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소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유리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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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꾸는 이의 즐거움

봄은 특히나 행성 가꾸기를 좋아하는 외계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계절이다. 잠들어 있던 행성들이 여기저기서 깨어나기 시작하고 아무 우주에나 던져놓아도 쑥쑥 자라는 재미를 즐길 수 있으니까, 동족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오늘따라 행성 단지는 평소보다 붐볐고 각양각색의 행성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작고 밀도가 높은 고체형 행성을 파는 가게 앞에 촉수가 멈춰졌다. 조그맣고 귀여운 크기의 푸른얼음덩어리, 아직 볼품없게 생겼지만 이런 녀석들이 막상 키우다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워진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터라 둘러보는데 주인이 슬며시 내게 말을 걸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촉수 외계인의 지구 키우기 편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까다롭지 않고 봄에 키우기 좋은 지구라니 얼마나 아기자기한가, 물을 잘 안 줘도 되고 빛 좋은데 두면 알아서 녹고 키우다 보면 작은 미생물이 생기는데 약도 자주 치지 말란다. 촉수 외계인은 집으로 돌아와 공전궤도랑 자전주기를 고려해서 씨앗 행성 성장하기 좋은 지점에 지구를 놓아줬다. 그래서 왠지 고마웠다. 왜 이 외계인에게 고마웠을까 어쨌든 이 지구 도감은 계속되는데 공룡부터 인간까지 삶이 지루하면 키워보길 권하는 행성 가꾸기 도감 어쩜 이런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시작부터 작가님이 귀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돌이키는 하루


처음 돌이키는 하루 설정 버튼을 누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무심코 목뒤에 쏙 들어간 부분을 쓰다듬다가 그 속에 있는 버튼을 손톱으로 꼭 눌러버렸는데, " 오늘 하루를 평생 돌이키는 하루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설정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라는 소리를 듣고도 버튼을 더 눌렀고 누르고 나서야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누구나 특별히 끝내주는 날을 돌이키는 하루로 설정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설정한 하루는 어쩌다 보니 지극히 평범한 중학교 1학년 어느 하루였다. 등굣길에 중학교 3년 내내 절친한 친구와 등교하고 평소처럼 1교시는 영어 수업이 시작되며, 수업 시간에는 친구들과 끄적끄적 필담을 주고받고, 딴짓도 좀 해주고, 점심시간은 누구보다 빨리 뛰어나가는 아이들 사이에 내가 끼워져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여유로운 점심시간, 해도 해도 끝없이 재미있던 친구들과의 수다가 왜 이렇게 소중하고 애틋한지, 반복돼서 지겨울 만도 한데 돌이켜질 때마다 더 소중한 느낌이 든다.


아주 특별한 순간보다, 아주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순간이 가장 소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나에게도 돌이키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하루를 주인공처럼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지 않는 부모님과 끝없이 수다 떨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그리운 학교 수업 종소리들 흉내 낼 수 없는 급식을 실컷 맛보고 즐기는 하루를 갖고 싶어 욕심나던 이야기였다.


5분 동안


현재 지구에는 눈으로 침투하는 치명적 바이러스가 발생했다.
뉴스로 매번 대기오염 수치를 발표하여 바람의 방향과 오염 수치가 가장 낮은 5분을 추정하여 기준을 발표하고 안전 고글 사용자에 한 해 65분가량 고글을 착용하지 않을 경우 5분 정도 눈을 뜰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미와 원은 한집에 살고 있지만 서로를 바라볼 수 없었다. 구호물품과 라디오에 의지하며 하루에 5분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바이러스로 눈을 잃고 집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은 왠지 미래에 있을법한 일이라는 생각에 현실감이 느껴져서 한편으로는 소름 돋던 에피소드였다.


투데이 이즈 무드

오전 7시 눈을 뜨자마자 현관문을 확인하는게 루틴이다.
그리고는 얌전히 놓인 분홍빛 상자를 집안으로 들여놓는다. 상자를 받는 시간은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지만 주로 아침 출근 시간 전 받아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투데이 이즈 무드는 작년에 론칭하여 벌써 국내 구독자가 500만 명이 넘는 '기분 구독 서비스'로 구독자라면 꼭 지켜야 하는 룰이 세 가지 있다. 매달 50만 원의 정기 구독료를 한 번이라도 연체하면 두 번 다시 구독 신청을 할 수 없는 것, 매일 받아보는 '기분 상자'는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있는 분홍 상자와 부정적 기분이 들어있는 파란 상자 중 무작위로 배송된다는 것, 받은 상자는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열어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 받은 상자를 체험하지 않으면 다음날 받은 상자를 열어도 아무 기분을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근데 박 대리님이 사흘 연속 파란 상자를 받았다고 한다. 연락두절인 박대리님이 종로 투데이 이즈 무드 본사에서 투신 소동을 벌였고 온 인터넷이 박 대리님 기사로 난리가 나버렸다.


이 서비스 왠지 마음에 들었다. 랜덤이긴 하지만 좋은 기분을 위해 나쁜 기분쯤이야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박 대리가 될 수 있겠지만 설마 사흘 연속 받는 불행은 피해 가지 않을까?


웨하스 소년

날개 달린 사람이 광역버스에 올랐다. 꽤 유명인으로 어릴 적 웨하스 소년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여기저기서 아는체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해 보인다.
웨하스 소년의 시작은 5살 때 T 제과 웨하스 광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곱슬곱슬한 파마머리 아기가 천사 분장을 하고 웨하스 한입을 먹고 눈이 동그래져 제자리에서 날아오르는 게 전부였으나 그에게는 날개가 있었고 그 덕에 광고 역사상 길이길이 남을 히트를 쳤다고 했다. 그 이후 웨하스 소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꽤나 탄탄한 아역배우의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열 살 이후 더 이상 아기 때처럼 날 수 없게 되면서 와이어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15살이 되면서 땅에서 1센치도 날 수 없게 되면서 배역에 한계점이 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대형 체인점인 어머니 분식점에서조차 사람들의 요구도에 못 미치는 사람이 되어버리자 웨하스 소년은 드디어 날개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수술대에 오르기로 한다.


특별함은 어렵다. 웨하스 소년을 바라는 사람들과 그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아온 웨하스 소년은 행복했을까? 왠지 날개를 없애기로 마음먹었지만 웨하스 소년으로 살아온 인생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나오는 CF 로고송과 입안에 퍼지는 웨하스의 맛처럼 날개를 없애도 언제나 사람들 머릿속에 그는 웨하스 소년으로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리 작가님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유해함 없는 유머가 담겨있어서 좋다. 찾아 읽고 싶어서 매번 신간을 기다리게 된다.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걸 안다. 한두 개라도 이야기가 끌린다면 취향이라고 장담하니 어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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