은 자본주의의 배양실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민주주의의 수원(水源)으로,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예비한 종교로 탈바꿈한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 갖는 혁명적 의의는 퇴색했을지언정, 근대중심주의와 서구중심주의는 오히려 강화되고 말았다.

근대를 앞당김으로써 전근대를 긍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비단 서구 학자들이 자기네 역사를 다룬 저술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이미 효력이 다했음에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는 언데드인 자본주의맹아론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니, 최근 들어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는 성리학 긍정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혹자는 만인의 성인됨을 긍정하고 일종의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낸 성리학이야말로 동아시아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동안 양명학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근대적인 무언가를 이제는 성리학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근대의 시점을 양명학이 등장한 16세기에서 성리학이 등장한 12세기로 올려 잡은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의의를 가질까? 성리학, 그리고 가톨릭은 양명학과 개신교를 예비했다는 점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하는 걸까?

 

근대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전근대를 긍정할 방법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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