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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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라면 간단한 문제다. 유의미한 대화와 운명적인 만남의 연속. 하지만 일상은 다르다. 쓰잘 데기 없는 대화, 우연한 만남, 허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이다. 임신이 아닌 헛구역질을 무수히 하고, 뇌졸중이 아닌 그냥 두통이 훨씬 많다.

-p, 363










이제 좀처럼 그럴 일이 없지만 아니,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어렸을 땐 방학이면 기간을 여유롭게 잡고 남원 외갓집으로 휴가를 떠났다. 아침에 부엌에서 들리는 부산한 소리에 잠에서 깨면 외갓집에 놀러온 사촌 언니, 오빠들과 같이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냇가로 가서 송사리를 잡고 다슬기를 잡고, 배가 고파질때쯤이면 꼬질꼬질해진 몸을 이끌고 풀잎에서 쉬고있는 잠자리를 잡으면서 외갓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날들. 나에게도 이런 천진난만한 추억이 있다. 


마냥 철없던 우리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리고 (할아버지 돋보기로 파리를 태워죽이는 잔혹한 방법(?)을 알려주던 개구쟁이 오빠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또는 책임감을 물씬 풍기는 아빠가 되었다), 외할머니 외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외갓집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금. 특히 요즘처럼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 여름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때면 어렸을 적 몸을 담그고 놀던 냇가가, 다같이 둘러서 먹던 차가운 수박이 그렇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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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으스스하지만 어쩐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도록 귀여운 표지를 가진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그리워하던 어린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된 어머니가 걱정된 자식들이 백수인 '강무순'을 (강무순이 잠깐 잠든 틈을 타) 이 시골집에 몰래 두고 떠나버리는걸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루함을 못견디던 강무순이 우연히 어렸을적 그려놓은 보물지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쉬쉬하던, 하지만 여전히 이 시골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네명의 소녀들이 사라진 사건'을 파헤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손녀인 강무순과 할머니 홍간난 여사에게서 느껴지는 걸크러쉬는 이 소설 속의 세계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켜보는 독자들까지도 홀리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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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생각보다 가볍고, 결말이 눈에 뻔히 보이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책을 덮어야하나 여러번 고민했으니,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 <연애시대>와 요즘 핫한 드라마 <청춘시대>의 박연선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말에 더 큰 기대를 하게 된건 어쩌면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었으나..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예상과 달라지는 전개, 그와 더불어 점점 커지는 흥미로움이 이 책을 중간에 덮지 않은 걸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각 집의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만큼 허물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차마 서로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울타리 안으로 쉬쉬하던 속사정을 알게되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끼워맞춰 전체 틀을 그려가는 과정도 잠시 더위를 잊고 집중할만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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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엄마 아빠가 올 것이다. 한 달 보름가량의 두왕리 생활이 끝나는 셈이다. 

홍간난 여사의 드라마도 오늘이 마지막회란다. 

"에에, 저렇게 끝나는 거여? 끝이 뭐 저렇다니?"

홍 여사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엔딩 음악과 함께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라는 자막이 지나가고, 다음 주부터 시작할 새로운 드라마 예고편이 나왔다.

찌르륵찌르륵. 저 소리가 귀두라미 소린지 다른 벌레 소린지 모르겠다. 밤바람이 서늘해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고 홍간난 여사는 벌써 양말을 찾아 신었다. 올 여름도 다 갔나 보다.

-p, 391




매번 외갓집에 가면 처음엔 어색해서 낯을 심하게 가렸다. 아직도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세은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엄마가 옆에서 떨어지면 앵-하고 울었다고'. 그런 나도 시간이 지나고 집에 돌아갈때쯤이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촌들과 친해져서 집에 가기 싫어해서 항상 '너네는 왜 집에 갈때쯤 친해져서 그러니' 하며 이모, 이모부가 많이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느꼈던 시원섭섭하고 많이 아쉬워했던 기분을 이 소설을 덮으면서 느끼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시골 할머니댁으로 휴가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손녀와 할머니, 시골의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댁으로 떠나온 긴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의 그 기분을 이렇게 공감가도록 표현해낼 수 있는걸로 봐서 작가님은 분명 할머니, 시골생활의 좋은 추억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할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이 소설에 녹여낸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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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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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그들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폴이 들려준 몇 마디 말만으로도 시몽은 지난 열흘 동안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로제의 무관심, 시몽에 대한 그의 빈정거림, 그녀의 외로움 같은 것들을. 폴은 이 공백 기간동안 로제를 되찾고자 애썼다. 적어도 다시 로제와 만나, 다시 그와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한 어린아이 같은 로제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자신을 낮추는 그녀의 노력은 감동적이었다. 로제가 즐기는 저녁 식사, 그가 좋아하는 드레스, 그가 유쾌해하는 대화 주제 같은, 우스꽝스러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지적인 여성이 활용한다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여성지에서 추천하는 온갖 방법들이 이번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입술을 타게 만드는, "로제, 당신의 잘못이 날 불행하게 만들고 있어.", "로제,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같은 말들을 교묘한 조명이나 연한 양고기로 대체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여성 특유의 반사적 반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쓰디쓴 체념에서 나온 결과도 아니었다. 그랬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 두 사람'에 대한,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일종의 가학인 셈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외쳤어야 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나 로제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오기를 거의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의 무엇인가가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계산과 헛된 희망 속에서 열흘을 보낸 그녀로서는 시몽에게 설복당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몽은 전화로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직접 얼굴을 대하면 "저는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시몽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완벽한 어떤 것, 적어도 어떤 것의 완벽한 절반이었다. 이런 일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야 완벽하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오래전부터 줄곧 앞장서는 입장, 대개 혼자 애쓰는 입장이 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일에 지쳐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 말이 유난히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개입된 이 연애의 초입에서, 예를 들어 로제와의 관계 초기에 있었던 흥분과 약동 대신 발끝까지 휘감은 거대하고 나른한 권태를 느꼈다. 모두들 나에게 분위기를 바꿔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애인을 바꾸게 되는군 하고 그녀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덜 성가시고 더 파리지앵답고 너무나 자주 만나 주는 애인으로…….

-p, 100~101 




 








 

사강이 24살에 썼다는 이 글을, 24살이었던 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어가며 읽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찍어둔 책표지 사진으로 바꿔놓은 카톡 프로필 사진이 25살의 반절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도 변함없는걸 보면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폴의 '오래된' 연인인 로제는 폴을 외롭게 했다. 주말에 짧은 데이트를 한 후 로제는 폴을 빈 집에 들여보낸 채 돌아갔다. 폴은 로제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해주기를, 로제가 그의 어떤것보다 그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사랑하고있다는 걸 오롯이 느껴지도록 애정표현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같은 여자이기에. 그것은 그녀가, 아니 어쩌면 사랑하고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그녀가 기대했던 완벽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가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꿔야하나 생각이 들만큼 권태로움이 가득한 습관이.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엘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 56





​그런 그녀에게 시몽이 다가왔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처럼, 타이밍 좋게 다가온 그는 그녀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적극적인 애정공세, 그녀에게만 집중되어있는 온 신경, 그녀에게 잘보이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


그렇게 기대하던 모습으로 다가온 시몽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폴이었지만, 시몽과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로움이 가득한 습관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게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연인이 함께 긴 시간을 지내오다보면 느끼는 여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이 감정들을 사강은 속시원하게 그려낸다.







폴과 로제, 시몽을 보며 자연스레 내 연애도 돌아보게 된다.

'니가 보고싶어서 니네 집 근처를 서성거렸어' 라고 귀여운 연락을 해주던 남자친구는 이제 없다. 하루의 반 이상을 붙어있고도 시도때도없이 연락을 주고받던 남자친구와 나는 이제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서로가 사랑받고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애정공세를 펼치던 남자친구와 나는 이제 없다. 

대신 '당연히 알겠지' 하는 생각으로 연락을 띄엄띄엄 하는 남자친구와 내가 있다. '좋아해. 사랑해.' 라는 말은 거의 주고받지 않는 남자친구와 내가 있다.  

내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은 평소에 내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내가 외롭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것, 보살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는 것(가령 혼자 자야하는 날이면 '문단속은 잘했어?' 하고 물어주는 시시한 걱정이라든가), 시도때도없이 내가 사랑받는 여자라는걸 느끼게 해주는 것, 오롯이 나에게만 신경을 써주는 것이지만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함과 편안함이 자리잡은 우리에겐 어쩌면 낯간지러운 기대라는 걸 잘 안다. 나도 남자친구가 기대하는 완벽한 어떤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을게 뻔하므로.

익숙한 습관이다. 아직까지 나쁘진 않다. 가끔씩 연애 초기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운함이 있다가도 이내 잠잠해진다. 오래된 연인이라면, 특히 감정에 예민한 여자들이라면 더 자주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감기처럼 언제 앓았는지 모르게 자고 일어나면 가뿐해진다. 이렇게 각자의 감정보단 서로의 상황을 먼저 이해해주는게 오래된 연인의 강점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연인은 몸에 배서 바꾸기 쉽지 않은 습관같은 것이지만, 이 습관이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서로 노력하는 것이 오래된 연인이 함께 기대하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지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간 그녀는 자기 방의 침대 맞은편 벽면을 떠올렸다. 커튼이 쳐 있고 유행 지난 탁자가 놓여 있고 왼쪽에 작은 옷장이 있는 그 벽을 그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라보았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바라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운 상태로. 로제, 로제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늙어 가라는 선고를 내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 자신조차도…….

"지금 당신에게 제 모습은 엊저녁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더 딱하게 보일 겁니다." 시몽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면 이게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한 청년의 연극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연한 빛깔의 눈동자에 가벼운 혼란을 담고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매끈한 데다 표정도 너무나 간절해서 그녀는 하마터면 그 얼굴에 손을 얹을 뻔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당신이 너무 젊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나친 사랑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자, 나가서 좀 걸을까요. 지금 날씨가 무척 좋네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가을이 아주 부드럽게 폴의 가슴에 차올랐다. 젖은 다갈색 나뭇잎들이 서로 뒤엉킨 채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p, 43~45



늘 그랬었다. 폴의 얼굴에는 안정되고 자족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상대에게서 요란한 수다를 끌어내곤 했다.

-p, 52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엘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 56



평생 처음으로 시몽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할 곤경 사이에서 자신이 막아서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귀던 여자들에게 그토록 빨리 싫증을 내고 그들의 속내 이야기나 비밀,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보호자 역할을 맡기려는 그들의 시도에 겁을 내던 시몽. 줄행랑을 치는데 그토록 익숙했던 시몽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고 기다리고 싶어 하다니. 하지만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그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비겁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긴 기다림이 되리라…….

-p, 60~61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사랑에 대한 상당히 좋은 정의군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어색해져서 침묵했다.

"저는 열정적인 연인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p, 63~64



그다음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았던 것이 잘못은 아닐까? 그는 그들이 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갔던 소풍, 너무나 지루해서 중간에 빠져나왔던 전시회, 어머니의 집에서 열린 그 끔찍했던 디너파티 같은,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들의 장면 하나하나를 열 번, 스무 번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장면 하나하나가 되살아났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 하나하나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날이 갔고, 그는 그 시간을 모았다. 아니, 그는 삶을 잃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p, 95~96



그는 자기 어머니에 관해, 여행 취미에 관해, 미국에 관해, 러시아에 관해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와의 수많은 공통점을 시시콜콜 편안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한다거나 매혹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았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동시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p, 99



나는 어린애가 아냐, 폴. 내게는 당신을 이해할 능력도,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어.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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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의 특별한 하루 - 감사 누리과정 유아 인성동화 14
김미나 글.그림, 최혜영 감수 / 소담주니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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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엔 '감사'에 대한 책이 많네요^^ 

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재밌는 이야기로 알려줄 수 있는 책
《은비의 특별한 하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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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보이는 뾰루퉁한 표정들. 
은비네 가족들인데요.

입을 옷이 없다며
먹을 음식이 없다며
갖고 놀던 장난감이 재미없다며

불평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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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집에 비가 새기 시작했어요ㅋㅋㅋㅋㅋ 
아빠가 급하게 마련한 배 위에 올라타 떨고 있는 은비네 가족.

이때도 은비네 아빠는
"이런 낡아빠진 집에 사는게 아니었는데!"
하고 불평을 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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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옷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사실 이렇게 따뜻하게 걸칠 옷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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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먹을게 없다고 불평했지만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 감사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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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고 내팽개친 곰인형도 
사실은 소중한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은비네 가족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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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모든걸 쉽게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자라고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입을 옷이 없네!' 하고 불평하는 장면에선 뜨끔! 했답니다.

이렇게 짧은 동화를 통해서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죠?

+
아이들 앞에선 항상 감사하다는 말만 해야겠어요.
저렇게 다 따라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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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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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별 대가 없이도 넘치도록 주어지던 설렘과 기대 같은 것들이 어른이 되면 좀처럼 가져보기 힘든 이유는 모든 게 결정되어버린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벌 수 있는 돈,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 등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으면 대개 정해져 버린다. 장차 여행은 몇 나라나 더 가볼 수 있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으며 내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지가 점점 계산 가능한 수치로 뚜렷해지는 것이다. 남은 생이 보인다고 할까. 허나 아무리 어른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채로 몇십 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가혹하다, 고 생각하기에 나는 노력하기로 했다. 너무 빨리 결정지어진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은 생에서도 한두 번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기길 바라며 살고 싶다. 자고 일어나서 눈을 떴을 때 또다시 맞을 하루가 버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가꾸는 일이 소중한 이유는 그 일을 함으로써 나와 내 삶이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믿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게 앞으로 가는 건지는 몰라도,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 그런 느낌을 가질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살이라도 몇 킬로 빼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 해도, 그런 작은 변화의 여지라도 있어 내 남은 생이, 내 몸과 마음이 이대로 정해져 버리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노력할 거다.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을 삶을 위하여.
-p, 149

  














이 책을 읽고 문장들을 정리해둔건 해가 바뀌기 전, 12월 즈음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행동은 그동안 어렴풋이 느끼던 감정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내 상태를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문장들을 뽑아내는 것. 그래서 아마도 한겨울에 뽑아낸 이 문장들을 개나리가 만개할 정도로 따뜻해진 지금, 다시 읽어본다면 공감이 가지 않는 문장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 찬찬히 이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똑같이 공감했던 문장은 이거였다.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얘기가 안 끊어진대요."


그럼, 내가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건가?

-p, 125


난 이 문장을 읽으면서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을 '만난다'기 보단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만나고나면 후련해지는, 기분전환이 되어 밤에 푹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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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던가. 사실은 슬픔은 나누면 나에게는 반이 되지만 내 슬픔을 나눠가진 사람에겐 배가 되는게 아닐까. 


이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요즘의 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 (요즘 얼굴을 마주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인)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주고받는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불안함을, 내가 느끼는 자책을, 혹시라도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여러가지 핑계들을, 내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고 못났는지에 대한 넋두리를, 그렇게 죽는 소리들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얼마 전, 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며 멀리서 시간을 내 찾아와준 친구를 만나 모자만 푹 눌러쓴 채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에 갔다. 유일하게 민낯을 보여줄 수 있는 친구였음에도 예쁘게 화장을 한 친구 앞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꾸미지 않은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이런저런 불평만 늘어놓다 왔던 것 같다. 25살이면 멋진 여자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 신세를 한탄하다가 그럼에도 긍정적인 친구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나의 이야기는 '매일 책만 쳐다본, 강의만 쳐다본 그저그런 일상들', 다른 이야기로 돌려보겠다고 꺼낸 이야기들은 '잘 된 친구들에 대한 못마땅한 이야기들'. 집 근처의 동네 카페라 우리밖에 없던 그 작은 카페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를 태우고 가는 택시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참 많이 씁쓸해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주고 간 선물과 편지를 보며 코가 시큰해졌다.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누가 이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쉬운거래!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앉아서 집중하는게 얼마나 힘든건데! 그치?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마음 꾹 붙잡고 공부하고 있는 너도 진짜 대단한거야. 잘 하고 있어! 뭐, 나도 그렇지만 우리 지금 이 시기가 많이 불안하지? 그 마음 나도 너무 잘 알고있어서 니가 얼마나 기분 우울하고 다운되어있을지 상상이 가. 그래서 가끔은 내가 내 일을 남일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한다!


근데 내 인생, 너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까, 그냥 우리 견디자! 

견디면, 그렇게 시간 보내다보면 어느새 지난 줄도 모르게 다 끝나 있을거야!


그리고 물론 그동안 우리 할일도 열심히 할거구, 잘 할거란 것도 알아~ 뭐 좀 못하면 어때! 우린 아직 젊고 할 일은 많다는데, 난 너처럼 한명만 괜찮다고 응원해줘도 힘날 것 같아.


이 향 맡고 봄을 느끼렴. 우아하게 향기를 풍기며 공부하자. 공부하는동안 향초 때문에 가끔은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




너는 내가 널 만나서 불안한 이야기들을, 내 우울하고 다운되어있을 모습을 내내 내비칠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럼에도 넌 내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거였구나. 


여전히 내 마음을 컨트롤하기에 버거운 날들이다.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내 슬픔을 반으로 나누고 싶어할거라는 걸 잘 알기에 생각없이 주고받던 연락을 잠시 멈추고, 입도 다물기로 했다. 내 부정적인 모습마저 평생 읽을 책처럼 차분하게 들어주는 이들이 있어 미안하면서도 고맙지만 내 슬픔을 나눠가지게 한, 그 후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건 싫다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께도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처음엔 나 혼자 기록하는 공간이라 여기고 썼던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고, 찾아와주니 좋았지만 그만큼 내 진심을 담은 생각을 집어넣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역시, 지금은 이 공간에서는 이기적이고 싶다. 내 친구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주러 기꺼이 찾아와 준 사람이니까! (제목에 속아 책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고 왔다가 책에 대한 이야기보단 내 이야기가 더 많은 내 일기같은 글을 읽고계신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하다...)


친구의 말처럼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지난 줄도 모르게 다 끝나 있을거니까'. 그리고 '내 주변사람들에게 난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시간을 잘 보내려 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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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


하지만 만남이란 건 원래 어떤식으로든 어긋남을 동반하기 마련 아닌가. 언제 인연이 내가 맞이할 준비가 되었을 때 찾아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언제나 내가 좀 더 성숙했을 때,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보다 안정되어 있을 때,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아무튼 내가 조금은 더 잘나가고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일 때 누군가를 만나길 바랐지만,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되어본 적 없었고, 여전히 이렇게 상대를 앞에 두고 또 아쉬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난 언제까지 상대의 완벽함을 통해 내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노력을 되풀이해야 할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라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완전한 존재일 것임을 알고, 그렇게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누구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모든 모자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사랑이 아닐까?

-p, 108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나이기에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 때면

슬프다.

그게 소중한 사람일 땐 더더욱.

-p, 108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얘기가 안 끊어진대요."


그럼, 내가 평생 읽을 책 같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건가?

-p, 125



"난 니가 좋은 게 좋아."

"어쩌죠. 저도 당신이 좋은 게 좋은데."

-p, 221



보자. 사랑하니까 이해하게 되는 것인가, 이해를 주고받다 보니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인가.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정말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사랑에 있어서 이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나를 명동 중앙극장으로 이끌어 함께 「렛미인」을 보았던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당시 막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그때부터 헤어지던 날까지 우리가 주고받았던 것은 결국 서로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끝없는 과정들의 연속 외에 다른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은 열렬하였으나, 어리고(?) 서툴렀던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서로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만을 구하다 결국엔 서로 또 다른, 더 새롭고 더 깊은 이해를 찾아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는 연습이 조금만 더 잘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만났더라면. 조금만 더 성숙했을 때 서로를 알았더라면.


사랑과 이해는 어째서 한 몸이 아니던가.

헤어지고 나서야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왜 그렇게 많았던가.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다던 너를 이해하는 일만은 어째서 그토록 어려웠던가.

가끔은 사랑보다 이해가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p,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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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연애는 이기적이다 - 나를 위해 연애할 것
후쿠다 가즈야 지음, 박현미 옮김 / MY(흐름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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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말이, 이기적인 상태가 바람직하다거나 제멋대로 굴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사귈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사귀는 상대에게는 최소한의 배려를 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법입니다. 저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친절, 다양한 형태의 헌신도 전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연애에 존재하는 것은 의식적인 이기심과 무의식적인 이기심이라고.

연애에서 우리가 벌이는 모든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헌신적이며 희생을 동반하는 것일지라도 이기적입니다. 그런 행위는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 뿐입니다.

상대방에게 선물을 주거나 상대방을 근사한 장소에 초대하면, 상대를 기쁘게 만들기 전에 먼저 스스로가 즐겁지 않은가요?

이런 행위에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고, 상대방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고, 감사의 마음을 갖게 만들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행위는 이기적입니다.

저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기적인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자신의 이기심에 눈을 감고, 자신의 희생에 도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배려나 노력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서 연애의, 그리고 대인관계의 모든 기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구제불능일 정도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

그 점을 인식하고 항상 의식할 것.

그것이 제가 말하는 연애의 첫 번째 계율입니다.

-p,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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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거나 혹은 반대로 이기적인 연애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연애라는 주제는 언제나 매혹적인 것이어서, 《어쨌든 연애는 이기적이다》라는 제목에 끌려 밤마다 야금야금 읽어갔다. 감정에 끌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어린 연애'가 아닌, 감정을 절제하고 머리를 쓰고 이 관계 내에서 전략적으로 힘겨루기를 하기도 하며, 이로 인해 함께 성숙해질 수 있는 '어른스러운 연애'에 관한 이야기였다.


후쿠다 가즈야의 이전 작품인 《가끔은 까칠하게 말할 것》과 《나 홀로 미식수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 느껴지는 그의 직설적이고도 단호한, 까칠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모습을 마주하니 그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에 대해 백 번 이해가 간다. '그저 서로가 좋아서 시작한 연애에 이렇게까지 따지고 들어야해?' 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분명 있겠지만 그 질문에 나는 그의 편에 바짝 붙어서서 'Yes!'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저 서로가 좋아서 시작된 그 연애'를 '그저 그런 연애'로 끝내고 싶지 않다면, 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애정으로 가득 찬 연애, 서로가 성숙해지고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는 연애, 서로의 스토리를 공유할 수 있는 연애'를 켜켜이 쌓아가고 싶다면 이 책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겠다.   


 





 





이 책을 읽는동안 우리의 연애를 떠올렸다. 


연애를 하는 동안 흘러가는 날(사귄지 100일, 200일 등)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이 숫자에 따라 그려지는 우리 두 사람의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것처럼 참 평범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조심스럽고 어렵고 설렘이 있었다면 만난지 2년이 지난 지금은 익숙하고 편안하면서도 권태롭고 단조롭다. 


분명한 건, 우리가 만나며 100일, 200일…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만큼 우리도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2살이던 나는 어느새 25살이 되었고, 28살이던 오빠는 어느새 31살이 되었으니 우리가 이렇게 긴 시간 만나는 동안 여전히 22살, 28살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는 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자리에서 참 많은 성장을 한 것이다.


지금도 물론 사소한 일에 서운함을 느끼고, 토라지고, 의심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할 때도 많지만 그때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 문제를 두고 전략적으로 싸우고, 타협하고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간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를 지나며 전보다 서로를 잘 알게 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이지만 따뜻한 대화를 하고, 당연하게 안부를 묻고, 서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장소를 얻고, 상대방의 취향을 알게되고, 이렇게 하나하나 쌓이는 추억들을 얻게 되는 것도 하나의 묘미이다. 이 연애라는 게임에서 중간에 지게 될지, 아니면 끝까지 잘 싸워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모든 행위가 이 사람과 잘 해보고 싶다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될 수 있는 한 더, 더, 더 이런 이기적인 연애를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반대로 말하면, 만약 애정을 원한다면 혹은 애정으로 가득 찬 관계를 원한다면 사랑을 지상 최대의 어떤 것이나 절대적인 무엇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나 연애를 신격화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연애는 일상 속에서 켜켜이 쌓이는 풍성한 대화와 배려, 그리고 밥을 먹거나 놀러 가거나 하는 사사로운 일들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헛된 생각에 마구 휘둘리지 않도록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지요.

그런 일상의 축적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귀찮다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는 상당히 재미있고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 38~39



잘츠부르크라는 이름 자체가 독일어로 소금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잘츠부르크 근방에는 암염 광산이 많이 있었습니다. 암염 채굴장에 나뭇가지를 던져놓은 후 반년쯤 지나 꺼내보면, 나뭇가지에 붙은 염분이 미량의 습기와 엉겨 나뭇가지는 눈부신 소금 결정으로 뒤덮이고 마치 한 덩어리의 보석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스탕달은 짝사랑이 그 대상을 얼마나 미화하는지를 이 광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비유해 '결정 작용'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사랑에 빠진 인간의 감정이란 거대한 암염 동굴과 같습니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 즉 짝사랑의 대상인 상대를 나뭇가지처럼 던집니다. 그러면 마른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던 상대방이 자신의 연정에서 분비된 엑기스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결정으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탕달은 이 이야기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상대방을 미화하기 쉬우니 상대방의 가치를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미화한다는 것에 대해 다소의 의식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스탕달의 논점은 그 반대입니다. 보잘것없는 나뭇가지에 그렇게 수많은 결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의, 인간 정신의 초능력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멋진 것이죠.

어쩌면 당신은 그것이 단순한 미화이자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에서의 진실은 연애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진리도 있습니다.

연애 혹은 결혼생활은 제3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객관적 사실과는 별도로 연애 안에서의 사실이 있습니다.

연애를 하면서 단순한 나뭇가지가 아니고 결정화된 상대를 좇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행복하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사랑하는 것, 애태우는 것의 묘미는 짝사랑에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당신의 생각이 결정화된 것처럼 상대방 역시 실제로 그만큼 찬란해집니다. 당신의 생각에 보답이라도 하듯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갑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고마운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p, 73~75



연애가 여행이 되고 연애로 인해 성숙해진다는 말은, 연애의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이 변화해서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인식의 전환이 생기거나 견해와 감각이 바뀌고, 혹은 생활권이나 인생의 비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연애의 묘미이자 핵심입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인연을 아주 단단하게 맺어주는 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고받으며 지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서로 주도권을 쥐고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싸우는 것. 그 싸움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변화해갑니다.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힘쓴다는 말은 연애라는 아름다운 행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애가 어느 정도 충실한 형태를 갖추려면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싸움만이 조화를 만들고 성장을 낳습니다.

지배하는 것, 지배당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지배권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연애관계에 긴장감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눈살을 찌푸리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바로 연애에서의 증여력이 지배력의 효능입니다.

-p, 166~167



원래 이런 이미지 관리란 약간 섬세하면서도 지적인 행위입니다. 실제로 인생 자체가 지루함으로 가득 차있으니 그런 지루함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어떻게 맞설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른이 되기 위한 테마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대화를 즐길 수 있는 자극적인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우선 스스로가 지루한 인간이 되지 않을 것, 상대방에게 늘 자극적인 존재로 있을 것. 요컨대 일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역시 그것이 정답입니다.


당신이 성장을 거듭하는 한 상대방은 당신에게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먼저 질려버릴 수는 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상대방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새로운 파트너를 찾으십시오. 너무 매정한 말인가요?

어쨌든 이런 것들이 바로 스토리를 만든다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창작한 스토리와 상대방이 만든 스토리가 일치하는 일은, 당연한 말이지만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다만 한쪽은 천천히 다가가는 연애를 그리고, 다른 한편은 격정적인 연애를 그리고 있지만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한다. 이런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가지와라 잇키 원작에 미쓰하시 지카코(따뜻하고 부드러운 화풍의 순정만화 작가-옮긴이)가 그린 만화 같네요. 그런데 과연 이런 연애가 끝까지 성립할 수 있느냐 하면 역시 어렵겠지요.

근본적으로 연애는 상대방과 이야기하고 싶다, 상대방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니 교제를 시작하면 현실에서는 지배의 게임, 즉 어느 쪽 스토리가 우위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서로의 스토리가 일치할 수는 없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정말로 함께하고 싶은 상대라면 상대방이 만든 스토리에 편승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진중해 보이는 남성이 길거리에서 발랄한 분위기의 젊은 여성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캐릭터가 그려진 커플룩을 입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녀들의 스토리에 편승해준 것입니다. 만약 이런 행위를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주 쉽게 연인을 만족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그러기 싫다면 상대방을 자신의 스토리에 편승하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해야 합니다. 제 친구 중에는 조폭 영화를 좋아하는 여자만 사귄다고 허풍을 떠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군요.

함께 영화를 보거나 같은 책을 읽는 것은 스토리를 공유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측정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p, 19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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