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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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그들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폴이 들려준 몇 마디 말만으로도 시몽은 지난 열흘 동안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로제의 무관심, 시몽에 대한 그의 빈정거림, 그녀의 외로움 같은 것들을. 폴은 이 공백 기간동안 로제를 되찾고자 애썼다. 적어도 다시 로제와 만나, 다시 그와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한 어린아이 같은 로제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자신을 낮추는 그녀의 노력은 감동적이었다. 로제가 즐기는 저녁 식사, 그가 좋아하는 드레스, 그가 유쾌해하는 대화 주제 같은, 우스꽝스러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지적인 여성이 활용한다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여성지에서 추천하는 온갖 방법들이 이번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입술을 타게 만드는, "로제, 당신의 잘못이 날 불행하게 만들고 있어.", "로제,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같은 말들을 교묘한 조명이나 연한 양고기로 대체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여성 특유의 반사적 반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쓰디쓴 체념에서 나온 결과도 아니었다. 그랬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 두 사람'에 대한,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일종의 가학인 셈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외쳤어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나 로제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오기를 거의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의 무엇인가가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계산과 헛된 희망 속에서 열흘을 보낸 그녀로서는 시몽에게 설복당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몽은 전화로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직접 얼굴을 대하면 "저는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시몽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완벽한 어떤 것, 적어도 어떤 것의 완벽한 절반이었다. 이런 일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야 완벽하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오래전부터 줄곧 앞장서는 입장, 대개 혼자 애쓰는 입장이 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일에 지쳐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 말이 유난히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개입된 이 연애의 초입에서, 예를 들어 로제와의 관계 초기에 있었던 흥분과 약동 대신 발끝까지 휘감은 거대하고 나른한 권태를 느꼈다. 모두들 나에게 분위기를 바꿔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애인을 바꾸게 되는군 하고 그녀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덜 성가시고 더 파리지앵답고 너무나 자주 만나 주는 애인으로…….

-p, 100~101 




 








 

사강이 24살에 썼다는 이 글을, 24살이었던 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어가며 읽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찍어둔 책표지 사진으로 바꿔놓은 카톡 프로필 사진이 25살의 반절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도 변함없는걸 보면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폴의 '오래된' 연인인 로제는 폴을 외롭게 했다. 주말에 짧은 데이트를 한 후 로제는 폴을 빈 집에 들여보낸 채 돌아갔다. 폴은 로제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해주기를, 로제가 그의 어떤것보다 그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사랑하고있다는 걸 오롯이 느껴지도록 애정표현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같은 여자이기에. 그것은 그녀가, 아니 어쩌면 사랑하고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그녀가 기대했던 완벽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가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꿔야하나 생각이 들만큼 권태로움이 가득한 습관이.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엘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 56





​그런 그녀에게 시몽이 다가왔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처럼, 타이밍 좋게 다가온 그는 그녀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적극적인 애정공세, 그녀에게만 집중되어있는 온 신경, 그녀에게 잘보이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


그렇게 기대하던 모습으로 다가온 시몽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폴이었지만, 시몽과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로움이 가득한 습관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게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연인이 함께 긴 시간을 지내오다보면 느끼는 여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이 감정들을 사강은 속시원하게 그려낸다.







폴과 로제, 시몽을 보며 자연스레 내 연애도 돌아보게 된다.

'니가 보고싶어서 니네 집 근처를 서성거렸어' 라고 귀여운 연락을 해주던 남자친구는 이제 없다. 하루의 반 이상을 붙어있고도 시도때도없이 연락을 주고받던 남자친구와 나는 이제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서로가 사랑받고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애정공세를 펼치던 남자친구와 나는 이제 없다. 

대신 '당연히 알겠지' 하는 생각으로 연락을 띄엄띄엄 하는 남자친구와 내가 있다. '좋아해. 사랑해.' 라는 말은 거의 주고받지 않는 남자친구와 내가 있다.  

내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은 평소에 내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내가 외롭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것, 보살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는 것(가령 혼자 자야하는 날이면 '문단속은 잘했어?' 하고 물어주는 시시한 걱정이라든가), 시도때도없이 내가 사랑받는 여자라는걸 느끼게 해주는 것, 오롯이 나에게만 신경을 써주는 것이지만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함과 편안함이 자리잡은 우리에겐 어쩌면 낯간지러운 기대라는 걸 잘 안다. 나도 남자친구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을게 뻔하므로.

익숙한 습관이다. 아직까지 나쁘진 않다. 가끔씩 연애 초기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운함이 있다가도 이내 잠잠해진다. 오래된 연인이라면, 특히 감정에 예민한 여자들이라면 더 자주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감기처럼 언제 앓았는지 모르게 자고 일어나면 가뿐해진다. 이렇게 각자의 감정보단 서로의 상황을 먼저 이해해주는게 오래된 연인의 강점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연인은 몸에 배서 바꾸기 쉽지 않은 습관같은 것이지만, 이 습관이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서로 노력하는 것이 오래된 연인이 함께 기대하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지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간 그녀는 자기 방의 침대 맞은편 벽면을 떠올렸다. 커튼이 쳐 있고 유행 지난 탁자가 놓여 있고 왼쪽에 작은 옷장이 있는 그 벽을 그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라보았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바라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운 상태로. 로제, 로제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늙어 가라는 선고를 내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 자신조차도…….

"지금 당신에게 제 모습은 엊저녁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더 딱하게 보일 겁니다." 시몽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면 이게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한 청년의 연극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연한 빛깔의 눈동자에 가벼운 혼란을 담고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매끈한 데다 표정도 너무나 간절해서 그녀는 하마터면 그 얼굴에 손을 얹을 뻔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당신이 너무 젊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나친 사랑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자, 나가서 좀 걸을까요. 지금 날씨가 무척 좋네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가을이 아주 부드럽게 폴의 가슴에 차올랐다. 젖은 다갈색 나뭇잎들이 서로 뒤엉킨 채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p, 43~45



늘 그랬었다. 폴의 얼굴에는 안정되고 자족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상대에게서 요란한 수다를 끌어내곤 했다.

-p, 52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엘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 56



평생 처음으로 시몽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할 곤경 사이에서 자신이 막아서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귀던 여자들에게 그토록 빨리 싫증을 내고 그들의 속내 이야기나 비밀,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보호자 역할을 맡기려는 그들의 시도에 겁을 내던 시몽. 줄행랑을 치는데 그토록 익숙했던 시몽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고 기다리고 싶어 하다니. 하지만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그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비겁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기다림이 되리라…….

-p, 60~61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사랑에 대한 상당히 좋은 정의군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어색해져서 침묵했다.

"저는 열정적인 연인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p, 63~64



그다음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았던 것이 잘못은 아닐까? 그는 그들이 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갔던 소풍, 너무나 지루해서 중간에 빠져나왔던 전시회, 어머니의 집에서 열린 그 끔찍했던 디너파티 같은,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들의 장면 하나하나를 열 번, 스무 번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장면 하나하나가 되살아났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 하나하나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날이 갔고, 그는 그 시간을 모았다. 아니, 그는 삶을 잃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p, 95~96



그는 자기 어머니에 관해, 여행 취미에 관해, 미국에 관해, 러시아에 관해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와의 수많은 공통점을 시시콜콜 편안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한다거나 매혹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았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동시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p, 99



나는 어린애가 아냐, 폴. 내게는 당신을 이해할 능력도,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어.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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