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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셀리 케이건 교수의 명강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첫머리, 청중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한다.
'당신이 3년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에도 시대, 유폐된 무사 슈코쿠의 할복을 감시하기 위해 가는 쇼자부로의 앞에 있는 중년 무사에게는 삼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주군의 측실을 탐했다는 이유로 유폐되나 작성중인 지배 가문의 족보를 작성하기 위한 십년 후에는 할복을 명받게 된다. 겉으로는 족보를 정서하는 역할로 가게 되나 실은 그가 도망가거나 할복을 못 하게 될 경우의 감시 역할로 가는 것이다.
슈코쿠를 알게 되는 사람은 모두 변한다. 선한 사람은 더 선하게, 악한 사람은 더 악하게.
슈코쿠는 담담히 족보 작성에 힘쓰며 일상을 보낸다. 무사와 마을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기도 하며, 힘이 닿는한 농민들을 돌보는 것도 유폐되기 전과 같다.
슈코쿠를 살리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협상할 수 있는 카드를 받게 되지만, 슈코쿠는 무사의 길을 선택한다.
비탈길을 구르둣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 죽음의 시간표를 담은채 담담하게, 하루살이 저녁매미처럼, 그 동안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던 무사의 길을 살아갈 뿐이다.
모두가 그의 생의 모래시계가 빠르게 줄고 있다는 것을 아는 무거운 상황, 유폐 되어 손 발이 묶인 답답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과 그를 돕는 이들의 활약은 통쾌하다. 죽으면 죽는거지 싶지만, 적마저 감복시키는 그 죽음을 더 가치있게 만드는 그의 결단 또한 시원하다.
그간 읽어왔던 에도시대물이 샤바케처럼 귀엽거나, 미야베 미유키의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였다면, 오래간만에 읽은 묵직한 시대물이었다.
3년만 살 수 있다면, 내가 막연히 이루고 싶어하는 이를 이루기에는 한참 부족한 시간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누구나 죽고, 언젠가는 다 죽는 삶에 대한 올바른 처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