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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 이데올로기와 근대화의 이론 체계 ㅣ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9
홍정완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9월
평점 :
'이야기'를 거부한 지성사, 고집스레 그려낸 지(知)의 지도: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 있다. 홍정완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의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이하 《기원》)이 그런 책이다. 좋든 싫든 나는 앞으로 한국 현대 지성사를 다룬 글을 읽을 때마다 《기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지성사 비스무리한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성사 못 쓴다는 이야기다.
의미심장한 점은, "나 빼곤 다 한국 현대 지성사 하지 마!!"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은 이 책이, 정작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성사" 하면 떠올리는 책과는 자못 다른 서술방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분명 욕 먹을 이야기란걸 알지만 나는 역사학(적 글쓰기)이 추리소설, 사회과학이 SF라면 정치사상사나 지성사는 평론 혹은 비평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진짜' 지성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제쳐두고, 지성사를 표방한 글들은 일반적으로 사료를 하나의 완결된 책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지성사나 사상사 연구자는 사료를 꿰뚫는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믿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의미와 맥락을 부여한다. 지성/사상사의 글쓰기가 평론과 비슷한 이유다.
많이 읽진 못했지만, 한국 현대 지성사를 다룬 책들도 대체로 비슷하다. 김봉국의 《냉전과 투쟁》(선인, 2018), 이하나의 《대한민국, 재건의 시대(1948~1968)》(푸른역사, 2013), 이상록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20) 등, 여러 연구자들은 방대한 사료를 읽고, 이를 분석/해체/재구성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하나의 책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난 일단 영화를 사료로 삼은 지성사라 생각한다.)
반면 홍정완은 자신이 찾아내고 정리한 방대한 사료에 '이야기'를 입히기를 집요하리만치 거부한다. 난 그가 이야기를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찾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원》 역시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굉장히 뚜렷하다. 굳이 정리하자면, 아마도 "로스토우가 전부가 아냐 이것들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홍정완은 자신의 주제의식에 따라 사료를 재배열하길 거부한다. 대신 그는 굉장히 치밀하고 집요하게, 1950~60년대 생산된 교과서와 논문, 보고서, 각 대학이 발행한 신문에 이르는 방대한 텍스트의 계보와 관계를 추적한다. 그 결과 《기원》은 하나의 그럴싸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거대한 전함의 설계도나 한 도시를 오롯이 담아낸 지도처럼 느껴진다.
그런 만큼《기원》이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3부와 4부를 제외하면 요즘 유행하는 '서사'가 뚜렷하지 않고, 그보다는 묵묵히 지식의 지도를 그려가는 책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밋밋함이야말로 《기원》을 다른 지성사 연구서와 차별화하는 지점이자, 지성사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만드는 촉매다. 솔직히 말해 "척박한 진실"보단 "풍요로운 오류"를, "재미없는 맞는 말"보단 "재미있는 헛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기원》처럼 정밀한 설계도 혹은 지도가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홍정완의 (감히 말하자면) '무시무시한' 노력 덕에 우리는 1950~60년대 한국 지성계를 아우르는 지도를 비로소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점에서 이우창이 《기원》의 서평을 쓰며 "하지만 나는 바로 이 시점에서 강조하고 싶다. 어떤 학술장의 수준은, 어느 사회의 지적 자긍심이라는 것은 정확히 이런 종류의 책들, 독자에게 문장마다 집중하고 생각할 것을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인내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의 손에 지적인 대가를 무심히 쥐여주는 책들을 얼마나 내놓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인문학술장의 질적 쇠퇴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기원』을 읽고 조금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낸 건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우창, <길을 낸다는 것>, 《문학/사상 5: 로컬의 방법》, 산지니, 2022년 5월.)
문제는 (나를 비롯해) 홍정완 뒤에 한국 현대 지성사를 쓸, 혹은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음, 난 《기원》을 읽고 정말이지 질려버려셔, 한국 현대 지성사는 건드리고 싶지가 않다. 홍정완 선생님께서 다 해주실 거야... 그럼 난 뭐하지. 당장 이번 주까지 논문계획서 내야 하는데... 꼭 이 책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 어젯밤 교수님들로부터 이런 형편없는 글을 논문이랍시고 가져왔냐며 질책을 받는 꿈을 꾸었다. 《기원》은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