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점이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여기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보다 네살 연상이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판 위에서 그녀를 약하게 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돈을 다섯배나 더 벌고,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 수 있게 해주는 돈을 많이 주는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다. 남자는 스키강사, 요리사, 자동차 정비사, 등등 많은 일을 했지만, 지금은 여자의 아파트에 살면서 그녀를 사랑하는 일만 하고 있다.

그와 같은 '힘'의 불균형은 사랑이라는 판이 깔려 있을 때와 깔려 있지 않을 때 몹시 미묘하다.

책의 제목은 '정체성' .

남자는 여자의 모습에서 그가 사랑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들이 얼핏얼핏 보이는 것에 혼란스러워한다. 해변에서 그녀인줄 알고 쫓아갔었는데, 그녀가 아니여서, 그가 사랑하는 그녀조차 혼동한 자신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녀가 직장에 있을때 그녀의 목소리는 그와 있을 때보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빠르다. 그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약간의 어색함의 순간이 지나고나면, 이제 그녀는 그가 사랑하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녀를 맘껏 사랑한다.

여자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니 가질 수 있다.

'그래요, 나는 두 얼굴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한꺼번에 두 얼굴을 할 수는 없어요. 당신 앞에서는 내일에 대해 비웃는 얼굴을 하지요. 사무실에서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는 우리 회사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의 서류를 처리하고 있어요. 그들을 추천해 주거나 부정적 회신을 하는 게 내 업무예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사랑하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는 '정체성' 이라는 미묘한 간극이 있다. 서로의 정체성을 묻고,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그 잠깐의 순간에 '힘'의 균형은 기우뚱기우뚱 시소질을 한다.

'그'의 정체성은 '그녀'가 봐주는대로, '그녀'의 정체성은 '그'가 봐주는대로 쉼없이 조정된다.

책을 덮으며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결국 나 이외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모습을 엿보는 것일 뿐이라는 결론을 섣불리 내리고 우울해져버린다. '무관심' 이 유일한 공통의 열정이라는 것은 그만큼 '정체성'을 찾기 힘든 세상이라는 이야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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