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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하지만 모양새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과감히 그렇게 말하자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응, 옛날부터 세상에 대한 체면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집이니까."
노조미 씨의 웃는 방식은 외국인스럽다. 숨을 후우 토해내고, 전화상이라서 보이진 않지만 어깨라도 으쓱하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건 그녀가 혼혈 2세여서인지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알 수 없다.
"네, 뭐, 그렇죠."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노조미 씨와 고이치만 해도 아버지가 다른데 한집에서 자란 남매다.
세상에 대한 체면―. 나는 거기에 대해 생각한다. 고이치네처럼 부자는 아니지만 나는 제대로 된 가정에서 성장했다. 세상에 대한 체면이란 곧 자신의 양심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신경 쓰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시누이에게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다. -p, 566~567
조용한 추석 연휴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뉴스에서 요즘은 추석 음식을 만들어서 배달해주는 대행업체가 인기라는 내용이 나왔다. 그 내용을 보고 '우리가족의 유행을 이제야 따라가네' 생각했다. 우리가족은 설날에도, 추석에도, 김장철에도 그 민족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은 집에서 전을 부치거나 송편을 빚거나, 김장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뜻인데 그래서 난 어렸을 때부터 갓 부친 전, 갓 빚어낸 송편을 먹어보는게 작은 바람이었다.
우리가족의 시선에선 명절음식을 힘들게 준비하는게 괜한 일 같고 낯설게 보였듯이 다른 가족들의 시선에선 추석특집방송, 추석특선영화, 꽉 막힌 귀성길 등으로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족행사를 무심하게 보내는 우리 가족이 낯설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 명절은 쉬는날. 반찬에 다시 데워서 올린 명절음식이 하나 더 추가되는 날인것이다. 특히 이번처럼 긴 연휴는 길게 쉴 수 있는 날이라 더 좋을뿐.
이런게 바로 에쿠니 가오리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체면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집'이랄까. 확실히 요즘은 세상에 대한 체면을 신경쓰지 않는 가족이 늘고 있다. 요즘 명절연휴의 트렌드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가족끼리 다 모여서 긴 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평소엔 가족들을 위해 몇박 몇일씩 시간을 내는게 버거우니 이런 긴 연휴를 이용해서 국내든, 해외든 가족들끼리 추억을 쌓는 여행을 떠난다는 것.
쨌든!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손꼽아 기다렸던 에쿠니 가오리의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이 소설에선 '세상에 대한 체면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집'을 다루고 있다. 에세이를 쓰든, 연인간의 사랑을 다루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든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그게 '충분히 있을수도 있는 일'이라 좋다.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낸달까.
이 소설도 그러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가족인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특별하다. ('평범하지 않다' 라는 말은 싫어하므로 특별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3대가 모여사는 이 가족은 1대에서 2대로, 3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함이 더해졌다. 러시아인 할머니와 독신인 이모와 외삼촌, 어린 아이들 넷 중에 둘은 아빠가 다른 아이와 엄마가 다른 아이. 심지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교육을 시키는 모습까지.
소설을 읽을수록 가족이란 나를 지켜주는 보금자리일까, 아니면 나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울타리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됐다. 나도 지금 우리 가족의 생활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우리집이 아닌 곳에 가면 불편함을 느껴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디 가서 1박을 하고 오는 걸 어려워하고, 낯선 곳에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밥을 먹는 사소한 행동마저 큰 일, 힘겨운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소설 속의 이 특별한 가족의 구성원들은 이 집에서 나가 새롭게 가정을 이룬 이들도 있고, 이 집에서 여전히 머물며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이 집에서 나간 이들은 자라면서 다른 가족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자신의 가족을 비교하며 자기 가족이 잘못됐다고 여기는 부류였고, 이 집에 여전히 머무는 이들은 다른 가족이 어떻게 살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한 부류였다.
에쿠니 가오리의 첫 장편이었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이 긴 글이 끝났음에도 내 머릿속엔 '나는 지금 가족을 울타리로 여기고 있는걸까, 보금자리로 여기고 있는걸까?' 하는 물음이 끝나지않고 계속해서 맴돈다.
집은 변함이 없는데 시간이 흘러 상황이 변한다. -p, 431
"가엾은 알렉세이에프."
그 후에 엄마가 그렇게 말하고, 외삼촌이 힘겹게 숨을 쉬면서도,
"비참한 니진스키."
라고 대답한 것은 아빠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 가족만의 일, 지극히 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p, 488
세월이 흘렀구나, 라는 생각이 든 까닭은 외삼촌이 돌아가셔서라기보다 앞에서 걷는 아빠와 엄마가 나이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리쿠코가 이제는 작가이기 때문이며 고이치 옆에 교코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모델 몸매였던 아사미 씨도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허리에 살도 많이 붙었다. -p, 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