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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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혹은 도무지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절로 떠오르는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면,

아오세에게는 숫제 고향이 없었다.

남은 건 빛의 기억뿐이다. 부드러운 빛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오를 때가 있다.

떠돌던 건설 현장의 숙소에는 희한하게도 북쪽 벽에 큰 창이 나 있었다.

새어 들어오는 것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아닌, 왠지 조심스레 실내를 감싸 안는 부드러운 북쪽의 빛.

동쪽 빛의 총명함이나 남쪽 빛의 발랄함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듯 고요한 노스라이트(north light).

공간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사람들은 집을 고를 때 빛이 많이 들어오는지 혹은 디자인이 아름다운지, 사는 사람의 동선에 맞춰 설계가 잘 되었는지 꼼꼼히 살펴서 집을 고르곤 한다 . 그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집 혹은 공간이다. 이 책 [ 빛의 현관 ] 에 등장하는 아오세도 건축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영혼을 담아서 집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한때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현재 그것이 모두 무너져버렸다는 것.

버블 경제였던 일본 경제가 무너지고 불황 때문에 사람들이 실직을 하여 뿔뿔이 흩어지면서 아오세도 힘든 나날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지금의 사무소 소장. 비록 중소 규모의 사무소이지만 꽤 탄탄한 커리어를 걷고 있는 사무실이다. 그리고 경제의 불황과 함께 가정도 무너져버렸다. 자진 퇴직 이후 자존심의 하락을 겪던 아오세와 아내 유카리와 살얼음을 걷는 듯 매일매일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급기야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오세의 삶에 건축이라는 것은 하나의 빛이고 등불이다. 그는 특히 노스라이트에 입각한 집을 많이 지었다. 새어들어오는 것도 아닌 쏟아져들어오는 것도 아닌 실내를 살며시 감싸안는듯한 노스라이트. 그는 이전에 요시노라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서 시나노오이와케라는 곳에 북향쪽으로 창이 나있는 목조식 주택을 지었었다. 건축 잡지에 실리며 순식간에 인기를 끈 주택이었지만, 주택 완성 이후 감탄을 하던 건축주 요시노가 한번도 연락이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는 아오세.

그러던 어느날 사장으로부터 충격적인 전갈을 듣게 되는 아오세, 현재 시나노오이와케의 Y 주택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 주택이 완성되었을 때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던 요시노 부부의 얼굴과 아이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면서 아오세의 머리에 물음표가 반짝이게 된다. 건축가 아오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그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지어주길 바란다고 했던 건축주 요시노. 아오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도면을 그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직접 두눈 으로 확인을 하기 위해 시나노오이와케로 달려간 아오세.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텅 빈 채 사람의 온기가 없었던 집. 별 가구가 없이 덩그러니 집만 존재하던 그곳에서 아오세는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될 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브루노 타우트라는 독일 건축가가 만든 의자였다. 그는 나치스 정권의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에 공예품 보급과 디자인 향상에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요시노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이 의자의 발견이 도움이 될까?

유명한 작품인 [ 64 ]를 쓴 요코하마 히데오 작가, 그는 이번에는 건축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완성하였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노년에 나치스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건축을 한층 발달시킨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가정과 직장을 잃은 아오세, 돌아갈 고향이 없는 아오세는 타우트의 삶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를 가진다. 망명을 거듭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훌륭히 쌓아올린 타우트, 아오세는 그를 떠올리며 다시 건축가로써의 마음 자세를 다잡는다.

결국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건축 그 자체가 중요하기 보다는 집을 짓는 건축가의 마음 자세, 그리고 그 집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의 중간 중간, 자신 때문에 세상을 등지게된 아버지에 대한 아오세의 회상과 이제는 거의 남남처럼 되어버린 아내 유카리와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문득문득 떠올리는 아오세를 지켜보며 마음이 참 아팠다. 그가 집과 노스라이트에 집착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향을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 어디론가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마음. 고독과 무명을 겪은 예술가의 끊임없는 예술을 향한 의지, 고향을 떠나 망명한 나라에서 자신의 건축혼을 불태운 노년의 외국인 건축가 등등을 보며 아오세와 독자들은 함께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생이 상실과 고독을 건네주더라도 결국 수용하고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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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 죽음의 미학, 개정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이문열 엮음, 김석희 외 옮김 / 무블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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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아들 ],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등등 인간 세계를 냉철하게 꿰뚫어보고 예리하게 분석한 글을 많이 쓰신 이문열 작가님이 선별한 단편들이 모인 [ 이문열 세계명작 산책 ] 이 재출간되었다. 대중적일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주제의식도 가지고 있는 이문열 작가의 작품들은, 한때 큰 히트를 쳤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었다. 이번 세계명작 산책 중 [ 죽음의 미학 ] 은 바로 " 죽음 " 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때론 불길하게 때론 어둡고 공포스럽게 여겨지는 죽음, 그러나 빛과 어둠처럼 인간의 삶을 논할 때 이 " 죽음 " 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 [ 죽음의 미학 ] 에서는 어떤 작품들이 독자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졌다. 언젠가는 우리가 필시 만나게 될 " 죽음 ",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톨스토이의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이 작품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그는 작가라는 제 삼자의 눈으로 평범한 한 인간의 생애를 관찰해가면서 그의 평온했던 삶을 “ 죽음 ” 이라는 것이 어떻게 산산조각을 내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 재직하면서 평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내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물론 아내와 약간의 다툼이 있긴 했으나 살아가면서 약간의 불행의 요소들은 참아낼 수 있었다.

“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이렇다 할 변화도 없이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갔다. 인생은 즐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날 이반 일리치는 옆구리에 원인모를 통증을 느끼고 입에서 알 수 없는 끔찍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생의 정점에서 더 이상의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그에게 다가온 고통이라는 낯선 방문객. 그는 하루하루 병이 깊어감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하지만 그가 병으로 조금씩 죽어가자 사랑하는 가족들은 모두 그를 외면한다. 마치 투명인간을 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는 충성스런 하인 한 사람 밖에는 없다.

“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 이런 거짓말 - 죽음을 앞둔 그에 관해 날조된 거짓말, 죽음이라는 무섭고도 엄숙한 행위를 사교적인 방문이나 커튼이나 만찬 때 먹는 철갑상어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거짓말 - 이 이반 일리치에게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

단편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은 고독하게 죽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질병의 고통 때문에도 힘들어하지만 사람들의 외면과 차가운 위선 (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위선 ) 을 목도하는 것이 더욱 더 괴롭다. 이 뿐만 아니라 이 단편은 인간이 “ 죽음 ”을 대할 때 거치는 과정을 이반 일리치의 모습을 통해 잘 보여주는 듯 하다.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단계를 힘겹게 거치는 이반 일리치. 죽음까지의 여정은 힘겨웠으나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이반 앞에,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구원인가?

“죽음 대신 그 자리에는 빛이 있었다. 죽음도 끝났어. 이젠 죽음도 없는 거야 "



스티븐 크레인의 [ 구명정 ]

스티븐 크레인의 단편 구명정은 그야말로 인생의 축소판과 같은 소설이다. 구명정을 타고 있는 4명의 남자들은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떠 있다. 선장, 기관사, 요리사 그리고 신문사 특파원으로 구성된 그들은 조그만 구명정이 파도에 뒤집히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들이 발견한 육지에 다다르려 노력한다. 하지만 암초에 의해 번번히 해변에 도달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방해를 받게 된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이 생생한 노력 와중에 그들의 슬픔과 공포, 좌절 그리고 절망감이 가감없이 느껴져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자연은 그들에게 무심하고 자신들은 바다에 버려진 먼지 같다는 느낌 그리고 신이나 그 누구에게도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 만약 내가 물에 빠져 죽을 거라면........ 내가 만일 물에 빠져 죽을 거라면....... 내가 만일 물에 빠져 죽을 거라면, 바다를 지배하는 미친 일곱 신의 이름에 걸고 묻겠는데, 도대체 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서 모래와 나무를 살펴볼 수 있게 했단 말인가? 내가 막 삶의 신성한 열매가 내뿜는 향기를 맡으려는 바로 이 순간에 내 코를 억지로 돌려놓기 위해, 단지 그러기 위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단 말인가? “

내 생각에 크레인은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길 원했던 것 같다. 우리는 왜 사는가? 만약 인간이 어파치 죽어야 한다면 애초에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 존재는 이 우주에서 중요하기나 한건가? 우리가 이렇게 의미없는 존재라면 우리의 인생은 어떤 중요성을 띄고 있는 것일까? 필연적인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희망을 품는다는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결코 닿을 수 없는 해변을 그냥 보는게 나을까? 아니면 해변에 닿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죽는게 나을까? 그리고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왜 어떤 사람들은 ( 그들의 선함과 악함에 상관없이 )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은 결국 사라지게 될까?



해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다하다 지치고 또 지쳐 무표정해진 사람들 속에서 신문 특파원은 문득 한 구의 시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이 시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지만 갑작스럽게 시가 그의 뇌리를 스친다.

외인부대의 한 병사가 알제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네.

돌보는 여인의 손길 하나 없었으며, 여인의 눈물 한 방울도 없었다네.

하지만 전우가 그의 옆에 다가와 섰고, 그는 그 전우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네.

” 나는 내 고향, 내 고향 땅을 다시는 못 볼 거야 .“

처음으로 그는 시 속의 군인을 하나의 사람으로, 외딴 곳의 해변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놓인 한 인간으로, 그리고 그는 시 속의 군인과 동질감을 느끼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류와 동질감을 느끼고 가엾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개별적 존재라기 보다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한없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 죽음 " 이 생생하게 다가올때 비로소 인간은 겸허해지는 것 같다. 신에게 분노하면서 종주먹을 들이대다가도 그것이 운명이라면 ( 여러 과정을 거치지만 ) 결국 " 죽음 " 을 받아들이게 되는게 인간인 듯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결국 " 죽음 " 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지 않은가? 이런 명작들을 통해서나마 간접 체험을 하면서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책을 읽는 동안 안타깝고 슬프고 우울하다는 느낌이 계속 있었긴 했지만 정말 훌륭한 작품들로만 모아놓은 단편집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못 읽어본 나머지 단편들도 빨리 읽어보고 싶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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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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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렇게 책을 빨리 읽어버릴 줄 몰랐는데 어쨌든 단숨에 읽어버린 책 –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그냥 쉼없이 달려올 수 밖에 없었다, 왜? 결말이 너무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강렬하고 신비스러운 에너지가 머리 속에 가득차는 걸 느꼈다.. 원작이 훌륭한 책들은 보통 영화로 만들어지긴 하지만 이 책이 과연 영화화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만큼 복잡한 플롯과 복선을 가진 영화이다.

책의 화자는 습기로 가득찬 숲 속에서 깨어나는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공포스런 어둠이 깔려있는 숲이다. 그는 누군가가 계속 따라온다는 느낌을 받는데 보이지 않는 시선이 그의 등으로 계속 내리 꽂힌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이 없고 그 숲 속에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지도 전혀 감 잡을 수 없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머리 속에 떠오른 이름은 바로 Anna.

한참 후에 그는 자신의 이름이 Aiden Bishop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왠 낯선 자의 몸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영혼이 갇혀 있는 걸까 ) 곧이어 마스크를 쓴 정체모를 인물이 다가와서는 풀려나고 싶으면 한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내야 한다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한다. 그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을 8번 되살아야하는데 매일 아침 다른 자의 몸에서 깨어난다는 것도 특징이다. 만일 그가 살인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실패하면 그는 첫째날로 되돌아가고 기억은 깨끗하게 지워지며 그는 이전에 수없이 했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그런데 Aiden 만이 이 복잡한 시간의 흐름에 갇힌 유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더욱 더 복잡해진다. 두 명의 다른 사람들이 이 무한대의 시간대에 또한 같이 얽혀있고 그들을 쫓는, 미지의, 칼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다. Aiden 과 Anna 그리고 익명의 경쟁자들은 게임판 위의 말들이고 모든 것들은 위태위태한 상태이다.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이라는 이 책은, 살인 사건이 없는, 아름답지만 혼란스러운 살인 미스터리이다. 밀실 스릴러이자 동시에 독자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타임 워프 이론이 중심을 차지한다. 잘 균형잡힌 이 책의 플롯은, 천천히 그러나 매우 신중하게 책 속에 숨겨진 미스터리와 비밀들을 드러낸다. 작가가 매우 정교하게 설정한 문장을 매우 신중하게 살펴봐야 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가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길을 헤매는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작가가 설치한 덫에 갇히게 된다. 그 속에서 뺑뺑이 도는 내 모습이란.... (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함 )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거나 넘어지거나 겨우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흩어져 있는 이 모든 단서들은 결국 어떤 결말로 이어질 것인가?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필력도 뛰어난 소설이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도 놀라왔던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미세한 변화, 그들의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한 파급력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끊임없이 뿌려지는 떡밥 ( 복선들 ) 과 퍼즐 조각들도 놀라웠다. 매우 정교한 스토리 라인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보고, 한 사람의 머리에서 이 책의 구성이 나왔다는 사실도 또한 놀라웠다.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은 주로 Aiden Bishop 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가 돌리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함께 걸려있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수레바퀴가 천천히 돌면서 다른 누군가의 삶과 운명도 바뀐다. 이야기는 영혼이 머무르는 각 몸, 즉 숙주의 기억에 머무르는데, 그 묘사가 마치 누군가가 풀장에 잠시 몸을 담구었다가 나온 것처럼 묘사된다. Aiden 의 영혼이 머무르는 각 숙주들은 각각 비밀을 품고 있고 거짓투성이의 삶을 살고 있는데 Aiden 의 자아정체성은 그가 잠시 머무르는 이 비열한 성격의 숙주들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성차별주의자, 이기주의자, 비열하고 남을 조종하며 학대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런 캐릭터들... 도저히 호감이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면에서 작가의 필력이 빛나는 듯하다.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치 소용돌이치듯 독자들을 미스터리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헤매던 Aiden 의 노력 덕분에 결국 이야기의 전말이 드러나고, 독자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결론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결말이라니..... 작가가 마지막에 터트린 반전에 놀라서 나는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긴 숨을 쉬었던 것 같다. 도대체 이 괴물같은 작가는 뭘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와 인셉션이 만났다 “ 표지의 홍보문구처럼 이 책은 읽는 독자에 따라서 호불호가 진짜 많이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가 싫은 사람들은 이 책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SF를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타임워프나 잠재의식에 대한 주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추천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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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트로트 특서 청소년문학 16
박재희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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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호래해르을 ."


" 어쩌다.... . 전설적인 명창 하동국의 아들이 뽕짝이라니.... 어쩌다 ."


각 민족마다 대표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바로 한과 흥. 여러 전쟁과 식민지라는 역사를 겪어서 그런지 슬픔과 분노가 뭉쳐서 한이 된 게 아닐까? 한오백년같은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몇 십년 묵은 한을 노래로 토해내는 것 같다. 그러나 또한 한민족은 매우 흥이 넘치는 민족이기도 하다. 군밤타령과 같은 민요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어깨춤을 들썩이게 된다. 또한 한국 민요와 판소리가 좋은 점은, 가수가 서는 무대와 관객이 머무르는 곳을 뚜렷하게 구분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많은 판소리에 함께 울고 흥이 나면 또 얼싸안고 함께 춤추는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이 책 [ 어쩌다, 트로트 ] 는 민족의 소리인 판소리와 트로트를 함꼐 자연스럽게 녹여낸 스토리이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판소리는 사실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못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의 음악 트렌드에도 잘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 이대로라면 판소리나 민요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판소리를 전공하였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트로트를 부르면서 판소리까지 홍보되기 시작했다. 이 책 [ 어쩌다, 트로트 ] 에 나오는 " 필통 ( 필이 통하는 친구 ) " 처럼 판소리와 트로트는 원래 친한 친구가 아니었을지.... 주인공 하지수의 어머니 박은희는 트로트를 제대로 부르기 위해서는 판소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노래대회에 출전을 앞두고 있는 지수를 위해서 " 소리공방 " 이라는 판소리 훈련소로 지수의 팔을 이끈다.


전설적인 명창 3대를 배출한 집안의 며느리였던 어머니 박은희. 전설적인 명창이었던 아버지 하동국이 객석에 사람하나 없는 판소리의 현실에 절망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들 지수를 데리고 악착같이 살아왔다. 튀김장사, 복지관 노래 강사 등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던 어머니를 따라 이 무대 저 무대를 다니다가 어린 나이게 마이크를 잡고 트로트를 불렀던 지수. 어린 아이의 구성진 트로트 실력에 놀란 사람들에게 등떠밀려 노래부르기 시작한 지수는 이제 어엿한 중2 청소년이 되었고, 현재는 이곳저곳에서 불리는 어엿한 트로트 가수가 되었다. 비록 무명이고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움츠러들기도 하지만 마냥 트로트가 좋은 지수.


“ 어린애가 동요나 부르지 무슨 뽕짝이냐 ”

“ 쪼그만게 뭘 안다고 트로트야 ”

“ 슬픈 노래 부르지마라, 애 늙은이같다 ”

“ 앞길이 뻔하다. 밤무대 가수나 되겠지 .”

“ 박수치고 돈을 주면서도 사람들은 흉을 보았다. 상관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큼은 행복했다 ”


하지만 역시 판소리 가문의 며느리였기 때문인걸까? 지수를 또랑광대 ( 판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 ) 로 만들기 싫었던 어머니 박은희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남편의 친구인 " 조은필 명창 " 이 소리를 가르치는 소리공방으로 지수를 데리고 간다. 조은필은 그곳에서 자신의 딸 조아라, 북의 고수인 빛나, 그리고 미소년 선재 등등 다음 판소리 세대를 이끌 주역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공방에서 감성 짙게 트로트를 뽑아내는 지수의 목소리에 흠뻑 반하고, 지수는 엄청난 성량을 가진 선재 무리들에게서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재는 엄마를 끔찍히 위하고 강하지만 순수한 눈빛을 가진, 곰돌이 같은 지수를 좋아하게 되어서 그들은 " 필통 " 사이가 된다.


아이들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아껴주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이다. 선재는 지수의 아버지였던 하동국이 세상을 뜬 후, 고수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북을 더 이상 만지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리고 하동국과 함께 흥부가를 불렀던 스승 조은필 명창이 왜 더 이상 흥부가를 부르지 않는가도 알고 있다. 나중에 내막을 잘 모르는 지수에게 설명해주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렇게 속이 깊을 수 있다니....


그 뿐 아니라 안빛나라는 대학생을 통해서 판소리가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보았다. 그녀는 심청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창극을 선보인다. 무대 의상도 파격적으로 - 정장바지를 빨강 핫팬츠로, 회색 폭탄 가발을 쓰고 전통적인 한복을 현대적인 스타일로 재해석함 - 바꾸었고 판소리에 건반, 베이스, 드럼, 색소폰 반주가 친근하게 따라붙는다. 판소리가 더 이상 구시대적인 음악이 아닐 수 있다는, 새로운 음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어서 너무 좋았다.


소리공방에서 하드트레이닝을 받은 지수는 과연 노래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요절한 천재 명창 아버지 하동국의 뒤를 이은 판소리 명창이 될것인가? 어머니를 향한 따뜻한 마음과 트로트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지수 그리고 청소년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정정당당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 [ 어쩌다, 트로트 ]. 그들이 두드리는 북소리와 그들의 노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 우리 딸 심청이가 황후마마 되었구나

심봉사 심학규가 딸 덕에 눈 떴구나

뺑덕어멈 잘 가거라 너 잡을 나 아니다

미인들이 몰려온다 귀인들이 줄을 선다

천년만년 부귀영화 얼씨구나 좋을 시고 "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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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우주선의 시간 - 제1회 카카오페이지×창비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수상작
이지아 지음 / 스윙테일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 25년 7일 14시간

훈이 나를 떠난 후 지나가 버린 시간들.

나는, 우리는 그 시간들을 회복할 수 있을까. ”

내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극적으로 변해버린 지구에서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인간들을 그린 디스토피아물도 좋고 새로운 터전을 향해 나아간 새로운 인류를 상상한 부분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게된 이 [ 버려진 우주선의 시간 ] 은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 즉 안드로이드가 인간성을 갖출 수 있느냐? 라는 부분을 화두로 제시한 면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점점 A.I. 기술은 발전되어가고 있고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이제는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휴머노이드의 탄생을 기대해볼만도 하지 않을까?

한때는 유능한 우주 경찰 다비드 훈을 싣고 다니면서 해적과 범죄자를 소탕하던 정찰선 티스테. 점점 낡아가는 정찰선 티스테를 포기하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장난 부분을 꼼꼼하게 수리를 해가며 돌봐준 훈에게 인간의 애정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던 티스테. 그러나 훈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지구에 돌아가게 된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갔지만 25년째 돌아오지 않은 훈. 토성의 한 구석에 버려진 채 모래에 파묻혀서 부스러져가던 정찰선 티스테를 구해준 건 바로 어레스 박사님. 안드로이드 분야를 연구하던 어레스 박사는 티스테를 구한뒤 그를 안드로이드로 탈바꿈시켜준다.... 안드로이드가 되면서 티스테가 맨 먼저 한 일은 엄청난 눈물을 쏟아낸 것이다.



한편, 지구에서는 훈의 손녀인 룻이 버거버거라는 직장에서 쥐꼬리만큼의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낮에는 알바를 뛰고 저녁에는 해킹으로 약간의 돈을 벌고 있긴 하나, 지구의 대기오염으로 인해서 폐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위해서 큰 돈을 벌어야 하는 룻은 어느 날, 정찰선을 제조하는 우주로직사에서 할아버지 훈이 몰던 정찰선인 ‘ 티에스티 원 ( TST 1 ) ’에 매우 큰 액수의 배상금을 걸어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액수의 배당금!! 그 돈이 있으면 어머니에게 맑은 공기도 줄 수 있고 에메랄드 존이라는 좋은 환경으로 이주할 수도 있다. 룻은 지체없이 티스테를 찾아 토성행 우주선에 몸을 싣는데........

책을 읽다보니 문득 얼마 전 친구와 들렀던 식당 생각이 났다. 식당 외부와 내부가 한옥의 느낌이 나서 참 예스럽고 고풍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둘러보고 있었는데 주문한 음식을 들고 온 건 바로 서빙 로봇이었다! 완전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랄까? 서빙을 해준 로봇의 화면에 뜬 완료 버튼을 눌렀더니 순간 화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애정이 생긴 나는 그 로봇이 기계라는 사실도 잊고 작은 소리로 고마워~ 라고 속삭였다. 수십년 전만해도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인공지능 로봇이라니.... 그런데 이 소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눈물을 흘리고 애정을 느끼며 인간이 먹는 음식을 나눠 먹는 안드로이드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 버려진 우주선의 시간 “ 은 기계에 몸에 인간의 마음이 깃들 수 있을까? 라는 고민과 그런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진정한 우정을 쌓아갈 수 있을까? 라는 저자의 자문에서 시작된 소설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단순 기계인 정찰선 티스테가 낡아서 점점 삐걱거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애정의 끈을 놓지않고 티스테를 돌아준 훈과 그런 훈에게 엄청난 애착을 가진 채 25년간 소식도 없는 그를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절망과 배신감을 느껴 이제는 훈 대신에 돌아온 손녀 룻에게 못다한 복수를 하려는 인간보다도 더 인간같은 안드로이드 티스테를 그리고 있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 비대면 수업, 교통정보 앱, 스마트 tv, 자율주행 차 등등등 ) 이제는 실생활에서 이용이 되는 만큼 인간만큼 높은 지능과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개발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기계와의 소통을 상상화한 이 작품이 아주 흥미롭다고 볼 수 있다.

약간 아쉬웠던 부분은 토성에서 지구로 돌아가던 중에 들른 여러 행성들과 장소들 ( 타이탄 운터데르테 시장, 달의 이면 F 구역 등등 ) 에 대한 배경 설명이 조금 부족했다는 것이다. ( 시장에 대한 장소적인 혹은 역사적인 묘사 등등이 약간 부족하다고 느낌 ) 그리고 우주에서 고아가 된 채 떠돌다가 해적이 되거나 범죄자가 되어버린 외계인에 대한 묘사도 조금 더 개성있게 넣었다면 조금 더 SF 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지 않았을까 해서 아쉽긴 하다. [ 버려진 우주선의 시간 ] 에서 구축한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도 묘사가 되어 있었다면 보는 재미가 아마 더 쏠쏠하지 않았을까 싶다.

룻은 자신의 목적대로 티스테를 우주로직사에 넘겨주고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을까? 티스테는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파트너이자 자신의 대장이었던 다비드 훈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처음엔 각자의 이익과 각자의 동기로 시작된 여행이었으니 결국은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에도 진정한 우정이 오고갈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 [ 버려진 우주선의 시간 ]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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