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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평점 :
드라마라면 간단한 문제다. 유의미한 대화와 운명적인 만남의 연속. 하지만 일상은 다르다. 쓰잘 데기 없는 대화, 우연한 만남, 허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이다. 임신이 아닌 헛구역질을 무수히 하고, 뇌졸중이 아닌 그냥 두통이 훨씬 많다.
-p, 363
이제 좀처럼 그럴 일이 없지만 아니,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어렸을 땐 방학이면 기간을 여유롭게 잡고 남원 외갓집으로 휴가를 떠났다. 아침에 부엌에서 들리는 부산한 소리에 잠에서 깨면 외갓집에 놀러온 사촌 언니, 오빠들과 같이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냇가로 가서 송사리를 잡고 다슬기를 잡고, 배가 고파질때쯤이면 꼬질꼬질해진 몸을 이끌고 풀잎에서 쉬고있는 잠자리를 잡으면서 외갓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날들. 나에게도 이런 천진난만한 추억이 있다.
마냥 철없던 우리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리고 (할아버지 돋보기로 파리를 태워죽이는 잔혹한 방법(?)을 알려주던 개구쟁이 오빠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또는 책임감을 물씬 풍기는 아빠가 되었다), 외할머니 외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외갓집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금. 특히 요즘처럼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 여름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때면 어렸을 적 몸을 담그고 놀던 냇가가, 다같이 둘러서 먹던 차가운 수박이 그렇게 그리워진다.
제목은 으스스하지만 어쩐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도록 귀여운 표지를 가진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그리워하던 어린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된 어머니가 걱정된 자식들이 백수인 '강무순'을 (강무순이 잠깐 잠든 틈을 타) 이 시골집에 몰래 두고 떠나버리는걸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루함을 못견디던 강무순이 우연히 어렸을적 그려놓은 보물지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쉬쉬하던, 하지만 여전히 이 시골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네명의 소녀들이 사라진 사건'을 파헤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손녀인 강무순과 할머니 홍간난 여사에게서 느껴지는 걸크러쉬는 이 소설 속의 세계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켜보는 독자들까지도 홀리는 매력이 있다.
처음엔 생각보다 가볍고, 결말이 눈에 뻔히 보이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책을 덮어야하나 여러번 고민했으니,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 <연애시대>와 요즘 핫한 드라마 <청춘시대>의 박연선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말에 더 큰 기대를 하게 된건 어쩌면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었으나..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예상과 달라지는 전개, 그와 더불어 점점 커지는 흥미로움이 이 책을 중간에 덮지 않은 걸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각 집의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만큼 허물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차마 서로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울타리 안으로 쉬쉬하던 속사정을 알게되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끼워맞춰 전체 틀을 그려가는 과정도 잠시 더위를 잊고 집중할만큼 흥미롭다.
내일 엄마 아빠가 올 것이다. 한 달 보름가량의 두왕리 생활이 끝나는 셈이다.
홍간난 여사의 드라마도 오늘이 마지막회란다.
"에에, 저렇게 끝나는 거여? 끝이 뭐 저렇다니?"
홍 여사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엔딩 음악과 함께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라는 자막이 지나가고, 다음 주부터 시작할 새로운 드라마 예고편이 나왔다.
찌르륵찌르륵. 저 소리가 귀두라미 소린지 다른 벌레 소린지 모르겠다. 밤바람이 서늘해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고 홍간난 여사는 벌써 양말을 찾아 신었다. 올 여름도 다 갔나 보다.
-p, 391
매번 외갓집에 가면 처음엔 어색해서 낯을 심하게 가렸다. 아직도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세은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엄마가 옆에서 떨어지면 앵-하고 울었다고'. 그런 나도 시간이 지나고 집에 돌아갈때쯤이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촌들과 친해져서 집에 가기 싫어해서 항상 '너네는 왜 집에 갈때쯤 친해져서 그러니' 하며 이모, 이모부가 많이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느꼈던 시원섭섭하고 많이 아쉬워했던 기분을 이 소설을 덮으면서 느끼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시골 할머니댁으로 휴가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손녀와 할머니, 시골의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댁으로 떠나온 긴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의 그 기분을 이렇게 공감가도록 표현해낼 수 있는걸로 봐서 작가님은 분명 할머니, 시골생활의 좋은 추억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할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이 소설에 녹여낸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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