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에 흐르는 정적. 영주는 이제 이 정적이 편안하다. 타인과 한 공간에 함께 있는데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쁘기까지 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도 말을 한다는 건, 물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느라 자기 자신은 배려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억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놓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공허해지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 P42

(...) 책은 뭐랄까,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몸에 남는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아니면 기억 너머의 기억에 남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기억나진 않는 어떤 문장이, 어떤 이야기가 선택 앞에 선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하는 거의 모든 선택의 근거엔 제가 지금껏 읽은 책이 있는 거예요. 전 그 책들을 다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도 그 책들이 제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그러니 기억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는 것 아닐까요?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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