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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책으로 세상을 건너는 어느 인문주의자의 연서(戀書)
조희봉 지음, ꡔ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ꡕ, 함께 읽는 책, 2003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G. 루카치, ꡔ소설의 이론ꡕ
1.
며칠 전부터 신문 사회면에 심심치 않게 ‘인문학의 위기’란 제하의 기사들이 보이더니, 오늘 신문에는 드디어 80여개 인문대 학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인문학계가 맞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한다는군요. 이러한 위기론이 어제 오늘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강고해지는 시장의 지배력에, 한 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확실히 그 물적 토대부터 와해되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참 지랄 같은 세상이죠? 문득 학창시절 읽었던 故 김현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효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또는 그를 비롯한 인문학은, 대학입시에도, 취업에도, 기업의 이윤 활동에도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들이 ‘쓸모’의 교환가치로만 환산되는 세상이 과연 우리 모두가 바라는 그런 모습의 세상일까요?
2.
지난 일요일 모처럼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한 권 있었거든요. 몇 해 전 드물게 책과 관련한 진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어느 TV 프로에서 본 책인데, 조희봉이라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느 평범한 ‘책벌레’(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벌레 취급하다니!)가 쓴 일종의 책에 대한 신앙고백, 또는 책에 대한 영원한 연애의 편지와 같은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맨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어요. 책 앞날개에 적힌 저자의 ‘책이 없는 표면경력’에는 ‘한양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부정보기술(주)에서 6년간 근무’라고 적혀 있더군요. 성급한 마음에 이리 저리 책의 내용을 훑다가 맨 뒤의 후기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대개 그 책을 끝까지 읽느냐 마느냐는 머리글이나 후기를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서기 때문이죠. 잠시 읽다가 다음 대목과 마주 친 순간 이 책을 대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내가 배운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 포카나 당구 실력, 주량 같은 것은 도움이 되지만 내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인문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세상에 던져졌다. 인문학 따위가 없어도, 세상을 굳이 설명할 길 없어도 일상은 잘만 돌아갔다.
생은 지리멸렬해졌다.
- 에필로그 「활엽수림에서」
3.
집에 돌아와 소파에 기대어 대출 해 온 책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5분도 되지 않아 저는 이 책의 저자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곁에만 있다면 “야 이 새꺄, 그동안 어디 있었니!” 하고 어깻죽지라도 후려갈기며 소주잔을 들이밀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필경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우리의 혈관 속에는 부모가 이어준 혈연의 계보와는 다른 계보로 인해 같은 종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열독가가 실용주의자라면 수집가는 낭만주의자이다. 남들에게 자신이 가진 책의 양을 자랑하려는 천박한 수집가를 논외로 한다면, 수집가는 책의 다양한 효용가치를 좋아하고 책 그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책에서 얻는 지식이나 문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삶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그들에게 읽어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친구인 셈이다. 늘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연인처럼 말이다. 집착이니 소유욕이니 하는 이성적 비판은 언제나 정작 사랑에 빠진 사람의 귀에는 어불성설이요,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 프롤로그 「어느 헌책수집가의 변명」
거의 본능이라 할 만큼 직감적으로 동족의 체취를 알아본 겁니다. 헌책방의 쾌쾌한 먼지 냄새와 눅눅한 책 곰팡이 냄새, 짜릿하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걱거리는 종이의 촉감과 요즘의 옵셋 인쇄와는 비할 수 없는 활판 인쇄의 자연스럽고 소박한, 그리고 인간적인 질감을, 저처럼 그도 필시 사랑할 것입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가장 ‘쓸모’ 있는 학문 가운데 하나인 경제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세상을 함께 한 것은 이윤기, 안정효, 서정주, 김우창. 고종석 등의 이른바 ‘쓸모’ 없는 인문학이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와 저자는 거의 동갑이라 할 수 있겠더군요.(제가 한 살 위지만!)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동시대를 살아왔던 비슷한 연배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코드랄까, 우리보다 한 5~6년쯤 선배거나 또 그만큼 후배들은 이해 못할 그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레닌의 조국 소련이 작살나고 변혁이니 혁명이니 사회주의니 다 물 건너가 버린 어느 해 겨울 나는 나에게 처음 그런 말들을 알려 준 친구를 만취해 찾아가서 녀석의 멱살을 쥐고는 녀석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넌 정말 그 모든 걸 진정으로 믿고 있었니, 정말 진심으로 믿었어?”
지금 그 친구는 뒤늦게 감정평가사 준비를 하고 있고 나는 대기업 사원이 되었다. 삶이란 게 그렇게 갈수록 너덜너덜해진다. 너덜너덜한 삶에는 너덜너덜한 삶이 위로가 되는 걸까.
난 미당의 시를 읽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운다.
- 「미당(未堂), 아직 짓지 못한 집 ; 서정주」
그 많던 좌파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들은 정말 좌파이긴 했던 것일까. 동호회 이름 붙이듯이 “넌 NL이니, 난 PD인데.”라고 떠들어 대며 책 몇 권 읽고 길거리에서 돌 몇 번 던지고 좌파라고 행세하던 그 철없는 좌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철없는 좌파의 일원이었던 나는 내 일상에서 그 이념의 흔적을 얼마만큼 지켜 내고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최말단에서 나 자신의 양심도 지키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가 내 삶은 이렇게 비루해졌어도 적어도 내 가치관만은 아직도 좌파라고 떳떳이 얘기할 수 있을까.
- 「C급 좌파, A급 우파 ; 고종석」
4.
80년대 싫든 좋든 사회과학의 세례를 받아야 했던 세대가 90년대 중반 이후 느꼈을 가치의 전도와 세기말적 혼란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스스로 좌파라고 자부할 수 없었음에도 심정적 동조를 하던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폐기 처분되는 상황, 전위에 섰던 몇몇은 정치권으로, 또 다른 몇몇은 사법고시로, 다시 몇몇은 절필을 하거나 신비주의자가 되어 제 각각 갈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지리멸렬한 ‘C급’도 안 되는 저 같은 몇몇은 군대를 갔다 와서는, 다른 혹성에서 온 것 같은 90년대 중반 학번 후배들과 불편한 동행을 하다 사회로 ‘방출’되었습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한동안은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구역질할 때 우리를 위로 했던 것은 영화와 음악이었습니다. 이른바 사회과학의 시대에서 대중문화의 시대가 열렸던 거지요. 저자 또한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마치 예전에 써 두었던 저 자신의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독한 현학과 자기 과시, 다른 이들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똥고집, 자신이 지지하는 일군의 작가주의에 대한 무한 숭배, 현란한 수사법과 화려한 언변 등이 정성일을 표현하는 몇 가지 특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늘 논쟁적이면서 찬반이 명확하게 갈리는 이 평론가가 나에게는 누가 뭐래도 영화를 보는 눈을 처음 띄어준 길눈이었다.
그를 좋아하게 된 데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군대시절 상황실 교환근무를 서다가 우연히 누군가가 틀어 놓은 라디오를 듣게 되었는데, 그 프로는 당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MBC FM의 <영화음악실>이었고 그날의 초대손님이 바로 매주 영화를 소개하러 나오던 정성일이었다. 그전에도 그의 글을 좋아하긴 했지만 처음 듣는 그의 말솜씨는 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자 한자 끊어서 또박또박 얘기하는 느릿한 말투, 어눌한 듯 하면서도 화려한 수사와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 「자기 저작이 없는 3인의 대중문화 평론가」
이 대목에서 저 또한 자연스레 그 시절 라디오을 통해 들었던 정성일의 무시무시(?)한 말투, 도무지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 독특한 말투를 머리 속에 오버랩 시키며 잠시 미소 지었습니다. 참, 지금도 <키노KINO>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창간호부터 몇 년 동안 다달이 모아가며, 그가 추천한 구하기도 힘든 영화들의 비디오 테잎을 구하기 위해 발품도 많이 팔았었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의 평론가에 대한 기억을 저와 저자는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LP 레코드 속지 수준의 대중음악 평론을 본격적인 의미의 학술적 담론 수준으로 끌어올린 강헌이란 평론가를, 혹시 아시는지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태지를 90년대 담론의 중심에 세운 데는 그의 공이 크고, 주류음악과 인디밴드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 내고 평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영화나 음악에 대한 글들이 일반 인문서적과 다른 것은 책을 읽으면서 시청각적으로 동시에 문화적 자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련되고 멋진 영화나 음악이라는 매체가 고답적인 이론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계간지 <리뷰RIVIEW>(문예마당, 1994)이다. <리뷰> 창간호의 서태지 인터뷰는 우리나라 대중음악가를 진지한 논의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거의 최초의 예가 될 것이다. 가히 전복적인 발상이었고 책상물림들에게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그는 서태지의 3집 앨범이 하나의 앨범이라기보다 사회과학의 시대를 넘어서 문화의 시대로 가는 뚜렷한 징후임을 짚어 냈던 것이다.
- 「자기 저작이 없는 3인의 대중문화 평론가」
강헌이 등장했을 때는 사회과학으로 대표되던 인문학의 시대가 저물고 영화와 대중음악을 필두로 포스트 모던한 ‘문화과학’이라는 용어가 풍미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후로 10년이 지난 오늘 ‘한류(韓流)’니 ‘천만 관객’ 운운이 과연 그 시절과 얼마만큼의 상관관계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됐건 이제는 가끔 TV 화면에 잠시 나오는 그를 보는 것 이외에 그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는 겁니다.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5,
이 책의 제목에서는 물론 책의 맨 첫머리에서도 저자가 표 나게 내세우는 말이 ‘전작주의(全作主義)’입니다. 영화음악가 한스 짐머가 음악을 담당한 모든 영화를 보고 그 사운드트랙을 모은다는 어느 후배와, 작가의 ‘내면적 세계’ 전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가 쓴 모든 글과 책들을 읽고 또 읽는다는 김화영 교수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전작주의’라는 개념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전작주의란, ‘한 작가의 모든 작품(全作)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공시적 분석을 통해 그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찾아내고 그러한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정한 시선’을 의미한다.
- 「전작주의자의 꿈」
저자는 이러한 전작주의를 하나의 방법론 삼아, 이윤기와 안정효라는 구체적인 작가들의 전작을 모으고 읽어가며, 저자와 저를 포함한 저자와 비슷한 연배의 세대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잃어버린 길을 찾아 ‘현재의 세상을 견디고 미래로 건너가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작가들 가운데 전작주의의 대상으로 이윤기와 안정효를 삼은 까닭을 저자는, ‘치열하게 당대적 현실만을 들어다보고자 했던 80~90년대와는 달리 이제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나 현실보다는 그 현실이 이루어지게 만든 근저의 토대들, 좁게는 미국사회부터 넓게는 서구문화까지 깊은 근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와, ‘그 둘이 이미 번역이라는 틀을 통해 오래도록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자본주의나 서구문화에 대해 천착해 오고 있었’고 ‘창작에서도 많은 작가들처럼 후일담 소설이나 사적인 연애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자는 책의 대부분을 헌책수집가로서 저자의 (헌)책에 대한 애정과 그와 관련된 자신만의 작은 역사, 그리고 헌책수집과 관련된 실용적 지식으로 채워놓고 있습니다. 이윤기에 대한 탐색은 저자와 이윤기와의 사적인 인연담(「‘전작주의자의 꿈’ 실현되다」)과 전작주의의 대상으로서는 턱없이 짤막한 작가론(「나의 이윤기론」), 그리고 그의 작품 ꡔ하늘의 문ꡕ에 대한 독후감(「이윤기, ꡔ하늘의 문ꡕ) 등 3편에 불과하고, 안정효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단 한 편의 작가론(「한 고독한 작가의 초상-안정효」)에 그치고 있습니다. 전체 분량으로 따져 봤을 때 5분의 1 정도나 될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깎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동종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저로서는 저자의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흡사 저자가 뜻이 통하는 친구인 듯, 함께 이 헌책방에서 저 헌책방으로, 어느 구석엔가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보물 같은 책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기분으로 나머지 5분의 4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마니아들은 자기가 미쳐 있는 것들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당구에 미쳐 있는 사람에게는 당구대에 인생이 담겨 있고, 음악 마니아에게는 음악이 세상으로 가는 열쇠이다. 바둑 마니아는 바둑판 사십구로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낚시광은 낚시를 통해서만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에 미친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세상을 만난다. 책에 미쳐 있다는 것은 책 속에 담긴 멋진 인생과 다양한 세상에 미쳐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멋진 일을 거부하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TV를 보면서 인터뷰하는 사람 뒤로 보이는 책장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저 사람은 어떤 세상에 미쳐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 「책에 미친 놈들」
6.
시간 나면 헌책방에 들려야겠습니다. 저자가 오래도록 찾아다니다 어느 헌책방에서 발견한 민음사 세계시인선 55번 ꡔ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선ꡕ을 행여 저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친구가 나보다도 훌륭하게 보이는 날
꽃 사서 들어가서 아내와 논다
꼭 그 책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찾으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설령 찾지 못한다 해도 그 뿐입니다. 삶이라는 게, 어제는 해가 비치다가 오늘은 비가 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겁니다. 머잖아 곧 마흔이 되는군요. 가을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