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얀 케르쇼트 지음, 김기협 옮김 / 꿈꾸는아침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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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빛은 동방에서? ; 서구의 네오(Neo) 아드바이타(Advaita) 물결

 로마 속담에 ‘빛은 동방에서(Lux ex oriente)'라는 말이 있다. 서양문명의 발전이 초기에 동양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쓰였던 이 말은, 근세에 와서는 현대 서양문명이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그 유일한 해결책이 동양의 정신문화에 있다는, 동양 입장에서의 자화자찬적 의미로 흔히 쓰여 왔다. 실제로 60년대 이후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서구의 젊은 청년들, 흔히 히피(Hippie)라고 불리는 이들이 인도로 대표되는 동양 정신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되자 서구의 눈부신 근대물질문명에 열등감을 느껴오던 동양은 그것 보란 듯이 이 케케묵은 옛 속담을 다시 꺼내어 들고 만족스런 웃음을 짓곤 했던 것이다. 20세기 초 서구문명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동도서기(東道西器)니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외쳤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도 또한 그러한 입장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나를 포함한 많은 동양인들 역시 그러한 생각을 여전히 당연시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평소 선(禪)1) 불교라든지 아드바이타(Advaita)2) 베단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얼마 전 우연히 정신과학 관련 잡지를 보다가 토니 파슨스(Tony Parsons)라는 영국인에 관한 짤막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진리를 찾는 구도 행위와 깨달음을 주제로 한 대여섯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에서 그는 ‘깨달음은 어떠한 구도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깨달은 사람이란 모순된 언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분리된 개인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성일 뿐이라면 누가 있어서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라는 선과 아드바이타의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글 맨 뒤에 소개된 저자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았다. 1933년 영국 태생으로 스무 살 무렵 공원을 산책하다가 이와 같은 관점을 얻게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보통 서구의 명상 지도자(Meditation Teacher)나 정신적 스승(Guru, Master)들의 약력을 보면, 젊은 날 정신적인 방황 끝에 인도로 날아가서 오쇼 라즈니쉬나, 라마나 마하리쉬,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같은 인도의 위대한 스승들 밑에서 공부하여 진리를 깨닫고 돌아와 가르침을 펼치게 되었다는 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토니 파슨스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새로운 전통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구글(Google)을 검색해 보니 이미 40여년 동안 자신의 관점을 대중들에게 가르쳐 왔고 그 가운데 몇몇은 자신처럼 대중적 모임이나 출판을 통해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물론 그 자신은 그러한 가르침도 없고, 그러한 가르침을 들을 사람도, 무엇보다도 그런 가르침을 말하는 자신도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있음(Being), 의식(Concsiosness), 생생한 삶(Aliveness, Life)- 그 이름을 뭐라고 하던 간에 -만이 존재할 뿐이고, 드러난 모든 현상이 모든 ‘그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책들이 번역되지 않았나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그와의 대화를 통해 일평생 찾아 헤맸던 구도의 의문을 해소하고 그처럼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우리식 전통에 의하면 제자에 해당하는) 얀 케르쇼트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원제는 ‘This is it')를 찾게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1, 2부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구도와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관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에세이 식으로 서술하고 있고,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3부는 토니 파슨스를 포함하여, 서구의 여러 영적 스승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과 영적 체험과 깨달음에 대한 오해와 구도자들이 영적 여정에서 빈번히 겪게 되는 혼란,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모순되는 이러한 전일(全一)적인 관점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어느 개인이 존재해서 그 개인의 노력과 정진을 통해 마침내 깨달음이란 영적 체험과 해탈이 주어진다는 상식적인 믿음(저자는 이러한 믿음을 ‘영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을 두들겨 깨부순다. 겉으로 보기에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와 ‘너’, ‘세상’은 모두 둘로 나눌 수 없는 전일성의 표현일 뿐이므로,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면 ‘나’와 ‘너’, ‘나’와 ‘세상’의 차별도 없고,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별도 없고, 그리하여 모든 차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어디로 가거나 무엇을 구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흡사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나 나눌 법한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서구인들의 대화를 보면서 나는 기존에 내가 가졌던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적 구별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으로 나날이 합리적 과학적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우리를 포함한 동양의 현실을 비춰보면 더욱 그러하다. 또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있어서 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미국은 물론 특히나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는 이미 기존의 인도 성자들에 의해 서구인들에게 전해진 관점을 전통적 아드바이타(Traditional Advaita)라고 하는 반면, 그들의 서구인 제자들과 서구에서 자생한 스승들이 동양의 문화적 함의들을 서구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맞게 재창조하여 전하는 이러한 새로운 관점을 네오 아드바이타(Neo Advaita)라 부르며 하나의 큰 문화적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어떠한 기존 종교교리의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어떠한 제의적 의식이나 수행을 요구하지도 않고, 합리적이고 동시에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곧바로 지적하는 이러한 새로운 아드바이타 운동을 보면서, 어쩌면 가까운 장래에 물질적 풍요는 얻었지만 어느새 과거의 영적 전통을 잃어버린 수많은 동양인들이, 과거 수많은 서구인들이 영혼의 자유를 찾아 인도로 몰려갔듯이, 서구의 눈 밝은 스승들을 찾아 러쉬를 이루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지나친 망상일까?            


1) 흔히 선의 특징을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 : ‘문자를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 또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서 본성을 보아 부처가 되게 한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흔히 비논리적인 대화를 ‘선문답’이라 하듯 합리적 사유를 거부하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가장 대표적인 동양 종교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2) 영어로는 'Non-dualism', 우리말로는 ‘비이원성’, ‘불이(不二)’라고 번역되는데 인도의 베단타 철학 가운데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적 입장을 가리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아’뿐이라는 근대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입장이나 ‘의식’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일체유심조’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는 불교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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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 음악 그림 동화 시리즈 1
에릭 바튀 그림,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작곡, 김하연 옮김 / 베틀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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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음악시간은 고역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탓에 음악적 환경이 열악한 탓도 있지만, 언니오빠들도 음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고 노래 부르는 시간이 되면 가슴이 떨렸다. 음악적 지식도 얕은 탓에 음악수업이 더더욱 반갑지 않았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사립여고였다. 합창단 활동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합창단이 받아온 트로피를 시상할 때 박수치는 것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그들이 입고 다니는 단체복장이 눈길을 끌곤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음악시간에 모차르트 풍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던 나이든 음악선생님께서  음악 감상 시험을 보겠다고 하셨다. 모두들 예고도 없이 본다며 소음을 일으켰지만, 음악감상 시험이란 게 달리 예습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합주곡을 한 시간 내내 틀어주시고는 감상문을 써보라고 하셨다. 그때 나 역시 처음 써보는 음악감상문이라 어떻게 맥을 짚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듣고 있다가, 그냥 떠오르는 대로 쓰기로 했다. 큰북이 울릴 때는 큰 곰이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랐고, 바이올린이 울릴 때는 새들이 숲속에서 지저귀는 소리로 들렸다. 그렇게 떠오르는 대로 아무런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이야기를 써나갔다.

 ‘큰곰이 화가 나서 달려든다. 새들이 이 소리에 놀라 날아오른다. 개울물이 흘러가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껏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음악과목에서 그때까지 받아본 점수 중에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음악은 감정의 자연스런 표상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을 보면 주눅이 들고, 바이올린 앞에서 손가락이 굳어지고, 흘러나오는 곡속에서 악기를 골라 써야하는 시험의 기억들이 음악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한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감상의 자유로움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글자를 통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게 문학이고, 색채와 모양을 통해 감상을 표현하는 게 미술이라면, 음악은 소리를 듣고 자유롭게 감상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잘한 것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려 음악 전부를 등지고 살았던 유년기의 기억이 안타깝다.

‘피터와 늑대(프로코피에프 지음, 베틀북 펴냄)’는 음악에 대한 자연스런 감상을 이끄는 동화책이다. 상대적으로 책에 익숙한 많은 어린이들에게 음악에 대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작은 새는 플루트, 오리는 오보에, 고양이는 클라리넷, 피터는 현악기, 늑대는 호른 등으로 악곡을 만들어 등장인물들이 행동할 때마다 해당 악기의 소리가 아름답게 흘러나온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각 악기소리들이 교차하고 끝에 가서 등장인물들이 함께 선보이면서 각 악기들이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한다. 동화를 읽고, 이야기 전개에 알맞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문학과 음악이 축배를 올린다. 문학과 음악 각각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다소 함량이 떨어지는 작품이지만, 문학과 음악의 자연스런 만남만으로도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가치를 준다. 

 CD를 통해 이야기와 음악을 함께 들어보고, 각 장면에 맞는 극본을 짜보며, 음악을 들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독후활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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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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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아직 읽지 못하고 영화로 먼저 봤습니다. 간단한 감상입니다.


1.

영화 ꡔ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ꡕ은 이야기의 소통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소설 몇 권을 나올 것이라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푸념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물과 같다. 이야기는 막힘없이 흘러야만 한다. 이야기는 소통(疏通)을 위한 것이다. 이야기가 억눌리고 서로 소통되지 못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한(恨)이다. 한은 억눌린 이야기, 소통되지 못한 이야기이다. 우리네 옛 어머니들이 할 말이 있어도 차마 말로는 못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탕 탕 치는 이야기가 바로 한이다. 


ꡔ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ꡕ은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문유정(이나영 분)이란 여자, 강윤수(강동원 분)란 남자의, 서로 전혀 다른 배경과 줄거리, 화법과 뉘앙스를 지난 이야기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넘나들면서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이다.



2.

대내외적인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상담이란 행위에 의존하곤 한다. 상담이란 문자 그대로 상담(相談)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나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야기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소통(疏通)이다. 나의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서로 소통될 때, 내가 당신을 구원하거나 당신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15살에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한 유정은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만 이기적이고 허영심 많고 남들의 이목과 체면을 중시하는 어머니에게 묵살 당한다. 자신을 강간한 사촌오빠보다 어머니를 더 증오하게 된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고, 그 후로 두 차례 더 자살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살아남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앞 못 보는 어린 동생과 자신(윤수)을 고아원에 버린 엄마를 어렵게 찾아간 어느 겨울날, 엄마는 자기도 살자며 윤수 형제를 문전 박대한다. 그 길로 형제는 앵벌이와 노숙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전직 가수였던 유정이 야구경기에서 불렀던 애국가를 제일 좋아했던 윤수의 동생은 어느 날 아침 싸늘하게 얼어 죽는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말했다. ‘여성적인 것’의 다양한 함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바로 모성이 아닐까? 우리는 남과 여,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상처받고 힘겨울 때마다 어머니, 아니 ‘엄마’를 떠올린다.


그 2음절의 나약한 양순음(兩脣音)이 그보다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강건한 아버지보다 더 의지가 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라는 사회적 존재가 상명하달(上命下達)의 수직적인 인간관계의 표상이라면, ‘엄마’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수평적 인간관계, 더 나아가 나의 일방적인 하소연마저 포용할 수 있는 원초적인 자궁(子宮)과 모태(母胎)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엄마’란 존재로부터의 외면과 거부는 당사자에게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큰 상실감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까? 


유정과 윤수는 모두 자신들의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래서 유정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가시 돋친 말과 행동으로 불화하며 충동적으로 손목을 긋거나 약을 먹었고, 윤수는 끊임없이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는 세상과 운명의 힘에 불가항력적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어서 빨리 사형 당하기만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3.

어머니로부터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외상(外傷)을 입은 유정과 윤수를 연결시켜 그들에게 소통의 기회를 준 사람은 또 다른 ‘어머니’인 유정의 ‘고모(姑母)’ 모니카 수녀(윤여정 분)이다.


자식들의 문제 앞에 섣불리 나서거나 안타깝고 애달아 발을 동동거리는 어머니가 아니라, 가시나무처럼 타인과의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두 사람이 공통의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치료하고 구원할 기회를 주는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현명한 어머니. 영원한 기다림으로서의 어머니 말이다.


그 어머니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만나고, 어색하고 삐걱거리는 겉도는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자신들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4.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고해성사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으며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는다. 용서가 곧 구원이다. 그리고 용서를 통해 용서한 자도, 용서받는 자도 모두 구원받는다. 거기에 한낱 우리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길 없는 절대자의 섭리가 있다. 


아무 죄 없는 파출부였던 자신의 딸을 윤수 때문에 잃은 박 할머니(김지영 분)는 교도소 교정위원으로 봉사하는 유정의 고모 모니카 수녀를 통해 살인자 윤수를 만난다. 박 할머니와 마주하게 된 윤수는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고, 증오와 복수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박 할머니는 자신이 저지른 죄 앞에 떨고 있는 윤수를 용서한다. 그럼으로써 자신 또한 원망과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느 날 유정은 비밀을 죽음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사형수 윤수에게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갑작스런 유정의 고해에 윤수는 “미안합니다.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내 살고 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날 밤 유정은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고 윤수는 잠이 들지 못한다.


서로 깊숙이 숨겨 놓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갈 즈음 윤수의 사형 집행이 예정된다. 윤수가 어떻게든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유정은, 기적이라도 바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모진 말 때문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를 찾아간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머니를 용서한 유정은 어머니에게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말한다. 유정은 어머니를 용서함으로써 진실로 스스로에게 용서받는다.   


마침내 사형대 앞에 선 윤수는 “모든 것이 나를 외면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괴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하는 여인이자 누이인 유정을 통해 윤수는 자신을 외면한 세상 모든 것들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렇게 윤수는 세상 모든 것들에 용서를 구함으로써 세상 모든 것들을 용서한다.     



5.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고정불변한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넘치는 살아있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 사이에 분명 존재하는 것 같은 괴리조차도 간단한 접속부사 하나로 얼마든지 이어지고 소통된다.


이야기는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다다른다. 모든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들이 흐르고 흘러 도달하는 곳. 거기에 거대한 삶의 이야기, 누구나 공감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목요일 10시 ~ 13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귀 기울여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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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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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책으로 세상을 건너는 어느 인문주의자의 연서(戀書)

조희봉 지음, ꡔ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ꡕ, 함께 읽는 책, 2003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G. 루카치, ꡔ소설의 이론ꡕ


1.

며칠 전부터 신문 사회면에 심심치 않게 ‘인문학의 위기’란 제하의 기사들이 보이더니, 오늘 신문에는 드디어 80여개 인문대 학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인문학계가 맞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한다는군요. 이러한 위기론이 어제 오늘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강고해지는 시장의 지배력에, 한 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확실히 그 물적 토대부터 와해되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참 지랄 같은 세상이죠? 문득 학창시절 읽었던 故 김현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효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또는 그를 비롯한 인문학은, 대학입시에도, 취업에도, 기업의 이윤 활동에도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들이 ‘쓸모’의 교환가치로만 환산되는 세상이 과연 우리 모두가 바라는 그런 모습의 세상일까요?


2.

지난 일요일 모처럼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한 권 있었거든요. 몇 해 전 드물게 책과 관련한 진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어느 TV 프로에서 본 책인데, 조희봉이라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느 평범한 ‘책벌레’(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벌레 취급하다니!)가 쓴 일종의 책에 대한 신앙고백, 또는 책에 대한 영원한 연애의 편지와 같은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맨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어요. 책 앞날개에 적힌 저자의 ‘책이 없는 표면경력’에는 ‘한양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부정보기술(주)에서 6년간 근무’라고 적혀 있더군요. 성급한 마음에 이리 저리 책의 내용을 훑다가 맨 뒤의 후기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대개 그 책을 끝까지 읽느냐 마느냐는 머리글이나 후기를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서기 때문이죠. 잠시 읽다가 다음 대목과 마주 친 순간 이 책을 대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내가 배운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 포카나 당구 실력, 주량 같은 것은 도움이 되지만 내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인문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세상에 던져졌다. 인문학 따위가 없어도, 세상을 굳이 설명할 길 없어도 일상은 잘만 돌아갔다.

생은 지리멸렬해졌다.

                                                       - 에필로그 「활엽수림에서」


3.

집에 돌아와 소파에 기대어 대출 해 온 책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5분도 되지 않아 저는 이 책의 저자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곁에만 있다면 “야 이 새꺄, 그동안 어디 있었니!” 하고 어깻죽지라도 후려갈기며 소주잔을 들이밀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필경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우리의 혈관 속에는 부모가 이어준 혈연의 계보와는 다른 계보로 인해 같은 종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열독가가 실용주의자라면 수집가는 낭만주의자이다. 남들에게 자신이 가진 책의 양을 자랑하려는 천박한 수집가를 논외로 한다면, 수집가는 책의 다양한 효용가치를 좋아하고 책 그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책에서 얻는 지식이나 문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삶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그들에게 읽어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친구인 셈이다. 늘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연인처럼 말이다. 집착이니 소유욕이니 하는 이성적 비판은 언제나 정작 사랑에 빠진 사람의 귀에는 어불성설이요,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 프롤로그 「어느 헌책수집가의 변명」   


거의 본능이라 할 만큼 직감적으로 동족의 체취를 알아본 겁니다. 헌책방의 쾌쾌한 먼지 냄새와 눅눅한 책 곰팡이 냄새, 짜릿하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걱거리는 종이의 촉감과 요즘의 옵셋 인쇄와는 비할 수 없는 활판 인쇄의 자연스럽고 소박한, 그리고 인간적인 질감을, 저처럼 그도 필시 사랑할 것입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가장 ‘쓸모’ 있는 학문 가운데 하나인 경제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세상을 함께 한 것은 이윤기, 안정효, 서정주, 김우창. 고종석 등의 이른바 ‘쓸모’ 없는 인문학이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와 저자는 거의 동갑이라 할 수 있겠더군요.(제가 한 살 위지만!)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동시대를 살아왔던 비슷한 연배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코드랄까, 우리보다 한 5~6년쯤 선배거나 또 그만큼 후배들은 이해 못할 그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레닌의 조국 소련이 작살나고 변혁이니 혁명이니 사회주의니 다 물 건너가 버린 어느 해 겨울 나는 나에게 처음 그런 말들을 알려 준 친구를 만취해 찾아가서 녀석의 멱살을 쥐고는 녀석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넌 정말 그 모든 걸 진정으로 믿고 있었니, 정말 진심으로 믿었어?”

지금 그 친구는 뒤늦게 감정평가사 준비를 하고 있고 나는 대기업 사원이 되었다. 삶이란 게 그렇게 갈수록 너덜너덜해진다. 너덜너덜한 삶에는 너덜너덜한 삶이 위로가 되는 걸까.

난 미당의 시를 읽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운다.

                                          - 「미당(未堂), 아직 짓지 못한 집 ; 서정주」


그 많던 좌파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들은 정말 좌파이긴 했던 것일까. 동호회 이름 붙이듯이 “넌 NL이니, 난 PD인데.”라고 떠들어 대며 책 몇 권 읽고 길거리에서 돌 몇 번 던지고 좌파라고 행세하던 그 철없는 좌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철없는 좌파의 일원이었던 나는 내 일상에서 그 이념의 흔적을 얼마만큼 지켜 내고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최말단에서 나 자신의 양심도 지키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가 내 삶은 이렇게 비루해졌어도 적어도 내 가치관만은 아직도 좌파라고 떳떳이 얘기할 수 있을까.

                                                     - 「C급 좌파, A급 우파 ; 고종석」


4.

80년대 싫든 좋든 사회과학의 세례를 받아야 했던 세대가 90년대 중반 이후 느꼈을 가치의 전도와 세기말적 혼란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스스로 좌파라고 자부할 수 없었음에도 심정적 동조를 하던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폐기 처분되는 상황, 전위에 섰던 몇몇은 정치권으로, 또 다른 몇몇은 사법고시로, 다시 몇몇은 절필을 하거나 신비주의자가 되어 제 각각 갈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지리멸렬한 ‘C급’도 안 되는 저 같은 몇몇은 군대를 갔다 와서는, 다른 혹성에서 온 것 같은 90년대 중반 학번 후배들과 불편한 동행을 하다 사회로 ‘방출’되었습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한동안은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구역질할 때 우리를 위로 했던 것은 영화와 음악이었습니다. 이른바 사회과학의 시대에서 대중문화의 시대가 열렸던 거지요. 저자 또한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마치 예전에 써 두었던 저 자신의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독한 현학과 자기 과시, 다른 이들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똥고집, 자신이 지지하는 일군의 작가주의에 대한 무한 숭배, 현란한 수사법과 화려한 언변 등이 정성일을 표현하는 몇 가지 특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늘 논쟁적이면서 찬반이 명확하게 갈리는 이 평론가가 나에게는 누가 뭐래도 영화를 보는 눈을 처음 띄어준 길눈이었다.

그를 좋아하게 된 데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군대시절 상황실 교환근무를 서다가 우연히 누군가가 틀어 놓은 라디오를 듣게 되었는데, 그 프로는 당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MBC FM의 <영화음악실>이었고 그날의 초대손님이 바로 매주 영화를 소개하러 나오던 정성일이었다. 그전에도 그의 글을 좋아하긴 했지만 처음 듣는 그의 말솜씨는 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자 한자 끊어서 또박또박 얘기하는 느릿한 말투, 어눌한 듯 하면서도 화려한 수사와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 「자기 저작이 없는 3인의 대중문화 평론가」


이 대목에서 저 또한 자연스레 그 시절 라디오을 통해 들었던 정성일의 무시무시(?)한 말투, 도무지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 독특한 말투를 머리 속에 오버랩 시키며 잠시 미소 지었습니다. 참, 지금도 <키노KINO>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창간호부터 몇 년 동안 다달이 모아가며, 그가 추천한 구하기도 힘든 영화들의 비디오 테잎을 구하기 위해 발품도 많이 팔았었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의 평론가에 대한 기억을 저와 저자는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LP 레코드 속지 수준의 대중음악 평론을 본격적인 의미의 학술적 담론 수준으로 끌어올린 강헌이란 평론가를, 혹시 아시는지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태지를 90년대 담론의 중심에 세운 데는 그의 공이 크고, 주류음악과 인디밴드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 내고 평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영화나 음악에 대한 글들이 일반 인문서적과 다른 것은 책을 읽으면서 시청각적으로 동시에 문화적 자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련되고 멋진 영화나 음악이라는 매체가 고답적인 이론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계간지 <리뷰RIVIEW>(문예마당, 1994)이다. <리뷰> 창간호의 서태지 인터뷰는 우리나라 대중음악가를 진지한 논의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거의 최초의 예가 될 것이다. 가히 전복적인 발상이었고 책상물림들에게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그는 서태지의 3집 앨범이 하나의 앨범이라기보다 사회과학의 시대를 넘어서 문화의 시대로 가는 뚜렷한 징후임을 짚어 냈던 것이다.

                                             - 「자기 저작이 없는 3인의 대중문화 평론가」 

         

강헌이 등장했을 때는 사회과학으로 대표되던 인문학의 시대가 저물고 영화와 대중음악을 필두로 포스트 모던한 ‘문화과학’이라는 용어가 풍미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후로 10년이 지난 오늘 ‘한류(韓流)’니 ‘천만 관객’ 운운이 과연 그 시절과 얼마만큼의 상관관계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됐건 이제는 가끔 TV 화면에 잠시 나오는 그를 보는 것 이외에 그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는 겁니다.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5,

이 책의 제목에서는 물론 책의 맨 첫머리에서도 저자가 표 나게 내세우는 말이 ‘전작주의(全作主義)’입니다. 영화음악가 한스 짐머가 음악을 담당한 모든 영화를 보고 그 사운드트랙을 모은다는 어느 후배와, 작가의 ‘내면적 세계’ 전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가 쓴 모든 글과 책들을 읽고 또 읽는다는 김화영 교수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전작주의’라는 개념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전작주의란, 한 작가의 모든 작품(全作)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공시적 분석을 통해 그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찾아내고 그러한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정한 시선’을 의미한다.

- 「전작주의자의 꿈」 


저자는 이러한 전작주의를 하나의 방법론 삼아, 이윤기와 안정효라는 구체적인 작가들의 전작을 모으고 읽어가며, 저자와 저를 포함한 저자와 비슷한 연배의 세대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잃어버린 길을 찾아 ‘현재의 세상을 견디고 미래로 건너가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작가들 가운데 전작주의의 대상으로 이윤기와 안정효를 삼은 까닭을 저자는, ‘치열하게 당대적 현실만을 들어다보고자 했던 80~90년대와는 달리 이제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나 현실보다는 그 현실이 이루어지게 만든 근저의 토대들, 좁게는 미국사회부터 넓게는 서구문화까지 깊은 근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와, ‘그 둘이 이미 번역이라는 틀을 통해 오래도록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자본주의나 서구문화에 대해 천착해 오고 있었’고 ‘창작에서도 많은 작가들처럼 후일담 소설이나 사적인 연애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자는 책의 대부분을 헌책수집가로서 저자의 (헌)책에 대한 애정과 그와 관련된 자신만의 작은 역사, 그리고 헌책수집과 관련된 실용적 지식으로 채워놓고 있습니다. 이윤기에 대한 탐색은 저자와 이윤기와의 사적인 인연담(「‘전작주의자의 꿈’ 실현되다」)과 전작주의의 대상으로서는 턱없이 짤막한 작가론(「나의 이윤기론」), 그리고 그의 작품 ꡔ하늘의 문ꡕ에 대한 독후감(「이윤기, ꡔ하늘의 문ꡕ) 등 3편에 불과하고, 안정효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단 한 편의 작가론(「한 고독한 작가의 초상-안정효」)에 그치고 있습니다. 전체 분량으로 따져 봤을 때 5분의 1 정도나 될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깎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동종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저로서는 저자의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흡사 저자가 뜻이 통하는 친구인 듯, 함께 이 헌책방에서 저 헌책방으로, 어느 구석엔가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보물 같은 책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기분으로 나머지 5분의 4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마니아들은 자기가 미쳐 있는 것들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당구에 미쳐 있는 사람에게는 당구대에 인생이 담겨 있고, 음악 마니아에게는 음악이 세상으로 가는 열쇠이다. 바둑 마니아는 바둑판 사십구로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낚시광은 낚시를 통해서만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에 미친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세상을 만난다. 책에 미쳐 있다는 것은 책 속에 담긴 멋진 인생과 다양한 세상에 미쳐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멋진 일을 거부하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TV를 보면서 인터뷰하는 사람 뒤로 보이는 책장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저 사람은 어떤 세상에 미쳐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 「책에 미친 놈들」


6.

시간 나면 헌책방에 들려야겠습니다. 저자가 오래도록 찾아다니다 어느 헌책방에서 발견한 민음사 세계시인선 55번 ꡔ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선ꡕ을 행여 저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친구가 나보다도 훌륭하게 보이는 날

꽃 사서 들어가서 아내와 논다  


꼭 그 책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찾으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설령 찾지 못한다 해도 그 뿐입니다. 삶이라는 게, 어제는 해가 비치다가 오늘은 비가 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겁니다. 머잖아 곧 마흔이 되는군요. 가을입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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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수련과 선
김경수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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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카톨릭 내부에서는 도그마에 있어서 일대 변화가 있었다 할 수 있다. 그 흐름 속에 카톨릭의 전통적인 영신수련, 관상기도와 참선과의 대화도 있었다. 이 책은 젊은 시절 영적 체험을 카톨릭에 귀의함으로써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종교적 배경인 불교의 참선수행으로 더욱 그 체험의 의미가 분명해진 저자의 고백이 실려 있다.

비록 논문형식의 딱딱한 학제적 글쓰기이지만 간간히 드러나는 저자 자신의 수행과정과 체험담은 카톨릭과 불교라는 종교적 차이를 뛰어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들에게 훌륭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나 너무나 선적인 문맥에서 화두와 선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색다른 형식과 관점으로 설명되는 저자의 선에 대한 안목을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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