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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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등록을 시작하면, 단숨에 본선까지의 700여 페이지를 달리게 된다. 


피아노 콩쿠르장을 배경으로 천재 피아니스트들의 경연, 그 천재들 중에 초천재 꿀벌 왕자! 

온다 리쿠가 맘 먹고 쓰는 소년 소녀 캐릭터들이 엮이며 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 없을 수가 없다. 서점대상 1위와 나오키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평소에 클래식 매니아였던 사람들이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인 내가 읽기에는 정말 재미있었다. 

피아노 콩쿠르 배경이고, 피아노 작품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그렇다. 온다 리쿠가 작품 속에서 심사위원들, 경연자들, 주변 인물들을 통해 해석하는 작품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과장되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지만, 어떤 그림 효과도 없이, 글로만 그려내는 작품 해석들의 심상은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이다. 


자연 그 자체와도 같은 천재 가자마 진(dust)과 어릴 적 천재 신동 피아니스트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공연 직전 무대에서 도망친 에이덴 아야, 전방위 천재 마사루(victory) 그리고, 그런 그들을 엄격히 가르치고 심사하는 심사위원들, 스승들, 그들 모두를 성장시키는 건 '자연'인 가자마 진이다. 모두가 사사받고 싶어 하고,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 유지 폰 호프만이 사사했다고 하며 추천서를 써 준 그를 음악계의 '기프트'로 받아들일지, '재앙'으로 받아들일지, 모두가 시험에 든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여겨졌던건, '예술'과 '기술'과 '마케팅'의 '직업'인 콘서트 피아니스트들의 세계인데, 온다 리쿠는 책에서 끊임없이 다른 직업들과 비교하며 공용어로서의 세계 어디에서나 지구인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음악만의 고유한 점과 음악이 다른 생업과 같은 점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문학계와 클래식 피아노의 세계는 비슷하다는 말을 한다. 

봐, 비슷하잖아, 콩쿠르와 신인상의 난립. 똑같은 사람이 인정 받기 위해서 온갖 콩쿠르와 신인상에 응모하는 것도 똑같아. 그걸로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양쪽 다 극히 일부지. 자기 책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 자기 연주를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바글바글한데, 둘 다 사양산업이라 읽을 사람도 들을 사람도 한 줌밖에 안 돼." 


윽,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찌른다. 


" 하염없이 키를 두드려대는 것도 비슷하고, 언뜻 보면 우아해 보이는 점도 비슷해. 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화려한 무대밖에 보지 않지만, 그걸 위해 평소 아찔하리만치 오랜 시간을 얌전히 틀어박혀 몇 시간씩 연습하거나 원고를 써야 해." 


콩쿠르도 신인상도 자꾸 늘어가는데, 지속하기 위해서, 그 바퀴를 계속 굴리지 않으면, 파이가 줄어버리니깐. 

하지만, 음악계는 투자비용이 다르지. 악기, 악보, 레슨비, 발표회 비용, 꽃다발값, 의상, 유학비용, 대관료, 인건비, 전단지, 광고비, 등등. 소설은 밑천이 들지 않지. 하지만, 소설이 음악에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통하는 음악, 언어의 장벽이 없다. 


양봉가의 아들, 피아노도 없고,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가자마 진이 '자연' 그 자체라서 인간계를 벗어난 것 같은 허술한 면이 있고, 에이덴 아야는 어릴적 도망쳤던 음악계로 다시 돌아와 끊임없이 고민하고 회의하는 것에 비해 운동선수 출신인 마사루, 이름마저 '승리victory'를 의미하는 장신에 운동선수 멘탈에 음악 천재에 전략가이자 스타성마저 지닌 바다와 같은 연주를 하는 마사루. 음악인이 아니라 인간으로도 어디 가도 빛날 완전체이다. 그런 그마저 자신과 각기 다른 스타일의 천재들을 만나 성장하게 된다. 


범인들에게 와닿는, 천재를 동경하고, 음악가의 세계로 다시 발들인 아카시도 있다. 음악가였다가 포기하고 악기점에서 일하다가 준비해서 콩쿠르 막차를 탄 그의 온화한 연주 역시 이 콩쿠르를 통해 성장하고, 길을 찾게 된다. 


가자마 진의 연주가 경연자들이나 일반 관중들에 비해 심사위원들에게 공포와 패닉을 선사한 것은 그들 마음의 연약한 부분, 과거의 꿈과 이상을 묻어둔 방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을 조금씩 자기편으로 만들며 매 예선 아슬아슬 턱걸이로 통과한 것.  


"프로가 되면 그 작은 방은 상당히 미묘한 존재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품고 있었던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의 이미지. 음악에 대한 풋풋한 동경이, 어린아이의 얼굴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음악가가 되면 좋아하는 음악과 훌륭한 음악은 다르다는 업계 내의 상식이 몸에 밴다. 일로 하는 음악, 상품 가치가 있는 음악을 제공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이 어떤 것인지 공언하기 어려워진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주가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프로 경력이 길어질수록 허들은 계속 높아지고 이상은 멀어져 가슴속의 작은 방은 점점 더 신성한 장소가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작은 방을 열어보는 일도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평소에는 그 존재를 일부러 잊게 된다." 


이상에 도달할 수 없고, 그 이상은 높아져만 가고, 업계에 내려오는 '훌륭한' 음악이 정해져 있고, '일'이고 '상품가치'를 생각하는데 익숙해 지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도 쉽지 않고, 어느 정도의 타협이 필수불가결한 일이 되고, 결국은 기술은 늘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과 이상의 갭은 점점 커져가는 것일까.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나. 예술을 위한 예술. '돈'이 필요 없는 예술. 


엉뚱한 가자마 진은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아버지 친구인 꽃가게에서 먹고 잔다. 책 읽는 내내 꽃이라면, 꽃일이라면 상상하면서 읽었는데, 실제 꽃꽂이 선생님의 꽃꽂이 이야기가 나온다. 


"음, 꽃꽂이는 음악하고 비슷하네요." 

"그래?"

진이 가위를 다다미에 가만히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재현성이라는 점에서 꽃꽂이하고 똑같이 찰나에 지나지 않아요. 이 세상에 계속 붙잡아놓을 수는 없죠. 언제나 그 순간뿐, 금방 사라지고 말아요.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하고, 재현하고 있을 때는 영원한 순간을 살아갈 수 있죠." 


순간의 영원성이라.. 찰나의 예술, 어떻게 즐기냐에 따라 그 찰나가 좀 더 길어질수도, 짧아질 수도 있지만, 찰나라는 것은 같다. 재현하고 있을 때만이 영원한 순간이라기엔, 플로리스트는 재현하고 뒤로 빠지지. 그리고, 그 순간부터 꽃의 생명은 시작이고. 


이 뒤에 섬찟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도가시 아저씨가 꽂으면 가지도 꽃도 살아 있네요. 마치 자기가 살해당한 줄도 모르는 것 같아요." 


살해당했다니, 어이, 천재씨. 꽃꽂이는 꽃의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가장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여튼, 난 무슨 이야기를 읽던지간에 꽃으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무려 꽃선생님이 나와서 꽃이야기를 해주니 황홀했다. 꽃선생님이 감수했다면 '이건 아닌데' 싶은 것도 있지만, 뭐, 사소하다. 넘어가자. 


음악계의 많은 이들이 평생을 걸고, 인생의 시간을 쏟아 부어 소리를 만들어낸다. 


"음악가란 직업의 무게, 그것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의미. 

생업이라니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실로 이것은 업, 살아 있는 업이다. 허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남는 것도 아니다. 그런 대상에 인생을 걸다니 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렇게나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왔다. 

'꿀벌과 천둥'의 세상. '봄과 수라'의 세상. 

 

원서와는 다른 국내 표지, 휘리님 특유의 수채 초록 벌판에 숨어 있는 작은 피아노 하나가 인상적이다. 

이 책과 무척 잘 어울리고, 이 책이 만들어내는 심상과도 잘 어울린다. 


음악은 항상 ‘현재‘여야만 한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전시품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아름다운 화석을 캐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그냥 표본에 그쳐 버리기 ㅐ문이지.

이 아이의 프로그램은 호프만 선생님이 골라준 게 아니다.
그렇게 직감했다. 아마도 이것은 이 아이가 직접 만든 프로그램일 것이다. 그에게는 타고난 편집 능력이 있다. 편집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쓰임이 있는데, 최근 음악가들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셀프 프로듀스 능력이라고 해도 좋다.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은지, 어떤 음악가로 보이길 원하는지. 그런 객관적 시점을 갖춘 음악가만이 남들과 구별되고 살아남을 수 있다. 리사이틀이든 뭐든 라이브 무대라는 것은 그때마다 한 장의 앨범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그게 남의 곡이든 각기 다른 시대의 곡이든 마찬가지다.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여서 곡을 통해서,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뭔가를 깨우치는 순간은 계단식이다.
비탈을 느긋하게 올라가듯 깨우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걸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여기가 한계인가 절망하는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순간이 찾아 온다. 이유는 몰라도 느닷없이, 그때까지 연주하지 못했던 부분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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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17-08-03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온다 리쿠는 <밤의 피크닉>,<흙과 다의 환상>,<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환상> 이런 종류인데, 이 책은 어떤지 궁금해지네요. 한동안 정신없이 온다 월드에 빠져있다가 한참동안은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ㅎㅎ

하이드 2017-08-03 11:52   좋아요 1 | URL
그 안 쳐다보던 시기에 별로인 작품들 많이 나왔고, 이 작품으로 다시 온다 세계에 빠지실 수 있으실겁니다! 영민한 소녀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