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게 오래간만에 읽은 아사다 지로의 책이다. 나는 아사다 지로를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데, 그의 <철도원 이야기>는 무척 좋아하고, 아사다 지로의 번역본은 대충 다 읽은 것 같다.
표지가 이게 머야, 구박했던 <가스미초 이야기>의 실물은 꽤 귀여운 노랑색의 작은 책이다. 여전히 인물 삽화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가스미초(霞町, 안개마을이라는 뜻)라는 지명은 이미 도쿄의 지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예전에 그 이름으로 불렸던 거리에 서면 누구나 "아하!"하고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이리라. 가능하면 겨울밤이 좋다. 아오야마와 아자부, 롯폰기로 둘러싸인 그 지역에는 밤이 깊어질수록 신선한 안개가 솟구친다. 주변의 묘지나 대사관의 나무들 사이에서 새어 나온 안개가 길을 따라 천천히 떠다니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가스미초' 이야기.이다. 반박할 수 없는 제목.
주말 아침 눈 뜨자 마자 손을 휘휘 둘러 잡히길래 읽기 시작한 책인데, 결국 아점으로 라면 먹으면서 마지막 단편 '졸업사진'을 읽다가 눈물을 쏙 뺐다.
아사다 지로는 정말정말 글을 잘 쓴다. '꾼'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잘어울린다. 사람 맘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작가.
현실, 환상, 사람 마음 속, 이 세상,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들, 자연, 도시, 인간, 동물, 은행잎, 땅콩, 맥주병, ... 응? 어떤 재료를 내어 놓아도 기가막히게 요리해서 내 놓는 작가다.
배우로 치자면, 연기를 잘 하는 배우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연기라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잊을 정도로 연기를 해내는 거. 연기야, 실제야. 이런 생각이 뒤늦게 들기도 하고, 저건 분명 저 사람 진짜 성격일꺼야. 라는 근거 없는 강한 추측을 날리기도 하고. 두번째는 어떤 장면에서 기대하는 연기를 뛰어 넘는 연기로 '우와, 저 배우 연기 진짜 소름끼치게 잘하는걸' 싶게 만드는 연기다. 예를 들면 첫번째는 기무라 타쿠야, 두번째는 고현정. 예가 좀 뜬금없긴 하지만, 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함.
아사다 지로는 후자다. 문장 하나하나, 문단 하나하나. 기가막히게 잘 써내는 이야기꾼이다. 이 과의 다른 작가로 나는 존 어빙을 들겠다. 오래간만에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으면서 새삼 이야기꾼인 아사다 지로에 마구 감탄하고 있다.
여덟개인가의 단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화자는 메이지 시대 고관 대작을 찍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제자로 데릴사위로 들어온 아버지의 아들인 '나'
게이샤 출신의 너무나 아름다운 할머니 이야기, 청춘의 로맨스, 우정,의리, 어린시절의 추억, 가족,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할아버지 이야기..
잔잔하지만 가볍지 않은 감동이 있고, 사진사인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사진'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온다. 현실에 있을법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현실에 있을법한. 그런 이야기들..
그러고보니 <창궁의 묘성>을 아직 안 읽었군. 이거나 찾아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