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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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혼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p, 166










 

9월의 첫 날, 해병대에 입대했던 동생의 수료식이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엄마는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는 남자친구를 보러가는 것처럼 이것저것 준비하고, 설레하며 잠 못 이루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아빠는 겉으론 무심한 척 했지만 그 날 장거리 운전을 위해 컨디션을 좋은 상태로 유지해야한다며 일주일간 금주를 선언했다. 나야 뭐, "왜들 그렇게 난리야! 나 좀 챙겨줘!" 투덜거리면서 7주만에 보는 동생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샐러드를 주문해서 일주일간 풀때기만 먹는 다이어트에 돌입. 남들이 들으면 '유난떤다' 싶을 정도로 난리법석인 우리 가족이었다.


다른 군대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해병대는 수료식 때 부모님께 수료 신고(?)를 해야하는 시간이 있다. 가족들이 아들을 찾아서 아들 앞에 자리하기 전까지 해병들은 부동자세로 가족을 기다려야 했는데,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혹여나 우리 아들이 조금이라도 혼자 가족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서있게 만들까봐 마음이 많이 조급해져 있었다. 


전주에서 포항까지 4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3시 반부터 출발을 해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상태로 혹여라도 아빠가 졸음운전을 할까봐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며 무사히 포항에 도착해서 동행을 만나고, 반갑고도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펑펑 울고, 또 다시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동생을 들여보내고 전주엔 그날 밤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해서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는 이상한 마무리지만, 기분좋고 행복했던 날이었다.


그 이후로 이틀간 앓아누워있으면서 '이런게 가족인건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서는 힘이 되는 존재보다는 그저 내 마음을 더 무겁게하고 때론 내 앞길을 막는 짐같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우리집 아들 얼굴을 잠깐 보겠다고 온 식구가 자신의 시간을 두없이 내어주는걸 보고 '이런게 가족이구나. 어떤 상황에서든 혼자가 되게 두지 않는게, 두말없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게 가족이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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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때 읽게 된 소설 한 권 《어쩌다 이런 가족》,  읽으면서 내내 한 편의 주말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가족의 구성원, 가족의 형태, 가족의 부 등 여러 면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고있지만 하나같이 크고 작은 막장을 겪는 가족들, 그리고 결국엔 서로의 시간을 내어주어, 서로의 소리를 내어 그 막장인 문제를 풀어내고 결국엔 서로를 혼자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훈훈한 결말을 가진 주말드라마 말이다.


집안에서 큰소리를 내는걸 금기시여겨 믹서기를 돌릴때조차 방음이 되는 공간에서 돌리는 가족,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가족끼리 있을 때도 넘치는 가풍과 품위를 잃지 않는 이 가족이 겪는 막장은 아무 문제없이 자라주어 믿고있던 첫째 딸의 동영상 유출 사건이었다. 


이 가족이 어설프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미 넘치게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보자면 주말드라마의 해피엔딩을 하루 빨리 보고싶은 마음처럼, 이 가족의 해피엔딩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싶어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소중했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이젠 어떻게 해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을 느낄 때……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 얼마나 숱한 문제들이 있었는지 더는 돌아볼 기력조차 없을 때. 그런 순간마다 화가나고 슬프고 적어도 그 사람이 원망스럽다는 감정이 든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상대를 외면하고 현실을 회피하면 그 틈새로 적막이 흘러들어온다. 적막은 관계를 잠식시키고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소리를 내야만 한다. 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더라도, 그 소리가 가끔은 소음일지라도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그 사람이 내는 소리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관계가 어긋난 순간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상대를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다.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은 무뎌지고 떠올리는 빈도가 줄어들며,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며 지내게 될 시간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던 사랑보다는 그렇지 못한 채 끝낸 사랑이 더 오랜 후회를 남기는 법이다. 솔직하게 나의 속마음을 마주하고 그 안에 보이는 그 사람의 얼굴이 아직은 소중한 존재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적막이 더 빠르게 차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최선을 다해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 관계가 가족이나 연인이든 혹은 친구나 오래 함께한 파트너든…… 우리의 삶에서 소중해질 수 있는 존재는 그리 흔치 않다.

-p, 227~228 (작가의 말 中)





무엇보다도 여기에 옮겨적은 '작가의 말' 중 일부에 작가님이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우리의 삶에서 소중해질 수 있는 흔치않은 그 존재를 위해서 기꺼이 적막을 깰 것, 최선을 다 해볼 것, 감정이 남아있을 때 우리의 소리를 내볼 것. 이게 비록 소음이 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소리내어 전달할 것.


꼭 가족 뿐만이 아니라 친구, 연인 등 여러 인간관계에서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도 오늘 상대방한테 내 감정을, 내 마음을 전달했다. 이게 그에게 소음이 될지, 아니면 내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달한 것이 될지는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라 생각한다. 다만, 난 오늘도 기꺼이! 최선을 다 해보았기에 조금의 후회는 덜어낼 수 있겠지.   


    






함께 추락하는 삶은 비극이다. 가족이라면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다시금 각자 품위 있는 삶의 궤도로 올라야만 한다.

-p, 38



"우리 네 명 다 가족이긴 해도 각자 다른 인격체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야. 근데 엄마가 그렇게 고집하는 품위 때문에 속 터놓고 얘기할 엄두도 못 냈어.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른 채로 사는 게 가족이야? 남이지."

-, 175



조바심 내지 않고 좋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제든 '아니'라는 대답이 튀어나올까봐 불안함에 입술을 틀어막듯 키스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건강하게 싸울 수 있어서. 싸운 뒤에도 서로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믿고 있어서 다행이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만에 하나 헤어질 수도 있다 할지언정, 지금만은 그런 순간이 절대 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p, 204



오늘 저녁에도 이들은 약간은 소란스럽고 사사롭게 투닥거릴 예정이다.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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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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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라면 간단한 문제다. 유의미한 대화와 운명적인 만남의 연속. 하지만 일상은 다르다. 쓰잘 데기 없는 대화, 우연한 만남, 허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이다. 임신이 아닌 헛구역질을 무수히 하고, 뇌졸중이 아닌 그냥 두통이 훨씬 많다.

-p, 363










이제 좀처럼 그럴 일이 없지만 아니,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어렸을 땐 방학이면 기간을 여유롭게 잡고 남원 외갓집으로 휴가를 떠났다. 아침에 부엌에서 들리는 부산한 소리에 잠에서 깨면 외갓집에 놀러온 사촌 언니, 오빠들과 같이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냇가로 가서 송사리를 잡고 다슬기를 잡고, 배가 고파질때쯤이면 꼬질꼬질해진 몸을 이끌고 풀잎에서 쉬고있는 잠자리를 잡으면서 외갓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날들. 나에게도 이런 천진난만한 추억이 있다. 


마냥 철없던 우리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리고 (할아버지 돋보기로 파리를 태워죽이는 잔혹한 방법(?)을 알려주던 개구쟁이 오빠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또는 책임감을 물씬 풍기는 아빠가 되었다), 외할머니 외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외갓집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금. 특히 요즘처럼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 여름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때면 어렸을 적 몸을 담그고 놀던 냇가가, 다같이 둘러서 먹던 차가운 수박이 그렇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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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으스스하지만 어쩐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도록 귀여운 표지를 가진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그리워하던 어린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된 어머니가 걱정된 자식들이 백수인 '강무순'을 (강무순이 잠깐 잠든 틈을 타) 이 시골집에 몰래 두고 떠나버리는걸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루함을 못견디던 강무순이 우연히 어렸을적 그려놓은 보물지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쉬쉬하던, 하지만 여전히 이 시골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네명의 소녀들이 사라진 사건'을 파헤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손녀인 강무순과 할머니 홍간난 여사에게서 느껴지는 걸크러쉬는 이 소설 속의 세계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켜보는 독자들까지도 홀리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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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생각보다 가볍고, 결말이 눈에 뻔히 보이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책을 덮어야하나 여러번 고민했으니,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 <연애시대>와 요즘 핫한 드라마 <청춘시대>의 박연선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말에 더 큰 기대를 하게 된건 어쩌면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었으나..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예상과 달라지는 전개, 그와 더불어 점점 커지는 흥미로움이 이 책을 중간에 덮지 않은 걸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각 집의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만큼 허물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차마 서로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울타리 안으로 쉬쉬하던 속사정을 알게되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끼워맞춰 전체 틀을 그려가는 과정도 잠시 더위를 잊고 집중할만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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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엄마 아빠가 올 것이다. 한 달 보름가량의 두왕리 생활이 끝나는 셈이다. 

홍간난 여사의 드라마도 오늘이 마지막회란다. 

"에에, 저렇게 끝나는 거여? 끝이 뭐 저렇다니?"

홍 여사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엔딩 음악과 함께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라는 자막이 지나가고, 다음 주부터 시작할 새로운 드라마 예고편이 나왔다.

찌르륵찌르륵. 저 소리가 귀두라미 소린지 다른 벌레 소린지 모르겠다. 밤바람이 서늘해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고 홍간난 여사는 벌써 양말을 찾아 신었다. 올 여름도 다 갔나 보다.

-p, 391




매번 외갓집에 가면 처음엔 어색해서 낯을 심하게 가렸다. 아직도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세은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엄마가 옆에서 떨어지면 앵-하고 울었다고'. 그런 나도 시간이 지나고 집에 돌아갈때쯤이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촌들과 친해져서 집에 가기 싫어해서 항상 '너네는 왜 집에 갈때쯤 친해져서 그러니' 하며 이모, 이모부가 많이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느꼈던 시원섭섭하고 많이 아쉬워했던 기분을 이 소설을 덮으면서 느끼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시골 할머니댁으로 휴가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손녀와 할머니, 시골의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댁으로 떠나온 긴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의 그 기분을 이렇게 공감가도록 표현해낼 수 있는걸로 봐서 작가님은 분명 할머니, 시골생활의 좋은 추억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할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이 소설에 녹여낸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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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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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그들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폴이 들려준 몇 마디 말만으로도 시몽은 지난 열흘 동안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로제의 무관심, 시몽에 대한 그의 빈정거림, 그녀의 외로움 같은 것들을. 폴은 이 공백 기간동안 로제를 되찾고자 애썼다. 적어도 다시 로제와 만나, 다시 그와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한 어린아이 같은 로제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자신을 낮추는 그녀의 노력은 감동적이었다. 로제가 즐기는 저녁 식사, 그가 좋아하는 드레스, 그가 유쾌해하는 대화 주제 같은, 우스꽝스러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지적인 여성이 활용한다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여성지에서 추천하는 온갖 방법들이 이번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입술을 타게 만드는, "로제, 당신의 잘못이 날 불행하게 만들고 있어.", "로제,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같은 말들을 교묘한 조명이나 연한 양고기로 대체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여성 특유의 반사적 반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쓰디쓴 체념에서 나온 결과도 아니었다. 그랬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 두 사람'에 대한,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일종의 가학인 셈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외쳤어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나 로제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오기를 거의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의 무엇인가가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계산과 헛된 희망 속에서 열흘을 보낸 그녀로서는 시몽에게 설복당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몽은 전화로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직접 얼굴을 대하면 "저는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시몽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완벽한 어떤 것, 적어도 어떤 것의 완벽한 절반이었다. 이런 일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야 완벽하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오래전부터 줄곧 앞장서는 입장, 대개 혼자 애쓰는 입장이 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일에 지쳐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 말이 유난히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개입된 이 연애의 초입에서, 예를 들어 로제와의 관계 초기에 있었던 흥분과 약동 대신 발끝까지 휘감은 거대하고 나른한 권태를 느꼈다. 모두들 나에게 분위기를 바꿔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애인을 바꾸게 되는군 하고 그녀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덜 성가시고 더 파리지앵답고 너무나 자주 만나 주는 애인으로…….

-p, 100~101 




 








 

사강이 24살에 썼다는 이 글을, 24살이었던 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어가며 읽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찍어둔 책표지 사진으로 바꿔놓은 카톡 프로필 사진이 25살의 반절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도 변함없는걸 보면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폴의 '오래된' 연인인 로제는 폴을 외롭게 했다. 주말에 짧은 데이트를 한 후 로제는 폴을 빈 집에 들여보낸 채 돌아갔다. 폴은 로제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해주기를, 로제가 그의 어떤것보다 그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사랑하고있다는 걸 오롯이 느껴지도록 애정표현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같은 여자이기에. 그것은 그녀가, 아니 어쩌면 사랑하고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그녀가 기대했던 완벽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가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꿔야하나 생각이 들만큼 권태로움이 가득한 습관이.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엘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 56





​그런 그녀에게 시몽이 다가왔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처럼, 타이밍 좋게 다가온 그는 그녀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적극적인 애정공세, 그녀에게만 집중되어있는 온 신경, 그녀에게 잘보이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


그렇게 기대하던 모습으로 다가온 시몽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폴이었지만, 시몽과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로움이 가득한 습관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게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연인이 함께 긴 시간을 지내오다보면 느끼는 여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이 감정들을 사강은 속시원하게 그려낸다.







폴과 로제, 시몽을 보며 자연스레 내 연애도 돌아보게 된다.

'니가 보고싶어서 니네 집 근처를 서성거렸어' 라고 귀여운 연락을 해주던 남자친구는 이제 없다. 하루의 반 이상을 붙어있고도 시도때도없이 연락을 주고받던 남자친구와 나는 이제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서로가 사랑받고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애정공세를 펼치던 남자친구와 나는 이제 없다. 

대신 '당연히 알겠지' 하는 생각으로 연락을 띄엄띄엄 하는 남자친구와 내가 있다. '좋아해. 사랑해.' 라는 말은 거의 주고받지 않는 남자친구와 내가 있다.  

내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은 평소에 내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내가 외롭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것, 보살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는 것(가령 혼자 자야하는 날이면 '문단속은 잘했어?' 하고 물어주는 시시한 걱정이라든가), 시도때도없이 내가 사랑받는 여자라는걸 느끼게 해주는 것, 오롯이 나에게만 신경을 써주는 것이지만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함과 편안함이 자리잡은 우리에겐 어쩌면 낯간지러운 기대라는 걸 잘 안다. 나도 남자친구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을게 뻔하므로.

익숙한 습관이다. 아직까지 나쁘진 않다. 가끔씩 연애 초기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운함이 있다가도 이내 잠잠해진다. 오래된 연인이라면, 특히 감정에 예민한 여자들이라면 더 자주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감기처럼 언제 앓았는지 모르게 자고 일어나면 가뿐해진다. 이렇게 각자의 감정보단 서로의 상황을 먼저 이해해주는게 오래된 연인의 강점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연인은 몸에 배서 바꾸기 쉽지 않은 습관같은 것이지만, 이 습관이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서로 노력하는 것이 오래된 연인이 함께 기대하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지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간 그녀는 자기 방의 침대 맞은편 벽면을 떠올렸다. 커튼이 쳐 있고 유행 지난 탁자가 놓여 있고 왼쪽에 작은 옷장이 있는 그 벽을 그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라보았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바라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운 상태로. 로제, 로제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늙어 가라는 선고를 내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 자신조차도…….

"지금 당신에게 제 모습은 엊저녁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더 딱하게 보일 겁니다." 시몽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면 이게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한 청년의 연극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연한 빛깔의 눈동자에 가벼운 혼란을 담고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매끈한 데다 표정도 너무나 간절해서 그녀는 하마터면 그 얼굴에 손을 얹을 뻔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당신이 너무 젊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나친 사랑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자, 나가서 좀 걸을까요. 지금 날씨가 무척 좋네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가을이 아주 부드럽게 폴의 가슴에 차올랐다. 젖은 다갈색 나뭇잎들이 서로 뒤엉킨 채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p, 43~45



늘 그랬었다. 폴의 얼굴에는 안정되고 자족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상대에게서 요란한 수다를 끌어내곤 했다.

-p, 52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엘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 56



평생 처음으로 시몽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할 곤경 사이에서 자신이 막아서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귀던 여자들에게 그토록 빨리 싫증을 내고 그들의 속내 이야기나 비밀,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보호자 역할을 맡기려는 그들의 시도에 겁을 내던 시몽. 줄행랑을 치는데 그토록 익숙했던 시몽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고 기다리고 싶어 하다니. 하지만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그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비겁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기다림이 되리라…….

-p, 60~61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사랑에 대한 상당히 좋은 정의군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어색해져서 침묵했다.

"저는 열정적인 연인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p, 63~64



그다음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았던 것이 잘못은 아닐까? 그는 그들이 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갔던 소풍, 너무나 지루해서 중간에 빠져나왔던 전시회, 어머니의 집에서 열린 그 끔찍했던 디너파티 같은,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들의 장면 하나하나를 열 번, 스무 번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장면 하나하나가 되살아났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 하나하나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날이 갔고, 그는 그 시간을 모았다. 아니, 그는 삶을 잃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p, 95~96



그는 자기 어머니에 관해, 여행 취미에 관해, 미국에 관해, 러시아에 관해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와의 수많은 공통점을 시시콜콜 편안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한다거나 매혹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았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동시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p, 99



나는 어린애가 아냐, 폴. 내게는 당신을 이해할 능력도,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어.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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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의 특별한 하루 - 감사 누리과정 유아 인성동화 14
김미나 글.그림, 최혜영 감수 / 소담주니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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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엔 '감사'에 대한 책이 많네요^^ 

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재밌는 이야기로 알려줄 수 있는 책
《은비의 특별한 하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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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보이는 뾰루퉁한 표정들. 
은비네 가족들인데요.

입을 옷이 없다며
먹을 음식이 없다며
갖고 놀던 장난감이 재미없다며

불평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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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집에 비가 새기 시작했어요ㅋㅋㅋㅋㅋ 
아빠가 급하게 마련한 배 위에 올라타 떨고 있는 은비네 가족.

이때도 은비네 아빠는
"이런 낡아빠진 집에 사는게 아니었는데!"
하고 불평을 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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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옷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사실 이렇게 따뜻하게 걸칠 옷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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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먹을게 없다고 불평했지만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 감사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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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고 내팽개친 곰인형도 
사실은 소중한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은비네 가족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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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모든걸 쉽게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자라고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입을 옷이 없네!' 하고 불평하는 장면에선 뜨끔! 했답니다.

이렇게 짧은 동화를 통해서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죠?

+
아이들 앞에선 항상 감사하다는 말만 해야겠어요.
저렇게 다 따라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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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라라의 아이스크림 - 숲 속의 꼬마 파티시에 루루와 라라 시리즈
안비루 야스코 글.그림, 정문주 옮김 / 소담주니어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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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비루 야스코의 '루루와 라라' 시리즈,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번엔 <루루와 라라의 아이스크림>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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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재료를 들고가는 루루와 라라를 너구리 라쿤이 도와주었네요.


감사의 인사로 보답을 하려고하니 인사는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를 보여주는 너구리 라쿤!


이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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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깃꼬깃 구겨진 편지의 정체는 바로

감사의 릴레이 편지 였네요!!


감사인사를 하는 대신 이렇게 감사의 릴레이 편지를 받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릴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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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릴레이의 시작은 슈가 아주머니였어요. 


다친 아기 너구리를 도와주고, 감사 인사를 하려는 아기 너구리에게

이 감사 릴레이 편지를 준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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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들은 루루와 라라는

너구리에게 받은 감사 릴레이 편지에 화답하기 위해

숲 속 동물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기로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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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을 받는 대신 감사의 릴레이 편지를 받아가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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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라라'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이렇게 아이스크림 만드는 방법, 데코레이션 방법 등이 아이들을 위해 쉽게 설명되어있다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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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라라가 바라는대로

감사 릴레이 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돌고 돌았으면 좋겠네요!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만들면서

쉽고 재밌게 '감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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