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행위란 나에게, 내가 사랑하거나 사랑할 이들에게 당도할시간으로 미리 가 잠깐 사는 것이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라 당장 이해하기 힘들어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군."
하는 식의 감(感)을 얻는다. 신비로운 일이다.

정신 밭에 뿌려둔 감(感)이라는 씨앗은 여하튼 어떻게든 자란다. 그러다 문득 내게 당도해버린 시간을 통과할 적에 떠오른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니고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서툴게 더듬어 찾아가면 오래 전 내 정신밭에 뿌려둔 씨앗 자리에 뼈가 자라고 살이 붙어 서 있는 형상과 마주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그래도 읽는 게 좋으냐는 질문에, 내 의견을 말했다.
"이해하지 못해도 읽으면 좋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못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잊고 살다 어느 순간 찾아옵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된 거지요. 그때 다시 읽으면 기막힌 내 이야기가 됩니다."

대상이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빈약한 환경은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언어로 발화된다.

사물과 대상에 관심 없다면 어휘력을 늘리기 쉽지 않다. 어휘력 늘려봐야 어따 쓰겠는가. "왜 관심이 없을까?"라고 묻는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담론이 될 수 있으나 현재의 한국인에게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피로‘ 다. 낙오되지 않으려고 공부나 일에 쏟아부어야 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고 한국 사회 특유의 가족이나 동료를 비롯한 남들 시선 신경 쓰고 비위 맞춰야 하는 감정 노동에서 오는 피로가 만만찮다.

안정되지 않은 공동체 상황과 불안한 미래는 그렇잖아도 자글자글 끓는 피로에 군불을 땐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어휘를 선택해 발화한다.
듣는 사람의 오해와 피로를 가중시킨다.
악순환이다.피로에 절고 스트레스에 눌려 대상과 사물을 데면데면하게 지나칠라치면 경고등처럼 그때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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