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정원은 리본이 달린 작은 꾸러미에 포장되어 어딘가로 배달되기를 기다리는 어여쁜 선물 같았고, 부영은 그런 연약한 룸메이트에게 '언니스러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제멋대로이면서 정원이 제멋대로 굴다 상처받는 것은 견디지 못했다. 감싸면서 단련시키려 했고 아끼면서 통제했다. 정원이 저거 너무 순진해서, 정원이 쟨 너무 고지식해. 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그러면서도 정원의 순진함과 고지식함을 교정하기보다는 보존하려 했다. 정원만의 스타일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려 했다. 누가 봐도, 있는 그대로 지켜준다, 그런 느낌이었다. (12-13)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잇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29)




등장인물들의 사정은 같은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 새내기, 아기오리 시절 같은 하숙집에 있었다는 이야기 외에는 간간히 나올 뿐이다. 왜 지금의 파국인지에 대해서는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속시원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 사정이 중요한 건 아닌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재도 과거도 각각의 안에서 미화되고, 기억되고, 삭제되기 때문에. 다만 그로 인해 남은 찌꺼기, 혹은 추억, 혹은 기억, 혹은 잔상만이 중요하다. 아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때때로 변한다. 사슴벌레식 문답이 뭐뭐하'든' 의 문답이 해석을 달리해간다. 


그나저나 권여선 소설집 첫단편부터 어휴 술냄새.. 


권여선의 또 다른 소설집 '레몬' 을 이전에 살던 동네 맥도날드에서 맥모닝 먹으며 읽다가 펑펑 운 적 있다. 그 안에 '봄 밤'이라는 단편. 왜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게 엉엉 울었는데, 엊그제 트위터에서 누가 그 안에 또 다른 단편 볼 때마다 운다는 이야기를 봤다. 


당시에는 나도 술을 마셨지만, 지금은 술 안 마셔서 다시 읽어도 이유 없는 눈물이 날까? 궁금하긴 하다. 

그 이후로 읽은 술 단편집인지 안주 단편집인지는 노가리 안주던가 굿즈로 왔던 기억 나고, 심상하게 읽었고, 


올 해 소설가들의 소설 1위 한 <각각의 계절>을 읽는 중이다. 근데, 소설가들의 소설 1위는 나하고 늘 안 맞긴 했지. 


이전 소설집 <레몬>은 아마도 팔았고, <레몬>의 영어 번역본을 사두었다. 다른 언어로 읽으면 역시 그 때의 기분은 안 나겠지. 그리 오래전 같지 않은데, 뭐가 많이 변했기도 하고. 


변하지 않은 건 나, 고양이 세 마리. 

변하든 않든, 나, 고양이 세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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