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지에 나와 있는데 몰랐네. 고딕스릴러 단편집이다.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는 마지막 작품인 허희정 작가의 '숲 속 작은 창가에서' 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자들이 사라지는 숲을 조사하러 내려온 피디가 사리지고 싶어 P시를 찾은 나에게 하는 말. 

"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책소개를 읽지 않아도, 제목만 봐도 어떤 책일지 알 것 같은 마음으로 읽었다. 고딕스릴러인지는 몰랐지만. 


작품들이 다 으스스하다. 어떤 장르였다고 해도 현실의 으스스함이 덮어졌겠지만, 대놓고 고딕스릴러들이라는 점이 읽고나니 더 인상 깊다. 




한국 작가들의 고딕스릴러를 아직 많이 못 읽어봤지만, 정말 잘 맞는 장르같다. 여자를 가두고, 죽이고, 사라지게 만들고.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이 아주 잘 쓸 수 있는 장르인 것 같다. 각각의 단편들도 다 수작이고, 잘 읽었다. 


책 말미의 강지희 평론가의 발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죽고 난후에 남는 것은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현실과 무기력을 동반한 적막" 


소설을 읽고 읽으면 더 와닿는 발문이긴한데, 발문의 전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2010년대 중반 득세한 가정 스릴러는 대개 남편의 폭력성이나 비밀스러운 과거가 문제의 중심에 있고, 이에 대응하여 능동적 가학성을 발휘하는 여성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문학에서 여성 화자를 내세운 심리 스릴러들이 보여주는 가장 뜨거운 애증은 다른 여성을 향해 있으며, 가학성은 기묘한 자기 처벌로 귀결된다. 그 근간이 되는 유서 깊은 모녀의 애증은 이 소설집 중핵에 있다. 


어머니는 자애와 희생의 존재로 신화화되는 대신, 냉담하고, 잔혹하고 징그럽기까지 한 이기적인 존재로 그려지며 죽음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어느 순간 증발하고 잊혀진 여자들은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임의로 박탈하는 괴물적 모성이 지닌 권력의 이면이다. 이 가운데 평생 열정과 변덕으로 새로운 남자를 찾아 헤맨 어머니를 딸이 목 졸라 살해할 때, 한국문학의 오랜 모성 신화가 깨져나가며 새로운 권력 계승의 길이 열린다. (...) 모친 살해는 사회제도의 압력을 개인화된 불운과 추문으로만 경험해야 했던 여성들이 '종교'와 '친족'을 해체하고 레즈비어니즘으로 새로운 사회를 열어내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뿌리 깊은 애증과 불안의 부정적인 속성들을 유산으로 여기며 상속받을 수 있을 때, 여성들은 증여의 대상이 되거나 증발하듯 사라지기를 그친다. " 


한녀문학이라는 멸칭을 자조적으로 혹은 애증으로 말하곤 했다.(강화길 작품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좋아하는 작품에서도 독한 모녀 관계가 눈에 띄었는데 (남유하 '다이웰 주식회사' 같은) 위의 발문이 일정 부분 답이 되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정표가 하나 생겼으니, 계속 읽으면서 생각해보겠지만,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오는 유산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읽어왔는데, 어머니에서 딸로 내려오는 그 독하고 찐득한 그 정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거리가 생겼다. 


리뷰를 쓸 지 모르겠지만, 쓴다면 책도 별 다섯개. 흔한 콘셉트라고 생각했는데, 실려 있는 단편들의 수준도 높고, 발문까지 읽고 나니, 좋은 기획이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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