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라틴아메리카 문학 영화에는 라틴아메리카 영화가 없다. ( 뭔소리여? 한국어 해독력이 떨어지는 '나'다 -_-a)

이 책에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관련되어 제작된 18편의 영화에 대한 평이 수록되어 있다. 그것도 싸구려 문학작품이 아닌, 소위 고급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영화들이다. 물론 이 중에는 잘된 영화도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다. 그러나 정말 형편없는 영화는 한 편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잘못된 영화 속에서도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화나 정치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면 토마스 구티에레스 아레아, 파트리시오 구스만, 움베르토 솔라스, 호르헤 상히네스 등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렇지만 이런 감독들의 영화는 이 책에 하나도 없다. 그것은 이들의 영화가 국내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내에서조차도 이런 이름을 쉽게 들어볼 수 없고, 국내에서도 역시 일반 관객들이 이들의 영화를 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경험을 약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한국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이들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에 9년간 체류하면서 시네마테크나 시네클럽에도 자주 다녔지만,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를 제외한 나머지 감독들의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에서는 이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감독들로 간주되고 있었다. 아마 국내에서 라틴아메리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미국과 영국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미 학계의 영향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그들의 문화정책이 국내에 여과 없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에 언급된 감독들의 작품은 대부분 치열한 현실 고발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동시에 반제국주의적인 영화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영화들이 배척하고 있는 영미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반제국주의적 영화들은 영미의 문화적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나 로저 스포티스우드의 <언더파이어>는 미국의 군사 개입을 비난하는 영화들이지만, 미국 내에서 상영되면서 미국의 문화가 정치와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관점은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자세히는 알 길이 없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영화들도 바로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워터게이트 사건이 정치계의 더러운 치부가 드러난게 아니라, 대통령을 탄핵하는 민주주의의 신념이 지켜졌다고 예쁘게 포장된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을 영화화 하고, 보기 좋게 분식하는.)

이 책에 수록된 라틴아메리카와 관련된 영화는 모두 사회 고발적일 것이라고 획일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를 거부한다. 그것은 여기서 다루는 18편의 영화들이 하나의 흐름, 특히 라틴아메라키의 신영화 운동 속에 통합될 수 없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글은 주관적인 필체로 뜨겁게 씌어진 ' 불타는 연대기'가 아니라 평이한 설명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특정한 이론이나 시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너무 주관적인 설명을 하다 보면 해석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소리가 강하면 다성적이 되지 못하고 단성적이 되면서 독자/관객들의 상상력을 빼앗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관련된 영화를 볼 때 알아야 할 최소한의 문화적 배경이나 지식을 덧붙이는 것으로 한정했으며, 독자/관객들이 이런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보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특정 시각으로 바라보면 깊이는 있되 폭은 넓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관련된 영화들의 목록조차 제대로 작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무리이며 과도한 욕심인 것 같다. 이럴 때 최선의 방법은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글일 것이다. 그러나 글을 써본 사람들은 이런 작업이 절대로 쉽지 않음을 알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모두 놓치느니, 한 마리의 토끼나 제대로 잡는 것이 좋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마리의 토끼 중에서 아무 거나 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쫓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영화와 문학작품의 이해를 바탕으로 얕지만 폭넓게 비평적 관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음을 밝혀둔다.

4. 왜 지금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영화를 논하는가

여기에 수록된 영화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작품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제작국별로 분류해보면 미국 영화, 이탈리아 영화, 라틴아메리카 영화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미국이나 유럽 감독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에 그토록 관심을 보였느냐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은 이제 라틴아메리카라는 제한된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 문학의 주요 흐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국내의 일반 독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라는 세계는 아직도 우리에게 '미개한' 대륙으로 인식되고 있고, 따라서 그들의 문학도 미국이나 유럽의 문학보다 한 수 뒤처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20세기 후반의 세계 문학을 이끌었던 주인공이고, 21세기 초에도 그런 역할은 변함이 없다.

사실 우리의 독서 성향은 아직도 구미에 치우쳐 있다. 움베르토 에코나 밀란 쿤데라의 책이 출간되면 즉각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반면,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신작은 거의 국내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아니며,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의 거장들에게 서열을 매긴다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현재 세계 문학의 최고봉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있고 그 밑에 푸엔테스, 사라마구, 쿤데라, 에코 등과 같은 작가들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보다는 쿤데라나 에코가 우리에게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 잘 모르지만, 왠지 통쾌하다. 스페인문학자의 말이기에 형평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흔히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이 유럽이나 미국의 문학에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라면 유럽과 미국 독자에게도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세계 문학의 중심으로 부각되었을까? 그것은 보편성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가 요구하는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을 통해 상상력을 배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라틴 아메리카'를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그들이 가진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문화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상상력과 환상의 개념을 배우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의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책은 지난 1년 반 동안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영화로 보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라는 강의를 하면서 생긴 부산물이다. 그래서 우선 '영화'라는 말에 유혹당해 이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괴로움을 받았던 수많은 예쁜 여학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한 이 강의를 1999년도 보호학문강의로 선정하여 지원해준 한국학술진흥재단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01년 2월 송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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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6-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 나도 이 강의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