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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새롭게 만나는 아르누보의 정수
장우진 지음 / 미술문화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알폰소 무하, 무하에 대한 책도 몇 권이 나와 있고, 무하를 검색하면 그의 그림을 모아놓은 포스트도 여러개가 있을만큼 무하는 그렇게 감춰진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는 무하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뭐, 제가 다른 작가라고 해서 다 알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림은 알면서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을 모르고 있기란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말장난같지만, 무하의 그림은 충분히 낯익고 친숙합니다. 아르누보라는 말이 어색하게 다가올지 몰라도 무하의 그림을 보면 어느 정도 아르누보가 무엇인지 정리해볼 수 있을만큼 무하는 아르누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잘 모르고 있었을까요?


서두에서 저자가 한 때는 무하의 그림이 파리를 가득 메웠지만 지금은 잊혀졌다,고 말해줄 때 살짝 의심을 하기도 했지요. 반짝하고 사라진 많은 스타들처럼 생명력이 짧은 아티스트인가, 하고 말이에요. 흔히들 비교를 할 때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살아있는 동안에는 빛을 못 봤지만, 사후에 인정을 받아 오래도록 그 가치를 인정받는 명작이 있는 반면, 생애동안에는 유명했을지 모르나 죽음과 함께 잊혀진 작품이 있다고 말이죠. 후자가 아니려나, 어설프게 생각했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역시나,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중간쯤 갈 수 있어요. 무하에 대해 전혀 모르고서는 무하를 폄하할 뻔 했지 뭡니까.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부분에 무하의 자녀들이 무하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관을 세우고 그림을 찾아온 일화를 읽으면서는 감동을 했지 뭐에요.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대의 유명한 아티스트가 자녀에게 인정받았던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단 말이지요. 자칫하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견딘 주인공이 천재적인 감각을 앞세워 세상을 풍미하고 돈과 명예를 즐기다가 말년에는 자녀들의 유산 다툼과 지인들의 배신으로 잊혀져버린 시대의 예술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무하는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서 끝내 정상에 올라 정직한 땀을 흘린, 예술가였단 말이지요. 


그것때문인지 책 가득 실린 무하의 그림이 더욱 진중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무하 그림 속 여인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지만, 천박하지 않고 단정할 수 있다. 세기 말, 혼란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조금씩 더 타락하기 위해 힘썼던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은, 그 힘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참, 저는 댄디라는 말의 시작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난 지금부터는 ‘댄디’란 말을 잘 쓰지 않으려고 해요. 그다지 좋은 어감이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요. 세기 말-종말-을 기다리는 불안을 시크함으로 덮으려했던 수많은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 군요. 


두서없지만, 이것하나는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무하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러스트 작가가 되어있을까요? 이미지 프로그램이 다 뭡니까, 그저 손 하나로 세련되고 화려한 도상과 글씨체를 그려냈으니 말이에요. 게다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인문학을 바탕으로 서 있을 때 어떤 깊이가 생길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본이기도 하지요. 체코를 향한 애국심과 철학을 바탕으로 흘러나오는 그림의 아우라는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지요. 음, 네. 까라바죠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가서 실제로 저 그림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로 무하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체코 어딘가에서 묵묵히 서 있을 <슬라스 서사시>를 보고 싶습니다. 


아, 당대를 주름잡은 아티스트로 덕망있는 선배 화가로, 좋은 남편, 아버지로, 애국자로 살았던 무하는 정말이지, 멋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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