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좋았고,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을 것이다. 

는 계속되고 있다. 


신경 쓰이는 일도 있고, 기대 되는 일도 있고, 아쉬운 일도 있고, 잘했다 싶은 일도 있지만 

다 뭉뚱그려 '좋았다.' 고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책을 더 많이 읽을까. 책을 더 많이 읽으면 된다. 

아. 책을 더 많이 읽으면 되는구나! 

책을 더 많이 읽으려면 책을 더 잘 읽어야 한다. 책을 더 잘 읽으려면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이건 나에게 더 이상 무용하고, 헛된 고민이 아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고밖에 말하지 못한다면, 그게 뭐냐 싶지.

이게 나의 콜링, 일의 사명이고, 보람이고, 돈이고, 말로의 약값과 병원비이고, 고양이들의 밥이고, 집이라고 하면, 

내가 계속 고민해도 되는거겠지. 


아니, 고민할 시간에 읽으라고. 


여튼, 내가 계속 이렇게하면 되지 않을까 해오는 것은 20분 타이머와 1시간 타이머다. 

매일의 덩어리 시간들이 크다. 그 덩어리 시간을 어떻게 쓸지 정하는 것은 나고, 그 시간을 쓰는 것은 나다. 

이게 다 스마트폰 때문이다. 탓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ADHD 이야기하는것 보면 나도 그런가 체크해보기도 하지만

ADHD는 아닌 것 같고, 스마트폰 때문인건 맞는 것 같고, 그 외에도 복합적이겠지. 


핑계될 시간에도 읽어야 하고. 


덩어리 시간들이 어떻게 가는지 보기 위해 30분 단위로 되어 있는 다이어리를 쓰고, 20분 타이머를 맞추어, 내가 얼마나 헛짓을 많이 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시간을 마구 쓰더라도 20분 간격으로 제정신 돌아올 수 있도록. 


책 읽을 때는 20분 간격으로 책을 바꾼다. 재미 있으면 20분 더 읽는식으로 하루에 세 권에서 다섯 권 읽는 것이 목표이다. 


그래서, 어제 읽은 책들은 


 
















소설가 이서수를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메모해두고, 다음 번 도서관 갈 때 더 빌려보려 한다. 


안 온의 <일인칭 가난> 이 너무 좋았어서 다른 사람들의 평을 검색하다보니 이서수의 <엄마를 절에 버리러> 가 더 좋았다는 글이 있어서 기억해두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일인칭 가난>은 소설이고, <엄마를 절에 버리러>는 소설과 에세이이다. <엄마를 절에 버리러> 를 가족 경제 서사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 중심은 두 책 모두 '엄마와 딸' 이다. 아빠는 어디갔냐고? 생각만해도 속 터진다. 치매 걸리거나 알콜 중독이거나 자살하거나 뭐 그렇다. 아니 애비가 그렇다는 것이 속 터지는게 아니라 그를 돌보느라 갈리는 엄마와 딸 이야기가 속이 터진다. 특히 딸에 이입하게 되고.



<엄마를 절에 버리러> 에는 단편 소설 세 개, 에세이 하나, 해설이 나온다.

주제는 돌봄과 실버노동이다. 소설이지만, 뒤에 나오는 에세이를 보면, 소설 속의 엄마와 딸은 저자와 엄마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엄마를 절에 버리는 이야기는 간병하느라 마음도 통장도 텅텅이고 큰 빚만 있는 엄마와 딸. 아빠가 죽고 엄마가 절에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남은 빚을 헤아려 보았다. 큰돈이기는 했지만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엄마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해봐. 그러면 간병 생활 다시 시작이야. 그 지옥 같은 일을 또 반복해야 돼.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연을 끊는 게 나아. 차라리 그게 더 나아." 


이모들은 어떻게든 엄마를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알았어, 엄마, 출가해. 우리 이제 자유롭게 살자." 


엄마는 이제 빚을 내게 떠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출가하라고 말한 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엄마의 말대로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나는 죽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간병이 끝나자마자 다시 엄마를 간병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엄마에겐 돈 벌어오는 딸이 있지만, 나에겐 자식이 없다. 나는 혼자였다. 


이거 내가 맨날 하는 얘기였다. 막상 닥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인데, 내가 부모 간병하다 늙으면 나는 늙어서 어떻게 해? 그 바로 뒤에 쫓아오는 생각은 자식이 보험이냐고. 자식이 부모 간병하면서 쪽쪽 빨리는 존재냐고. 있지도 않은 자식한테 미안해했다가, 내가 자식일 때 부모가 무조건적으로 돌본 것은 갚아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가. 그런 부모 - 자식 - 부모 - 자식 순환에 대해 생각하다 복잡해진다. 나는 간병할 생각 없고, 나 쓸 것 덜 쓰고 남는 돈 외에는 뭘 더 할 생각 없다. 유산도 안 바라니 다 노후에 쓰시라고 얘기해왔다. 엄마랑은 이런저런 일로 (고양이) 종종 연락하지만, 아빠랑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소설에는 60대의 엄마가 일을 찾기 위해, 일을 하다 짤려서, 일을 하면서 겪는 일들이 나온다.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답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거기서 왜 '아빠'는 간병 받는 존재이기만 한가. 왜 엄마와 딸은 간병 하는 존재이기만 한가. 이런 흔한 생각들이 들어버리는거지. 자신을 학대한 아빠와 왜 연을 못 끊지. 소설에서도 에세이에서도.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얘기되다가 이 소설집에서는 가족의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한발짝 나아갔단다. 그게 뭐야. 
















말 많던 <헌치백>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10억으로 아이를 가지고 중절하는 것이 소망인 중증장애 여성의 이야기라는 책소개가 불쾌해서 읽을 생각 없었다. 도서관에서 보니 막상 책도 얇고 궁금하기도 하길래 빌려서 읽었건만 시작부터 저질 포르노였다. 

다 읽고 나서는 지금까지 읽어본 적 없는 특이한 것을 읽기 위해 똥밭을 헤집은 기분이지만, 똥밭에 있어서 그 특별함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건가 싶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책 속 주인공과 같은 병을 가진 중증장애여성이고, 책 속 모델은 역시 같은 병을 지닌 중증장애여성이라고 한다. 부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책에서는 부모가 유산을 많이 물려주고 케어받을 기반을 마련해준 '부자' 중증장애여성이다. 그러니 10억 주고 정자 받아서 임신하고, 중절하는 소망도 가질 수 있고, 포르노 소설 써서 받은 돈으로 기부도 하고. 


책소개만으로는 그냥 다 똥같은데, 당사자성, 내가 모르는 중증장애여성의 삶, 그리고, 지적이고 멀쩡한 글과 교차되는 포르노 글과 미친 소망 때문에 다 읽고 뭐라 후기를 남기기 어려운 기분이 되어버렸다. 장애인 차별하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 마초새끼들아. 라는 얘기가 두 번이나 길게 나온다. 출판계는 체육계보다 장애인에게 한게 없다는 이야기 같은 부분은 종이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했지만, 역시 저자처럼까지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좀 더 생각해 볼 것.


장애인 돌봄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서  최근에 읽은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이 계속 떠올랐다. 장애 운동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이 곰돌이 책은 강추 (책의 내용과 관련 있는 곰돌이다.) 



 













비비언 고닉 다들 좋다 좋다 하지만 나는 읽어도 읽어도 별로였다. 

근데, 이 책 너무 좋다. 읽는 중이고, 얼른 읽고, 원서 사서 또 읽어야지. 

완전히 내 것이 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싶다. 


최근에 <일인칭 가난>,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될까> 와 같은 책들을 읽으며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해답과 개인적 저널리즘 에세이에 대한 불편함들이 이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해결되는 기분이다. 이 책과 <에세이즘>에서 발췌해두었다. 읽고 정리해봐야지. 


이렇게 끄적이는 글이라도 더 좋은 글을 더 잘 쓰고 싶다고 욕심내게 만드는 책이다.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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