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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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나왔다, 혹은 갈고 닦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다. "나 여기까지 생각했어, 이만큼이나 할 수 있어"란 티를 팍팍 내는데, 그게 전혀 거북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감격스러운 작품. 누군가가 자신의 재능과 노력과 시간을 갈아 넣어, 완성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결과물은 언제나 즐겁고 벅찬다.

장강명 작가의 《재수사》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그런 감격스런 작품이다. 사실 작품을 읽기 전까진 걱정이 앞섰다. 그는 자신의 작가 인생에서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큰 의의를 남길 작품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퍽 오래 전부터 여러 지면에서 해왔지만, 정작 결과물이 나올 기미는 통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책이 나온 뒤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에 비친 책은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느껴졌고, 장강명의 현실감 넘치는 묘사와 발군의 취재력은 좋아하지만 주제의식은 다소 공허하다 느끼는 나로서는 이번 작품이 전형적인 사변소설은 아닐까 우려스러웠다. 다소 건방지지만, 장강명이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을 이번 소설이 실패해 그가 다시는 펜을 잡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강명의 팬으로서 그의 글을 더는 읽지 못한다는 건 매우 아쉬운 일이니까.

하지만 이런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였다. 남들보다 늦게 택배가 도착해 오후 8시 쯤 첫 페이지를 넘긴 뒤 새벽 3시가 넘은 방금 전까지 앉은 자리에서 침을 꼴깍꼴깍 넘겨가며 두 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을 다 읽었다. 이런 게 진짜 "페이지 터너"구나... 앞으로 《재수사》 미만 "페이지 터너"라 부르기 금지. 이 책을 읽고 제 코로나 후유증이 (일시적으로) 나았어요.

소설은 22년만에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는 메인 스토리와 살인자의 일지가 교차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읽기 전까진 아주 걱정했던 구조였는데 장강명 특유의 관념론이랄까, 형이상학을 한 쪽에 몰아주니 오히려 몰입감이 훨씬 높아진다. 그렇다고 양자가 물과 기름 같다거나 겉돌지도 않고, 아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작가가 군데군데 심어놓은 복선과 암시, 상징을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달까. 작가가 "나 이만큼이나 신경 썼어, 이만큼이나 글을 다듬었어"라고 자랑하는 티가 팍팍 나는데 그게 전혀 밉지 않다.

무엇보다 《재수사》는 내가 지금껏 읽은 장강명의 소설 중 (나는 기사를 뺀 그의 글 대부분을 읽었다고 자부한다) 가장 주제의식이 살아있다. 장강명은 2022년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공허와 불안이라 진단했고, 그 기원을 정교하고 설득력있게 풀어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장강명의 소설은 《표백》인데, 이 소설에선 다소 피상적이고 설익었다 느껴졌던 문제의식을 《재수사》는 훨씬 묵직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솔직히 말해 《표백》이 68혁명 이후 유럽이나 일본에서 나올 법한, 다시 말해 2010년대 초반의 한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설이었다면 《재수사》는 지극히 2022년의 한국답달까.

《재수사》2권에는 "초판으로 만나 반갑습니다. 저에게는 무척 각별한 책이네요. 어떻게 읽어주실지 정말 궁금합니다. 부디 즐거운 독서이기를..." 이라 쓰인 장강명 작가의 싸인이 (아마도 인쇄된 것이겠지만) 적혀 있다. 몇 년 간 써온 여러 글들을 통해 그 각별함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고, 그래서 더 걱정이 컸다. 오늘날 한국 출판시장은 작가의 각별함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진 않는 곳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는 《재수사》를 각별히 읽었고, 다른 독자들 역시 그러리라 확신한다.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의미의 의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 책을 통해 장강명은 삶의 의미를 멋지게 증명했다. 이런 작품 하나 남길 수 있으면 삶은 의미있다 할 수 있지, 암.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라면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이뤄진 여러 언론사의 인터뷰인데, 하나같이 책이 가진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다들 책 안/못읽으신듯... 그러니 제발 기사 말고 책을 읽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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