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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평점 :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혹은 도무지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절로 떠오르는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면,
아오세에게는 숫제 고향이 없었다.
남은 건 빛의 기억뿐이다. 부드러운 빛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오를 때가 있다.
떠돌던 건설 현장의 숙소에는 희한하게도 북쪽 벽에 큰 창이 나 있었다.
새어 들어오는 것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아닌, 왠지 조심스레 실내를 감싸 안는 부드러운 북쪽의 빛.
동쪽 빛의 총명함이나 남쪽 빛의 발랄함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듯 고요한 노스라이트(north light).
공간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사람들은 집을 고를 때 빛이 많이 들어오는지 혹은 디자인이 아름다운지, 사는 사람의 동선에 맞춰 설계가 잘 되었는지 꼼꼼히 살펴서 집을 고르곤 한다 . 그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집 혹은 공간이다. 이 책 [ 빛의 현관 ] 에 등장하는 아오세도 건축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영혼을 담아서 집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한때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현재 그것이 모두 무너져버렸다는 것.
버블 경제였던 일본 경제가 무너지고 불황 때문에 사람들이 실직을 하여 뿔뿔이 흩어지면서 아오세도 힘든 나날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지금의 사무소 소장. 비록 중소 규모의 사무소이지만 꽤 탄탄한 커리어를 걷고 있는 사무실이다. 그리고 경제의 불황과 함께 가정도 무너져버렸다. 자진 퇴직 이후 자존심의 하락을 겪던 아오세와 아내 유카리와 살얼음을 걷는 듯 매일매일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급기야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오세의 삶에 건축이라는 것은 하나의 빛이고 등불이다. 그는 특히 노스라이트에 입각한 집을 많이 지었다. 새어들어오는 것도 아닌 쏟아져들어오는 것도 아닌 실내를 살며시 감싸안는듯한 노스라이트. 그는 이전에 요시노라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서 시나노오이와케라는 곳에 북향쪽으로 창이 나있는 목조식 주택을 지었었다. 건축 잡지에 실리며 순식간에 인기를 끈 주택이었지만, 주택 완성 이후 감탄을 하던 건축주 요시노가 한번도 연락이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는 아오세.
그러던 어느날 사장으로부터 충격적인 전갈을 듣게 되는 아오세, 현재 시나노오이와케의 Y 주택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 주택이 완성되었을 때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던 요시노 부부의 얼굴과 아이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면서 아오세의 머리에 물음표가 반짝이게 된다. 건축가 아오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그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지어주길 바란다고 했던 건축주 요시노. 아오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도면을 그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직접 두눈 으로 확인을 하기 위해 시나노오이와케로 달려간 아오세.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텅 빈 채 사람의 온기가 없었던 집. 별 가구가 없이 덩그러니 집만 존재하던 그곳에서 아오세는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될 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브루노 타우트라는 독일 건축가가 만든 의자였다. 그는 나치스 정권의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에 공예품 보급과 디자인 향상에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요시노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이 의자의 발견이 도움이 될까?
유명한 작품인 [ 64 ]를 쓴 요코하마 히데오 작가, 그는 이번에는 건축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완성하였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노년에 나치스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건축을 한층 발달시킨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가정과 직장을 잃은 아오세, 돌아갈 고향이 없는 아오세는 타우트의 삶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를 가진다. 망명을 거듭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훌륭히 쌓아올린 타우트, 아오세는 그를 떠올리며 다시 건축가로써의 마음 자세를 다잡는다.
결국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건축 그 자체가 중요하기 보다는 집을 짓는 건축가의 마음 자세, 그리고 그 집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의 중간 중간, 자신 때문에 세상을 등지게된 아버지에 대한 아오세의 회상과 이제는 거의 남남처럼 되어버린 아내 유카리와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문득문득 떠올리는 아오세를 지켜보며 마음이 참 아팠다. 그가 집과 노스라이트에 집착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향을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 어디론가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마음. 고독과 무명을 겪은 예술가의 끊임없는 예술을 향한 의지, 고향을 떠나 망명한 나라에서 자신의 건축혼을 불태운 노년의 외국인 건축가 등등을 보며 아오세와 독자들은 함께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생이 상실과 고독을 건네주더라도 결국 수용하고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