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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ㅣ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평점 :
첫 장면부터 주인공은 눈을 떴으나 눈앞은 검은 암흑이었다. 눈을 검은 헝겊으로 가렸고, 손은 등 뒤로, 양 발목은 무릎끼리 맞닿은 채 묶여져 있다.
곰이나 멧돼지가 손을 묶을 수는 없으니 자신을 묶은 사람은 분명 사람일 거라 짐작한다. 그렇담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묶어만 뒀는지 파악을 해야 한다. 그렇게 끊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음이 부담스럽고, 남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무기는 총보다는 칼이다. 위협이란 걸 느끼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 칼은 그녀의 눈앞 허공 사선을 가른다.
그들은 산속에 훈련을 위해 왔다. 6개의 배낭에는 각종 금속과 연장, 탄환 등 무기가 가득했고, 식량도 상당했다.
합숙 연수라는 말로 들어온 산속 생활은 잠시만 방심해도 칼이 날라오고 목이 잡혀 벽에 매달리게 된다.
먹고 씻을 물을 구하기 위해 매일 새벽부터 산허리를 넘어 계곡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봉을 쥐여주고 하고 싶은 데로 공격하라고 판을 깔아줬지만 오늘도 봉을 상대에 쥐여주고 공중에 한 바퀴 돌아 바닥에 나뒹굴게 하고. 다시 또 봉을 뺏어보란다. 힘껏 달려들어도 시도하다 어깨와 다리에 무수한 목봉 세례가 쏟아진다. 그 이후에는 나무 두 개에 줄을 묶어 줄 위에 매달리게 하고 칼을 집어던진다던 지기도 한다.
몸에 상처가 늘어가는 만큼 수업의 진도는 목표를 향해가고 양이 넉넉하지 않아서 극도로 지친 날 허락한 달콤한 코코아를 마신 게 이 일의 시작이었다는 걸 기억하게 된다.
류와 조각의 프리퀄이었다.
조각이 킬러가 되기 위해 산속에서 시행된 목숨 건 1:1 수업
죽을 만큼 힘들게 만들던가, 아니면 죽을 만큼 힘들게 해놓고 쉬는 틈에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가 빈틈이 있으면 언제든 공격이 시작된다. 체격에 비해 힘만 세던 그녀에게 기술로 몸을 익숙하게 만들게 한 비결이다.
탄환이 일으키는 회전의 감각이 팔꿈치를 타고 나선형으로 흐르는 느낌, 상대의 뒷모습과 발걸음을 주시하면서 움직임을 체크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경제적인 몸짓이 되는지 익히게 만드는 일을 생생하게 겪어나가는 시간이 소설의 짧은 분량이 짧지 않게 꽉꽉 채워져 있었다.
조각이 무기로 칼을 선호했는지, 어떻게 류에 대한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알 수 없었던 류의 마음도 조각에게 거침없이 대하는 행동 속 오묘한 기류를 일으키는지 몇몇 장면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파쇄를 볼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아래 두 문장이 맘에 든다면 당장 이 책을 시작하라고 슬쩍 영업하고 싶다.
'저 인간을 죽이기 전에는 여기를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p39
'이차에 타고난 다음에는, 네 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만들 거야, 머리부터 팔다리, 몸통이고 내장이고 다 뽑아다가 도로 붙일 거다 괜찮겠어?'-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