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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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친구 은주가 보낸 문자 속 링크에는 언제나처럼 재난 피해를 입은 아동을 돕기 위한 기부 링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클릭 한 번에 기부금 3만 원이 빠져나가는 값비싼 문자, 사고 싶었던 부츠컷 청바지 하나 값이지만 나는 이걸로 연말정산 공제를 받을 수 있을 거고 좋은 삶,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작은 효용을 순간에 따질 만큼 나는 좀 속물이다.

주인공인 유치원 선생님 오영아, 나에겐 요즘 작은 고민이 있다. 바로 웃음을 상실한 것인데,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신봉하고 살았던 내 삶에 유치원 신규 원생 '정은우'라는 아이가 나타나며 내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은우는 자신을 '마일로'라고 부르지 않으면 주변 아이들을 때리거나 괴롭혔는데, 어르고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 굉장한 목청의 소유자인 은우는 한번 흥분을 참지 않으면 통곡을 시작을 했고, 한번 시작한 저항의 강도가 더욱 거세지고 그 모든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나는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게 된다. 

언제 그랬냐는듯 은우는 나의 분노를 관람하고는 씩 웃으며 
"유 네일드 잇(you nailed it)"이라고 어린아이는 뜻도 모르는 영어로 나를 향해 칭찬하듯 말했는데, 이 말에 나도 모르게 상실했던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 뒤로 5년간 사귀었던 수원에게 자연스럽게 프러포즈를 받게 되었으나 여전히 웃음을 잃은 상태로 프러포즈에 답을 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고 일상의 웃음 부재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게된 나에게 수원의 적극적 권유와 (현 빵집을 운영하고 있으나 전 심리센터를 다녔다는) 은우 엄마의 추천으로 미스터리한 심리센터를 소개받게 된다.

놀랍게도 이 책은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었다. 
쇼츠에 도파민을 쉽게 채우고 전두엽을 녹여버리게 된 나에게 충분히 글발로 자극적이게 한 작가님이라 오랜만에 신선했다.

좀 생뚱맞지만 소설의 첫 문장부터 시각을 자극했다. 마주하고 싶던 주말의 색이란 노란 기가 섞인 녹색이라는 거, 느지막이 일어나 눈에 담고 싶은 색깔이라는 느낌도 있었고,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색으로 표현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11페이지에 적힌 모든 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며 아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첫 페이지부터 퐁당 빠져 읽기 시작했던것 같다. 

물론 내용은 더욱 신선했다. 웃음을 잃은 주인공이 웃음을 되찾기 위한 과정에 대해 심리센터가 모든 걸 밝히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게 되지만 분명 본인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은우가 정말 반전의 열쇠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오렌지 농장에서 일한 오렌지는 빵칼로 썰 수는 없지만 쑤실 수는 있다는 주인공의 선택이 속 시원했다.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전두엽 레이저 시술을 받게 된다면 모든 사실을 알고나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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